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특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간옥이네 May 10. 2018

구읍에 살아 숨쉬는
이렇게 많은 역사

 

한국 근대사 만나는 ‘100년지용길’,

중심지 구읍 흔적 따라가는 ‘옥주양반마을길’을 걷다




어릴 적 쏘다니던 동네를 떠올려보자.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는 우리는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에도 관심을 가졌다. ‘우리 저 커다란 나무까지 빨리 달리기 시합할까? 우리 저 오래된 집에 들어가 볼까? 여기에는 누가 살았을까?’ 그 많은 호기심을 안고 해가 지도록 돌아다니던 우리는 사실 마을의 역사, 지역의 역사, 한반도의 역사를 노니고 있었다.


20세기 초 구읍 아이들은 역사 한 가운데 서있었다. 옥천 최초 공립학교인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가 생기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독재정권에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정구영 선생이 구읍에 거주했다. 구읍을 지날 예정이던 경부선 철도가 1905년 지금의 읍소재지에 들어서며 주요 기관들이 이전했던 때이기도 하다.


1900년대 이전부터 구읍에는 경상 진주 갑부 김기태, 조선시대 3정승 등 양반과 부자가 살았다. 구읍에서 태어나 평생 살아온 김진헌(87) 씨 말에 의하면 그 커다란 기와집에는 “인력거가 다 있고, 만석꾼이 5명도 되고 10명도 있었”고 “서민은 땅이 없으니 그 사람들 땅에 농사지어 쌀 열 가마니 중 일곱 가마니를 부자에게 바치”며 살았더랬다.


호기심을 안고 구읍 구석구석을 쏘다녀보자. 옥천 중심지에서 변두리가 된 구읍에는 그만큼 많은 역사적 순간이 있었다. “어쩌면 (철로를) 잘 틀었는지도 몰라. 안 그럼 다 안 남아 있었어”라는 조도형(옥천군 공무원) 씨 말처럼 구읍에는 아직 많은 역사적 현장이 남아있다. 시간여행을 하듯 근현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100년의 조우’길, 과거 옥천의 중심지였던 구읍의 오랜 흔적을 따라가보는  ‘그땐 그랬지’길을 준비했다. 가볍게 쏘다니듯이, 구읍을 느끼며.



코스1: 100년 지용길

죽향초등학교 구교사-정구영 거주 집-만세운동 벽보가 붙은 하계리 유석구 집 담벼락 추정지-독립운동가 김규흥 생가-독립운동가 전좌한 생가-옛 동성교회-정지용생가·정지용문학관


근대를 걷다

죽향초 구 교사

□ 죽향초등학교 구교사(1936), 옥천읍 향수1길 26(문정리 83)


오래된 건축물은 그 시대를 가장 솔직하게 나타낸다. 옥천 최초의 공립학교 건물이자 등록문화재 57호인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는 1936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건물은 주로 목구조로 건축하다 1920년대부터 조적식 구조(돌·벽돌·콘크리트블록을 쌓아 벽을 만드는 구조), 철근콘크리트 등의 방식이 도입됐는데, 지역 소규모 학교는 1940년대까지 목구조로 건축됐다. 이에 해당하는 죽향초 구 교사는 우리나라 근대기의 학교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죽향초 행정실 담당자의 도움으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복도를 따라 세 개의 교실이 늘어서있다. 옥천역사관으로 이용되는 첫 번째 교실에는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작은 책걸상, 화목 난로, 1955년 도덕 교과서 ‘애국생활’ 등이 전시 돼있다. 예전에 쓰이던 물건과 함께 근·현대 옥천 교육사를 볼 수 있어 과거를 보고 느끼는데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다음 교실은 죽향초등학교 역사관이다. 1905년 10월 1일 사립창명보통학교로 설립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옥천공립보통학교로 개칭 된 죽향초등학교는 옥천군 최초의 공립학교다. 이후 건물을 신축했으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12개의 교실과 생활기록부 등이 소실되기도 한다. 1961년에는 교내 우물·전기 시설 도입과 피아노 구입으로 교육 근대화 기반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교사를 나와도 마음은 아직 근대에 머물러 있다. 정지용 시인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졸업한 학교라는 사실에 그 발자취를 계속 따라가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독재 권력에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선비, 정구영 선생을 만나보자.




