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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기 Oct 28. 2024

살려달라는 구조요청



나는 고통속에 있었다. 끊임없이 자존감이 떨어졌고, 어떤 날은 분노하고 어떤 날은 슬퍼했다. 타인을 이해하다가도 그 이해는 갑자기 증오가 되기도 했다. 업무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시간이 종종 있었으며, 괴롭고 힘들다는 말을 가볍게 넘기는 주변사람들에게 분노하는 날들도 생겨났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지 두어달이 지나서자 나는 히스테릭하면서도 우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맑은 날의 출근 길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던 중에 신호가 바뀌어 잠시 건널목앞에 멈춰섰다.


‘여기서 갑자기 뛰어들어 차에 치인다면 얼마나 다칠까.’

‘얼마나 아파야 출근하지 않아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다시 푸른신호로 바뀌었다. 눈에 눈물이 차올랐고, 더 이상 혼자 견뎌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출근길에 그런 생각을 겪었으니 업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힘껏 참다가 화장실로 가서 심호흡 하곤 했다. 울지 않고도 말을 할 수가 없어 핸드폰만 꼭 쥐고 화장실칸에 숨어있었다. 코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목구멍까지라도 내려가야 전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오늘 예약할 수 있을까요?”


그건 구조신호 같은 것이었다. 정말 내가 건널목이 아닌곳에서 차도에 뛰어들거나, 빨간색의 신호에서 길을 건너거나,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내 죽음이 잠시 잠깐이라도 고통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나서 동시에 가족, 친구들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막게 해주지 않았다. 인간이 이렇게 이기적이구나 싶었다. 누구든 내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누구때문에 살아야지, 누구때문에 버텨야지 이런 말들이 얼마나 소용없는 위로인가, 가치없는 격려인가. 그 순간에 알게 되었다.


구조요청을 한 이유는 순전히 나 자신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끝자락에서 허물어져가는 빙하를 아직 보지 못했다. 마다가스카르의 흙먼지속에서 바오밥나무를 보지 못했다. 머나먼 페로제도에서 퍼핀을 만나지 못했다. 오로라도 보지 못하고 죽다니. 그런 것들이 억울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나를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한 일들은 또 다른 이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무한히 계속되겠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내가 소망하던 일들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보고 싶었던 꿈들은 소멸되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고작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보고싶었다. 빙하나 바오밥나무나 퍼핀같은.

 

화장실 변기위에서 그런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다가 전화했다. 나를 살려주세요. 살아남을 힘을 주세요.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그 전화는 내게 그런 의미였다. 힘들어서, 아파서, 괴로워서, 슬퍼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아. 여러분을 구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 예약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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