‘9988행복나누미 사업’으로 돌아본 경로당 풍경
경로당은 단순한 마을 사랑방을 넘어 노년의 축소된 사회적 역할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의미를 되찾는 공간이다. 하지만 고령화된 농촌 경로당은 지리적 여건 등을 이유로 기존 경로당 사업의 수혜를 누리지 못한 채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는 소외된 지역의 경로당 어르신이 건강한 노후를 즐길 수 있도록 ‘9988행복나누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은 각 지역 시장과 군수가 주관을 맡으며 충북 내 12개 노인회에서 수행한다.
현재 이 사업은 옥천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9988행복나누미 사업을 운영하는 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 옥천군지회는 작년부터 옥천군과 연계해 교통에 제약이 있는 몇몇 경로당(군북면 막지리, 옥천읍 오대리 등)을 제외한 군내 모든 경로당에 15명의 행복나누미 강사를 파견해 경로당 방역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 지역 경로당의 건강과 활기찬 웃음을 지키기 위해 옥천군 경로당 곳곳을 누비는 9988행복나누미 강사들과 경로당을 돌아봤다.
“금요일엔 경로당에 사람이 더 많이 와”
옥천읍 대천1리 경로당, 9988행복나누미 김민주 강사
9988행복나누미 강사 김민주 씨가 경로당에 방문해 가장 먼저 하는 건 천장 조명을 켜는 일이다. “눈이 침침해서 어두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경로당 회원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아프신 분은 없는지, 가정에 일은 없는지 확인해요. 만약 특별한 일이 있다면 기록하고요. 코로나 전에는 요리 교실이나 만들기 프로그램도 진행했는데, 지금은 안부 묻고 간단한 스트레칭하고 건강 박수 같은 게 전부예요. 방역 지원 일지 작성하고 출석부 정리하는 게 가장 주된 활동이고요.”
올바른 마스크 착용법이나 손 소독제 사용법, 5인 이상 집합금지 등 젊은이에겐 익숙하지만, 노인에게 생소할 수 있는 규칙을 쉽게 알려드리며 자연스레 사회적 현안이나 분위기도 설명한다.
이후엔 김민주 씨의 주도 아래 간단한 체조를 하고, 일명 ‘건강 박수’를 치며 힘찬 구호를 외친다.
“건강 박수란 간단한 구호를 외치면서 손뼉을 치는 건데요, 단순하게 보이지만 건강, 행복, 사랑 같은 단어로 삶을 격려하고 치매, 혈압, 당뇨처럼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모두 눈을 반짝이며 구호를 외쳐 보지만, 몇 차례 반복해도 완벽하게 따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 기억 못 하셔도 괜찮아요. 다음 주에 또 알려드릴게요. 계속 알려드릴게요.”
“9988이에요, 어머님. 지금 뭐 하세요?”
“‘5인 이상 모이지 마라’, ‘하루에 몇 명이 코로나에 걸렸다’ 이런 소식이 들리긴 하는데 내용을 자세히는 모르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궁금한 건 기다렸다가 강사님 오는 날 물어봐요.”(대천1리 경로당 신동월 씨)
경로당 어른들에게 행복나누미 강사는 소통 창구다. 뉴스를 듣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해 물어본다. 읍사무소나 이장에게 직접 말하기 곤란한 애로 사항도 털어놓는다. 행복나누미 강사들은 이런 내용을 정리해 읍·면사무소나 이장에게 전달해 문제해결을 돕는다. 여가생활과 건강 관리뿐 아니라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교류하는 것이다.
“엊그제 코로나 백신 접종해서 몸이 안 좋고 부작용 걱정도 많은데 강사님한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물어볼 수 있으니 좋지.”(대천1리 경로당 이순자 씨)
최근 경로당의 화두는 백신 접종. 경로당 이곳저곳을 다니는 행복나누미 강사들은 다른 경로당 접종자의 예를 들어 어르신의 심리적 안정을 돕고, 접종 후 증상도 수시로 공유한다. 일시적으로 몸이 좋지 않던 접종자가 훌훌 털고 일어난 사례를 들려주며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어넣는다.
“경로당이 폐쇄됐을 때도 한 번씩 전화해 주니 좋았지요. 혼자 있으면 잘 안 하던 운동도 조금씩하고 상냥하게 안부도 물어주고 하니 외롭지 않고 좋던데요.”(대천1리 경로당 김선태 씨)
행복나누미 강사가 더 친밀한 이유는 경로당이 폐쇄됐던 때에도 어르신들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담당 경로당 회원마다 전화를 걸어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우울감은 없는지 등 상담을 이어왔다.