직언의 목소리


정구영 선생 거주 집


□ 정구영(1896~1978) 거주 집, 옥천읍 향수2길 11(문정리 50)


죽향초 구 교사를 나와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다보면 시간은 1960년으로 거슬러 간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가 이뤄졌고, 그에 따른 규탄시위에서 경찰의 실탄 발포로 다수의 시민이 총상을 입었다.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정구영 선생(1896년 군북면 소정리 출생)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을 향한 경찰의 발포사건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 퇴진운동은 전국으로 확산 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정구영 선생의 꼿꼿한 기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구영 선생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창당준비위원장으로 뽑힌다.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창당된 당이었지만 “그 안에서 정구영 선생은 절대 권력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민주공화당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고 함께 민주공화당을 떠났던 예춘호 전 의원이 증언한다.(2015년 11월 27일자 옥천신문) 이후 정구영 선생은 민주공화당 초대 총재로 추대되지만,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민주공화당이 3선 개헌을 단행하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 장기집권에 들어가자 탈당성명을 발표하고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떠난다. 정구영 선생은 3선 개헌을 두고 ‘우리가 만든 헌법을 우리가 짓밟는 짓’이라 평했다.


정구영 선생이 머물던 문정리 집은 현재 비어있다. 너른 마당 한편에 관리인이 사는 집만 한 채 있을 뿐이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넓지 않은 집 앞 골목을 걸으며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살아낸 이의 삶을 곱씹어본다. 이 길을 다 걸으면 우리도 우리의 시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독립운동 하는 마음


□ 만세운동 벽보가 붙은 하계리 유석구 집 담벼락 추정지


만세운동 벽보가 붙은 하계리 유석구 집 담벼락 추정지


한국 근현대사는 어느 때고 항상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펼쳐지는 ‘독립만세’ 벽보가 붙었던 현장이 그 시작점이다.


만세운동 벽보가 붙었던 하계리 유석구 집 담벼락으로 추측되는 곳은 현재 하계리 문정식당 부근이다. 당시 문정식당 앞 너른 길이 구읍 시장통이었고, 문정식당을 벗어난 곳은 전부 논밭이었기에 그 근방에 만세운동 벽보가 붙은 담벼락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와 외쳤을 독립만세 현장.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은 거리 뿐만 아니라 구읍 도처에 숨 쉬고 있다.



□ 김규흥(1872~1936) 생가, 옥천읍 향수 3길 19(문정리 6-2)


김규흥 생가


현재 춘추민속관 안에 있는 문향헌(聞香軒)은 대대로 청풍 김씨가 살아온 터다. 청풍 김씨 집안 기록인 가승에 의하면 문향헌은 1760년 아버지 김술로 공을 하계리 샘실에 모시고, 시묘살이를 위해 아들 김치신 공이 지은 건물이다. 이 집에서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선생이 태어난다.


나라가 위태롭던 당시, 김규흥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을 펼친다. 김규흥 선생은 앞서 보았던 죽향초등학교의 시초가 되는 창명학교를 1905년 세우는데, 이는 인재 양성을 위한 옥천 대표 근대 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이후 중국 광저우로 망명한 김규흥 선생은 중국 혁명세력과 교류하면서 나라 독립을 준비한다. 특히 김규흥 선생은 중화민국을 탄생시킨 중국의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해 중요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3.1운동기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우츠노미야타로의 일기에 김규흥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났던 것이 언급돼 ‘고위 밀정’ 논란이 일며 보다 신중한 학술적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고, 앞으로 더 활발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아쉽게도 한옥을 체험하고 김규흥 선생 생가를 둘러볼 수 있었던 춘추민속관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춘추민속관을 운영하던 정태희 관장이 떠나면서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간 집이 예전만큼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 생가 안내 푯말과 김규흥 선생 사진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는 생가 역시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김규흥 생가 입구
김규흥 생가 입구



