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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옥이네 Feb 17. 2020

우연처럼 찾아온 마을, 생명을 일구는 풍경이 되다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 박향자 씨 인터뷰


2012년 옥천에 올 때까지만 해도 농사를 짓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옥천에 오게 될 줄도 몰랐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전원생활을 동경했지만 귀촌은 주저하던 때였다. 그러다 결국 남편과 함께 찾은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라는 동네를 알았다. 고향인 청주 근처로 귀촌할 곳을 찾던 터라 이쪽으로는 생각도 못했다. ‘한 번 구경이나 가볼까’하며 봤던 마을이, 풍경이, 집터가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다른 곳을 가봐도 성에 차지 않았다. 박향자(57, 군북면 자모리) 씨는 ‘인연이 되려니 그렇게도 되더라’며 웃었다.

“청주에서 나고 자라 결혼을 하면서 서울로 갔어요. 서울에서는 식당을 운영하다 대전으로 내려왔고요. 나중에 나이 먹으면 전원생활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귀촌해보자고 남편과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죠. 자모리는 그때 처음 와본 거예요. 집도 양지바르고 마당도, 전망도 다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다만 집 옆 터가 너무 커서,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니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을 접었어요, 처음엔.”

그 뒤로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집을 보러 다녔지만 어느 곳도 성에 차지 않았다. 고민하다 결국 이곳으로 귀촌을 결심하게 된 이유다. 그때만 해도 ‘ㄱ’자 놓고 낫 몰랐던 박향자 씨가 2천600㎡(약 800평)의 땅을 일구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 작지 않은 땅에 박향자 씨는 꽤 많은 작물을 키운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가지, 들깨, 참깨, 배추, 무, 양파, 파, 생강, 마늘, 딸기, 하루나, 두릅, 돼지감자, 당근, 서리태, 감, 복분자, 아로니아, 사과대추…….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대문 옆으론 유정란을 낳는 토종닭이, 마당 너머 검은 천막 안에선 표고버섯이 자란다. ‘내 가족이 먹을 거 조금씩 해보자’는 생각에서 어느새 이만큼이나 온 것이다.


“땅을 마냥 놀릴 수는 없어서 마을 분들 따라 부추 농사를 좀 지었죠. 마침 이 땅에 부추가 파종돼있기도 했고요. 근데 워낙 초보라 그런지 너무 힘들더라고요. 농산물 공판장에 나가는 물량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고요. 결국 포기하고 몇 년은 동네 분들 농사짓는 거 옆에서 보고 조금씩 배웠어요.”


3~4년 전부터 이것저것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다.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이 무성한 풀잎이 되고 어느새 열매를 맺는 과정은, 힘들지만 보람찼다. 여러 종류를 심은 덕에 밭 풍경도 다채로웠다. 농약은 굳이 치지 않았다. 농약을 많이 쳐야 하는 작물은 그 다음해에는 심지 않는 식으로 밭에서 차츰 배제되었다. 그렇게 키운 농산물은, 가족이 먹기도 하고 주변 이웃이나 지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다 옥천에서 ‘로컬푸드 생산자 교육’을 한다는 이야길 들었다. 교육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현재 박향자 씨는 수확 후 먹을 만큼을 제한 농산물을 옥천로컬푸드 직매장에 내고 있다. 그가 직매장에 내는 농산물은 모두 ‘옥천푸드 인증’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로컬푸드’ 운동의 취지가 ‘소농이 키워낸 다양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지역 내에서 소비해 순환과 공생, 자치와 자급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생산자 중 하나가 박향자 씨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집에선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지만, 그렇다고 공판장에 내기엔 너무 적은 양이거든요. 이럴 때 로컬푸드 직매장이 있으니 좋죠. 그날 수확량이 호박 3개뿐이라도 포장해서 내면 되니까요. 남편이 대전에서 계속 자영업을 하다 보니, 농사 지을 사람이 저 뿐이라 어차피 많이는 못해요. 가족들 먹을 거라 나름대로 깨끗하게, 또 건강하게 키우고 있거든요. 적은 양이라도 지역 소비자들과 나눌 수 있으니 그건 또 그거대로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힘들지만 재밌다. 가족이 먹을 농산물을 내 손으로 키운다는 재미, 그렇게 키운 농산물을 직매장에 내 용돈벌이도 쏠쏠한 재미. 무엇보다 단일 품목만 키웠다면 매일 밭에 나가 일하는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대전에서 자동차 부품업 관련 자영업을 하는 남편 안종인(63) 씨가 간간이 농사일을 거들지만, 사실 대부분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 마무리한다는 것도 박향자 씨에겐 빼놓을 수 없는 보람이다.


“힘들어도 밭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잡념도 없어지고.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겨울에도 심심하면 밖에 나가 풀도 뽑고 냉이도 캐고 그러죠. 올해는 밭에서 난 재료로 김장을 해 친정어머니께 드렸는데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들깨, 참깨로 직접 기름 짜서 가족들 나눠주고, 감 농사지은 것도 주변에 나누고. 우리 먹는 식탁에 올라가는 거잖아요. 그런 걸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 뿌듯하죠.”


2019년 12월은 농사 마무리에, 김장에, 둘째 며느리 해산에 박향자 씨에겐 무척이나 바쁘고 정신없던 달이었다. 이제 조금 숨을 돌렸으니, 새해 농사 계획을 세우며 다시 쏠쏠한 재미를 누려보려 한다.


“농사라는 게, 나에게 맞는 거, 우리 땅에 맞는 걸 찾아가는 과정이더라고요. 내년에도 저한테 맞는 거 찾아서 재미나게 지어봐야죠. 올해 직매장에 물건 내느라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무장아찌 같은 가공품 만드는 것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또 올해는 친정에서 ‘청서리태’를 얻어와서 좀 심었는데, 계속 좋은 씨앗을 받을 수 있게 내년에도 잘 키워보려고요. 대물림해서 키우고 싶은 씨앗이기도 해요.”


함께 밭 구석구석을 돌며 곳곳에 심은 농작물을 설명하던 박향자 씨가 물끄러미 밭을 바라본다. 농사를 알지 못하는 이에겐 그곳이 그저 겨울을 앞둔 황량한 모습일 뿐이지만, 땅을 알고 흙을 알고 씨앗을 아는 이에겐 초록이 무성한 생명의 풍경이다.




월간 옥이네 VOL.31
2020년 1월호
글, 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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