“경로당이 폐쇄됐으니 얼굴도 모르는 경로당 회원 목록을 받아서 전화부터 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10분이나 통화를 할 만큼 마음을 열까?’ 싶었죠. 그런데 신기한 게 몇 차례 통화하다 보니 얼굴 보는 것 못지않게 정이 들더라고요.”(9988행복나누미 강사 김민주 씨)
“전화만 하다가 처음 얼굴을 뵈니까 누군지 몰라서 어색해하시더라고요. 전화하는 시늉을 하면서 ‘9988이에요 어머니, 지금 뭐하고 계셨어요?’ 하니까 저라는 걸 바로 알아채고 반겨주셨죠.”(9988행복나누미 강사 박해열 씨)
외로움 벗고 추억 입는 경로당 활동
“홀로 지내시는 분들은 기념일을 잊기 쉽고 더 외롭거든요. 그런 날 경로당에 모여 대소사도 챙기고 함께 추억도 쌓지요. 평소 잘 웃지 않으시던 분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책임감이 들어요. 이 책임감이 제가 이 일을 하는 원동력 같아요. 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어서 근무 외 시간에 평생학습원 수업을 듣기도 하고, 따로 자격증 공부도 해요.”(9988행복나누미 강사 박해열 씨)
행복나누미 강사들은 요가, 웃음 치료, 생활체육, 민요, 발 마사지 등 자신의 특기를 살린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프로그램 내용과 경로당 반응도 수시로 공유해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어버이날, 노인의날,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에는 그에 맞는 활동을 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1년간 정들었던 담당 경로당을 매년 다시 배치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체험을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금방 헤어져야 하는 건 아쉽지만, 어르신들이 이제껏 하실 수 없었던 활동을 마음껏 경험하셨으면 바라요.”(9988행복나누미 강사 김민주 씨)
“경로당에서 뭘 가르치는 게 말이 되냐고 많이들 물어요. ‘노인들이 무슨 의욕이나 집중력이 있느냐’고 ‘어수선하지 않냐’고들 해요. 하지만 새로운 걸 알려드릴 때 어르신의 눈이 반짝반짝해요. 집중력이 없어 조용한 것이 아니라, 집중력이 넘쳐서 조용해져요.”(9988행복나누미 강사 박해열 씨)
이 외에도 담당 경로당이 매년 바뀌는 이유는 또 있다.
“처음에는 2년 주기로 재배치를 했는데 정이 너무 깊게 들다 보니 헤어질 때 서로 상처가 되더라고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은 곳에 사시는 분일수록 저희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기억해주셔요. 서로 안부도 묻고 생활도 챙기며 지내다 보니 헤어지기 아쉬우신가 봐요.”(9988행복나누미 강사 박해열 씨)
마음 깊은 곳 어루만지고, 생활 가까이 있고파
“처음에는 경로당에서 물건 파는 사람 아니냐는 오해도 샀어요. 하지만 꾸준히 사업을 운영해온 결과 어르신들이 행복나누미 강사를 기다리게 됐지요.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추억을 쌓는다는 것 자체가 건강한 생활의 증거 아닐까요.”(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 옥천군지회 주종순 경로부장)
행복나누미 강사 9년 차 박해열 씨는 “9988행복나누미 프로그램은 단지 경로당에 얼굴만 내밀고 마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며 “건강 증진, 치매 예방, 건전한 여가라는 몇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경로당에 경도인지장애 수준의 치매가 있는 분도 있고, 부부갈등 같은 가정 문제를 겪는 분도 있어요. 극심한 우울을 앓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요. 그런 걸 알아채고 위급상황을 최소화하는 게 목표죠. 주기적인 점검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내밀한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9988행복나누미 강사 박해열 씨)
자식은 멀리 나가고 홀로 사는 노인이 대부분인 농촌. 긴급 상황 시 기댈 곳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라곤 경로당뿐이다. 주종순 경로부장은 경로당이라는 공간이 “그저 모여 놀다 가는 곳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식구들이 있는 곳이며 일상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경로당을 관리하는 일에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 옥천 경로당에 더 활기찬 웃음이 가득하도록, 어르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웃음을 찾아드릴 수 있도록 9988행복나누미가 구석구석 들여다보겠습니다.”(대한노인회 옥천군지회 주종순 경로부장)
월간옥이네 통권 49호(2021년 7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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