□ 전좌한(1899~1986) 생가, 옥천읍 향수3길 57-5(죽향리 34-2)


독립운동가 전좌한 생가


김규흥 생가를 지나 실개천이 흐르는 길을 쭉 따라 올라간다. 실개천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 보이는 두 번째 집이 독립운동가 전좌한 선생의 생가다. 양철기와로 올린 지붕과 작은 마당이 고즈넉한 느낌을 풍기는 생가는 현재 다른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다.


전좌한 선생은 같은 고향 사람인 김응선과 총독부, 시청, 신궁 및 종로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폭탄 6개를 만들어 실험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서울로 올라와 일행과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들은 뒤 일경에게 탐지돼 체포된다. 그는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고, 만주로 도피했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이후 전좌한 선생은 1926년 비밀결사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고 4∼50명의 단원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 경고문 인쇄, 배부 및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다.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점으로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했으나 9월 22일 서울에서 체포된다. 그는 1927년 8월 31일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1년 3월 26일 출옥한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기 전날 전좌한 선생은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밀정 설이 나오는데, 한편에서는 고문에 의해 밀정이라는 허위 사실을 자백한 것이 사실화 됐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향후 면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 옛 동성교회, 옥천읍 향수2길40-4(죽향리 72-1)

옛 동성교회 건물


옛 동성교회는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만큼 소박한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옛 동성교회는 1961년 건축된 소규모 교회로, 목구조 뼈대 위에 시멘트로 마감한 형태다. 가운데 높이 솟은 종탑을 중심으로 한 대칭형 구조가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동안 창고로 쓰이며 방치되어 있던 건물은 현재 옥주교회 이창옥 목사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마을 도서관으로 꾸며놓은 상태다.


동성교회 역사는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6년 옥천읍 교동리 사가에서 ‘야소교 옥천 읍내교회’로 처음 개척된 옥천동성교회는 민노아(프레드릭 밀러, 1866~1937) 선교사가 개척한 일제시대 옥천 최초의 개신교회다. 이후 같은 뿌리에서 금구리 옥천남교회(현 옥천교회), 하계리 옥천북교회(현 옥천중앙교회)가 만들어지고, 1978년 4월 옥천동성교회로 이름을 개칭한 뒤 지역에 복지관이 없는 것을 대신해 1991년 경로대학을 설립한다.


옥천에서 청산교회 다음으로 오래된 옥천동성교회는 2016년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지역과 100년 넘는 시간을 함께한 교회의 흔적이 고즈넉한 멋을 풍기며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현재 동성교회는 옥천읍 지용로 66(하계리 100-1)에 위치하고 있다.


□ 정지용(1902~?)생가·정지용문학관, 옥천읍 향수길56(하계리39)


정지용 생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1902년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난 정지용 시인 생가다. 돌담과 사립문, 우물, 장독대와 함께 자리한 초가집은 당시 생활상을 보여준다. 번화가 한 가운데 위치한 집에서 정지용 시인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했고, 그 흔적은 복원된 생가 부엌 뒤쪽에 남아있다.


정지용 시인은 옥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을 떠난다. 당시 옥천에 났던 큰 홍수로 집과 재산이 모두 떠내려간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다 서울 공립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이후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듬해인 1923년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이때 유학생 잡지인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한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한 뒤에는 해방이 될때까지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한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한국어와 라틴어 강의를 하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한다. 이 외에도 정지용 시인은 <시문학>발간(1930),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을 출간하며 꾸준히 활발한 문학 활동을 이어갔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 이후 돌연 행적을 감춘다. 월북 중 미국의 폭격을 맞았다, 납북 됐다는 등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끝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지용 문학관. 한 방문자가 문학관을 둘러보고 있다.


