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이야기'
약 800Km를 5kg가 거뜬히 넘는 짐을 메고 걷는다는 건 여행보다 고행에 가깝지 않을까. 언뜻 보기엔 엄두가 안 나는 이 길을 선뜻 나선 이들이 있다.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다. 이들은 왜 그 먼 길을 걷는 여정을 택했을까. 지난 7월 17일 열린 스물 세 번째 둠벙에 빠진 날에서는 순례길을 걸은 옥천 청년 두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산티아고 순례길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길.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칭하는 스페인식 이름이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여행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한국에서는 올해 초 tvn에서 방영된 ‘스페인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
이야기 손님
여진
이 근방에 사는 사람 중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진진빵집’ 사장님. 2년간 빵집을 운영하다 일상 속 복잡한 고민 대신 묵묵히 걷고 싶어 올해 2월~3월 순례길을 떠났다. 최근 옥천읍 마암리 양우내안애 아파트 상가 안에 빵집을 다시 열었다.
박누리
2014년 영화 <나의 산티아고>를 본 후 언젠간 꼭 산티아고를 가겠노라 결심. 9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면서 순례길에 오르기로 결정. 올해 5월~6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돌아왔다. 현재 월간 옥이네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오롯한 휴식이 되는 시간
사회자 없이 진행된 이번 행사는 이야기 손님끼리 서로 편하게 대담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느낀 순례길의 매력을 설명하던 두 사람이 함께 꼽은 순례길의 매력은 ‘휴식’. 순례길 하면 인생의 답을 찾는 고뇌의 여정일 것 같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여진
산티아고에 가면 ‘오늘은 얼마나 걷지’, ‘식사는 언제 하지’ 이런 단순한 고민만 하고 싶었는데 실제로 그랬던 것 같아요. 800km를 걷는 일이 체력적으로 쉽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한 휴식이라고 느꼈어요.
누리
한국에 있으면 나와 연결된 게 너무 많은데 산티아고에 있는 동안은 그런 게 다 끊어지니까 좋았던 것 같아요. 걷다 보면 한국에 두고 온 것들이 생각날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하늘 예쁘다’ 이런 생각 하면서 걸은 것 같아요. 구름 낀 날은 덜 더워서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구름이 없으면 화창한 하늘이 예뻐서 좋고. 보통 아침 7시에 걷기 시작해 오후 3~4시 전에 도착하거든요. 일상이 거의 똑같아요. 걷고 빨래하고 마을구경하고 먹고 자고. 그런 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단순해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느낀 것 같아요. 다시 걷고 싶어요.
모든 순간이 기적 같던 여정
아무리 좋은 길도 누구랑 걷느냐가 중요한 법. 산티아고의 풍경이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아름답게 추억되는 이유는 그 길에서 만난 작은 인연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누리
소소한 일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엄청 우울한 생각을 하면서 걷던 날이었는데 뒤에서 오던 미국인이 저를 부르더라고요. 대뜸 “너 아이폰 쓰지” 물어서 맞다고 하니까 제가 걷고 있는 모습과 어우러진 풍경이 예뻐서 사진을 찍었는데 에어드롭으로 보내준다고 하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런 순간들이 기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일일이 다 설명할 순 없지만 길을 걷는 매 순간 그랬어요. 이 기억들이 살면서 힘이 될 것 같고요.
여진
저는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다보니까 타인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 스스로 사람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산티아고 와서 ‘아, 내가 사람을 좋아하구나’ 깨달은 것 같아요. 사실 순례길 자체가 특수한 길이잖아요. 같이 걷다 보면 묘한 전우애가 생겨요. 빠른 시간에 정이 드는 것 같아요. 순례자들은 인사 할 때도 순례길에서는 헤어질 때 꼭 'Bye'가 아니라 'See you'라고 말하거든요.
라바날 델 까미노라는 마을에 계셨던 한국인 신부님도 기억에 남아요. 순례길을 3등분으로 나누면 몸으로 걷는 길, 정신으로 걷는 길, 영혼으로 걷는 길이라고 말해 주셨는데 그 말이 확 와닿았어요. 막상 순례길 걷기 전과 후의 저 자신이 얼마나 바뀌었나 생각해보면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 삶을 보는 각도가 달라진 것 같거든요.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
5월과 6월, 2월과 3월. 서로 다른 계절에 걸었던 두 사람의 길은 같은 듯 달랐다. 순례길은 보통 4월 말부터 9월까지를 성수기, 날씨가 추워지는 11월 말부터 3월까지를 비수기로 친다.
여진
겨울은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많이 걷진 않아요. 그러다보니까 상점이나 숙소가 문을 안 여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걸었을 때도 처음 2, 3일은 눈이랑 비가 와서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갈 수 있는 곳도 한정적이고 피레네도 결국 못 갔어요. 대신 만났던 친구를 계속 만나 사이가 끈끈해졌죠. 또 걱정했던 것만큼 춥지는 않았어요. 낮에는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서 머리카락이 다 탔어요. 머릿결이 엄청 상하더라고요. 짐 챙길 때 헤어 에센스까지 챙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현지에서 샀어요.
계절불문 순례길 필수품! 헤어에센스
누리
저도 머리 엄청 상했어요. 해가 진짜 뜨거워요. 여진씨랑 제가 걸어온 길이 프랑스 길인데 저는 성수기에 걸어서 걷는 사람이 많았어요. 피레네도 넘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요. 사리아에 있는 산을 넘는데 오르막길에서 줄 서서 갔던 기억이 나요.
대담이 끝난 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순례길 준비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Q. 숙소는 현장예약인가요?
A. 알베르게에 예약문화가 생기긴 했지만, 예약을 하지 않아도 숙소를 잡는 데 어려움은 없어요. 공립이나 교구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예약제가 아니고 선착순이에요. 대신 비수기에는 운영하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하는 게 좋아요.
Q. 얼마나 덥나요?
A. 제가 5월 11일부터 6월 17일까지 걸었는데 35도를 넘은 날은 일주일 남짓이었어요. 보통 27~28도 정도였어요. 그런데이 날씨가 이상기후라 매년 달라질 것 같아요. 많이 올라갈 땐 42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주로 새벽 4시나 5시쯤부터 걸어서 일찍 도착하는 방법으로 걷는 것 같아요.
이외에도 초반에 무리해서 걷지 않기, 많이 걸으려고 욕심내지 않기,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으면 용기 내 가보기 등 직접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다양한 ‘꿀팁’이 오갔다.
신은실(47, 옥천읍 가화리)씨는 이번 자리를 통해 답을 찾았다며 미소 지었다.
“내년에 자녀들과 함께 (순례길을) 갈 예정인데 마음 한 켠에 잘 걷고 싶다는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네요.”
페이스북에서 강연 정보를 보고 경기도 남양주에서 왔다는 정혜영(46)씨는 순례길을 떠날 용기가 생겼다며 산티아고 풍경이 담긴 사진 한 장을 품에 꼭 안았다.
“항상 마음으로만 꿈꾸던 여행이었는데 실제로 다녀온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실감이 나네요. 어렴풋이 상상했던 여행계획을 구체화하고 싶은 용기가 생겼어요.”
월간옥이네 VOL.26
2019년 8월 호
글 사진 이윤경 기자
사진 김예림, 박누리·여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