출판 금지 되었던 그의 작품은 1988년도 해금되고, 1996년도 옥천군에서 정지용 생가 터를 매입해 생가를 복원한 뒤 지금에 이른다. 생가 바로 옆 정지용 문학관에서는 그의 생애와 시·산문집 원본을 전시하고 있는 문학전시실, 영상으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볼 수 있는 영상실 등이 있다. 모더니즘, 가톨릭 신앙,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자연 시를 발표했던 정지용 시인의 문학작품과 삶 자락을 따라가는 일은 한국 현대시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코스2:옥주양반마을길

삼정승 고가(육영수 생가)-옥천향교-교동리 비석군-교동리 느티나무-옥주사마소-옛 군수 관사-옛 관아 터-삼층석탑-돌사자 흔적


4월 30일 오후 2시, 구읍 읍내경로당에 동네 어르신들이 모였다. 월요일마다 옥천군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운동, 하모니카, 요리 등 다양한 수업을 듣기 위해서다. 수업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어르신들에게 물었다. 어르신, 예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양반마을’ 구읍을 만나다


“철로를 놓으려고 하는데, 이원서 구읍을 통과해야 가까웠거든. 그런데 여기 양반이 많이 사니까 시끄럽다고 철로를 돌리는 바람에 신읍이 생긴 거야.”(임용진, 81)

임용진 어르신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지금은 육영수 생가로 더 잘 알려진 양반집이었던 삼정승 고가(충청북도기념물 제123호)로 향했다.

심장승 고가(육영수 생가)

1600년부터 삼정승(김(金)정승, 송(宋)정승, 민(閔)정승)이 살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아버지 육종관 씨가 1917년 매입한 고가는 예로부터 ‘양반마을’이라 불렸던 구읍의 흔적 중 하나다. 약간 언덕진 곳에 지어져 배수가 잘 되고, 정남향으로 해가 잘 들며, 앞으로는 산이 펼쳐져 손에 꼽는 명당인 고가에서 양반마을 구읍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삼정승 고가는 전형적인 양반가옥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천정희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삼정승 고가의 ‘솟을대문’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데, 조선시대 정3품 이상이 가졌던 규모다. 대문을 지나 보이는 연못 앞 ‘연당사랑’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역시 벼슬 했던 집에만 있는 부유함의 상징이다. 또 삼정승 고가는 같은 집임에도 안채, 위채, 아래채, 사랑채가 각각 독립돼 살 수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청마루 밑에 공간을 둬 썩지 않게 하는 것, 여름에는 문을 걸쇠에 걸어 바람이 잘 통하도록 했던 것 등 옛 한옥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뒤 관리되지 않던 고가는 1999년 자손에 의해 철거된다. 이후 옥천군에 기증하여 지표조사와 고증을 통해 2004년 복원을 시작하고, 2010년 완공된다.


배움과 토론이 있던 곳


‘양반마을’ 구읍에 철로가 비껴가며 발전하지 못한 것이 어르신들은 못내 아쉽다. “읍사무소랑 군청이 있고, 우시장도 섰었어.” 중심지였던 구읍의 모습을 떠올리던 어르신들은 이내 엇갈린 기억을 맞추기도 한다.


지역 중심에 주요 기관이 있듯 구읍에는 향교가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역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옥천향교(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는 1398년(조선 태조 7년) 지어져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다시 세웠다. 옥천향교는 현재 유교성현을 기리는 석전제가 아니면 향교를 개방하지 않는다. 향교 구조는 앞으로 유교 교육을 위한 명륜당과 학생 거처인 동재와 서재, 중간에는 내삼문을 두고, 뒤편에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어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실시되자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문묘 제사만 남았다.


옥천향교


구읍 또 하나의 주요기관인 옥주사마소로 향하는 길, 개나리 어린이집 앞 교동리 비석군과 교동리 느티나무가 있다. 비석군에는 군수 및 관찰사(조선시대 지방 장관)와 옥천여자중고등학교 건물(김기태 가옥)을 기증한 한치봉 씨의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370년이 넘는 시간 자리를 지킨 느티나무에는 매년 달리는 나뭇잎에 따라 풍년이 오고, 흉년이 온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교동리 비석군과 느티나무


옥주사마소 현판


옥주사마소는 조선 중기 이후 지방의 고을마다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모여 친목과 학문, 정치, 지방 행정 자문 등을 논하던 곳이다. 옥주사마소는 옥천 옛 지명인 옥주를 따 이름 지었으며,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비축 저장해 두던 의창 건물을 뜯어서 1654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점차 압력 단체로 발전하여 폐단이 커졌으므로 1603년(선조 36년) 사마소를 없앤다. 조선 조정에서는 사마소를 없앴으나 옥주사마소는 살아남아 지금까지 맹맥을 잇고 있다. 옥주사마소는 경주사마소, 괴산 청안사마소와 함께 전국에 남아 있는 단 세 곳의 사마소 가운데 하나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희귀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보호되고 있다. 


옛 군수관사와 관아 터


구읍 토박이 어르신은 구읍에 있던 군수 관사와 관아터를 기억한다. 구읍 토박이 어르신의 말에 따르면 구읍사거리에서 위로 올라가 보이는 고택이 1872년 건축된 옛 군수관사(옥천읍 향수3길 35-4, 죽향리 79-1), 그 뒤쪽에 있는 밭과 집이 옛 관아 터다. 옛 고을의 주요 기관은 이제 흔적만 남아 구읍이 과거 옥천의 중심지 였음을 증명한다.


길의 끝자락에서 구읍을 그리다


골목길을 따라 죽향초등학교로 들어가면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죽향리사지 삼층석탑은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돼 있으며, 종교적·예술적 가치가 큰 석탑이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1호로 등록돼 있다. 


죽향유래비 옆 돌사자 흔적


죽향초등학교를 곧장 나와 보이는 읍내 주유소 앞 죽향유래비 옆에는 죽향리 전설인 돌사자와 돌사람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 말 구읍에 이름 없는 선비가 와 “이 동네는 서쪽이 훤하게 뚫려서 허술하기 때문에 돌사람과 돌장승을 만들어 서쪽에 세우고 제를 올리면 동네가 언제나 편안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 중 돌사자는 없어지고, 돌사람의 흔적만 남아 죽향리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부록:잘 지은 고택을 매만지는 사람

향수를 담은 집-마당 넓은 집-춘추민속관-아리랑


구읍에는 진주 갑부 김기태 씨, 독립운동가 김규흥 선대가 지은 대규모 고택이 남아있다. 지금보다 훨씬 장대했다는 고택은 볼 수 없지만, 한옥을 다듬고 고치며 지금의 풍경을 만든 사람이 있다. 김기태 고택이었던 향수를 담은 집과 마당 넓은 집, 김규흥 선대가 지은 고택이었던 춘추민속관, 김기태 고택 별채로 쓰인 아리랑을 둘러봤다. 향수를 담은 집에서는 한옥체험 숙박이 가능하고, 마당 넓은 집과 아리랑은 식당으로 쓰인다. 춘추민속관은 한옥체험 숙박과 식당을 준비해 5월 중순 영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구읍에는 이 외에도 ‘옥천관’(옥천읍 향수3길 37-3)이라 불리는 곳과 이필수 씨 사택, 장월용 씨가 거주하는 한옥이 있다. 


역사 담긴 고택이 좋더라(1910), 옥천읍 향수3길 27(죽향리 63-1)/ 향수길 45(죽향리 63-9)


향수를 담은 집


김기태 가옥은 1910년 진주 갑부 김기태 씨가 지은 대규모 한옥이다. 1944년부터 1964년까지 여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일부 철거되어 없어진 상태다. 현재 고재만(73) 씨가 거주하는 ‘향수를 담은 집’, 음식점으로 이용되는 ‘마당 넓은 집’을 포함해 철거된 가옥이 전부 한 채의 집이었다. 고재만 씨는 1991년 김기태 가옥을 매입했다.


“여중고등학교 교사로, 공장으로 쓰이면서 유리창도 다 깨지고,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집 같았어요. 섣불리 고치지도 못하고, 전국으로 한옥을 보러 다니다 원 기둥만 두고 내부를 개조했죠. 그렇게 산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집에 오면 푸근하고 안정이 돼요.”


향수를 담은 집 고재만 씨.


그가 기억하는 김기태 가옥은 지금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감 집처럼, 마당 넓은 집 지나 초밥 집까지 쭉 기와집이 늘어서 있었어요. 얼마나 컸는데.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집이죠.”


고재만 씨는 T자 모양으로 지어져 손님을 맞던 향수를 담은 집과 ㄱ자 모양으로 지어져 안채로 쓰이던 마당 넓은 집이 원래 이어져 있었다고 말한다. 손님을 맞는 곳이었던 만큼 고재만 씨 가옥에는 서까래를 이중으로 얹는 등 정성 들인 티가 난다. 마당에는 건물을 짓던 당시 불이 났던 것을 예방하기 위한 해태상이 있었는데, 누군가 가져가고 고재만 씨가 새로운 해태상을 가져다 놓았다.


위에서 내려다 본 향수를 담은 집. T자형 구조 집 너머에는 ㄷ자 모양의 마당 넓은 집이 있다.


동이면 적하리가 고향인 고재만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다 서울로 상경했다. 돈이 부족해 서각 공장에 다니며 야간통신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옥천으로 내려온다. 취미로 시작한 서각과 그림, 글씨는 그의 삶을 이루는 강물이 됐고, 그렇게 흐르다 보니 오래된 집을 지키게 됐다. 그는 가끔 옥천 여중고등학교 졸업생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집에 ‘향수를 담은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옥체험도 운영하는 향수를 담은 집에는 구읍의 옛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김규흥 머물다 간 회화나무 선 고택(1760, 1856), 옥천읍 향수 3길 19(문정리 6-3)


춘추민속관 문향헌


탁 트인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멋들어지게 서 있는 춘추민속관은 문향헌과 괴정헌으로 나뉜다. 서쪽 문향헌은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의 선대 김치신이 1760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동쪽 괴정현은 1856년 지어져 1910년대에 대한제국 탁지부 출납국장 출신 괴정 오상규(1858~1944 조선 말기의 무신)가 매입해 후손 오윤묵이 증축했다. 한때 방치되어있던 집을 정태희 관장이 가꿔 일으켜 세우고, 집에 머물다 간 사람의 흔적을 찾아 김규흥 선생을 발굴하기도 해 옥천군 향토문화유적으로 등록됐지만 지금은 굳게 문이 닫힌 상태다.


현재 춘추민속관은 옥천읍 서정리가 고향인 유재광 씨와 아내 백금화(54, 중국 길림성) 씨가 관리하고 있다. 유재광 씨 어릴 적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셋방을 얻어 살았던 집이라 중국에 있는 백금화 씨 동생 김철 씨가 2015년 매입했다. 식당과 숙박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집수리 때문에 시작이 늦어지고 있다. 백금화 씨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고택을 정비해 5월 중순 쯤 식당과 숙박 영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춘추민속관을 지나 쭉 내려오면 1914년 갑부 김기태가 별채로 지은 아리랑 가옥이 있다.  현재 한식 전문 음식점 ‘아리랑’으로 운영되고 있어 한옥의 정취를 즐기며 식사할 수 있다. 구읍 길을 걷다 지치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한옥에 쉬어가도 좋겠다. 한옥의 멋에 흠뻑 젖었다가도 이 커다란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커다란 집에서 일한 사람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생각해도 좋겠다. 그렇게 쉬었다 다시 길을 떠나자. 가볍게 쏘다니듯이, 구읍을 느끼며.

매거진의 이전글 노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