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스트릭트 9'
솔직히 말하면, 세상의 주인공은 필자인 ‘나’인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며 난 언제나 최후에 승리를 쟁취할 운명이라 믿어왔다. 언제나 나는 운이 좋을 것이며, 잠시 역경의 시간이 오더라도 결국 이를 이겨내고 미소를 지으리라 생각했다. 뉴스 속 사건사고의 피해자들과 나는 무언가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더 여실히 느낀 타이밍은 이 글을 쓰는 시점과 그리 멀지 않았다.
영화 <디스트릭트 9> 주인공 ‘메르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참으로 오묘하다.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유명한 영화고 또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감상했지만, 외려 몰려오는 감정은 ‘이리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가?’라는 일종의 허무감이었다. '피해자라는 사회, 구조적 약자에 위치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가해자와는 전혀 다른 올바른 세계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나의 굳건한 고정관념은 급속도로 물러진다.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인간의 운명은 이리도 연약한 것일까? 만일, ‘메르바’에게도 인간의 운명이란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바뀐다면,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쉬웠을까?
외계인 관리국 ‘MNU’ 소속의 ‘메르바’. 28년 전 남아공 상공에 불시착한 일명 ‘프론’이라 불리는 외계인의 관리가 그의 주요 업무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프론’들의 범죄와 폭동으로 도시 '요하네스버그'의 치안은 극악으로 치닫고, 정부와 ‘MNU’는 ‘프론’이 거주하고 있는 ‘디스트릭트9’을 강제 철거한 후 이들을 집단 이주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게 된 ‘메르바’. 그런데 그는 프로젝트 진행 중 불의의 사고로 외계 물질에 노출되면서 그의 몸은 점점 ‘프론’으로 변하게 된다. 외계인 무기를 가동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된 ‘메르바’. 이를 알게 된 ‘MNU’는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메르바’는 외계인 수용 구역 ‘디스트릭트 9’로 숨어든다.
영화 속 ‘메르바’는 여타 등장하는 여러 ‘인간’들과 달리 ‘프론’에 대해 조금 특별하게 접근한다. 완전한 무시와 핍박의 자세보단, 하나의 실험체,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 표본실에 박제된 ‘곤충’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프론’을 대하는 ‘메르바’. 그들의 언어습관, 생김새, 번식능력, 다양한 신체 정보까지, 그에게 ‘프론’은 더러운 존재를 넘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 마리의 ‘곤충’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프론’을 향한 그의 행동은 하나의 폭력, 억압이 아니다. 단순히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놀이’이자 욕구 충족을 위한 자연스러운 ‘습관’에 불과하다. 마치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 풀을 밟고, 나뭇가지를 꺾는다고 하여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메르바’에게 ‘프론’이란 인간에게 있어 밟을 잔디, 혹은 꺾어도 문제없는 나뭇가지 같은 존재다.
불의의 사고, 아니 그의 과한 호기심으로 일어난 ‘업보’라고 하는 게 맞을까. 메르바는 한 ‘프론’의 집을 수색하던 중 외계 물질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한다. 이로 인해 ‘메르바’는 인간에서 프론화가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프론화가 진행되는 메르바와 그를 쫓는 기관 ‘MNU’의 추적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순식간에 국면은 전환된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위치에서 부러질 처치가 된 ‘메르바’.
영화는 여타 다른 공상과학 부류의 작품과는 달리, 밝은 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3년 안에 돌아오겠다는 프론 ‘크리스토프 존슨’은 10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메르바’의 프론화는 이미 그가 과거 인간이었다는 흔적조차 지운 지 오래다. 프로젝트가 엎어졌는지 프론으로 가득 찬 디스트릭트 9은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언급조차 없다. 마치 원래 있었던 일처럼, 평소 흘러가던 일상처럼, 인간에서 프론이 된 최초의 인간 ‘메르바’의 이야기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간다.
영화 <디스트릭트 9>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글과 영상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인 ‘아파르트헤이트’에 집중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 ‘디스트릭트 9’는 인종차별을 넘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대해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메르바’의 프론화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간단하게 진행된다.
우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비장애인이 아닌, '미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코로나만 봐도 특정 부류, 한정된 소수만이 해당하지 않는다. 삶이란 하루하루 알 수 없는 불확실의 연속이다. 어제까지 건강했던 운동선수가 다음 날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수도 있다. 어제까지 영원의 사랑을 약속하던 연인이 다음 날 이별을 고할 수 있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고정된 불변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 앞에선, 신의 운명 앞에선 우린 한낱 부러짐을 두려워하는 나뭇가지의 존재이며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기 바쁜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피해자에 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는가? 피해자를 마치 영원히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는 ‘프론’ 마냥 머나먼 외계의, 미지의 존재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메르바’는 자신이 ‘프론’이 될 줄 알았을까? 그가 너무나도 쉽게 프론이 된 것처럼, 누군가는 너무나도 쉽게 피해자가 된다. 하나의 손짓에 ‘메르바’가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된 것처럼, 하나의 몸짓, 눈짓에도 우리의 위치는 급변한다.
다큐멘터리는 픽션의 극화보단, 실제 관찰자의 역할에 중점을 둔다. 한 발자국 떨어져 현실에 일어날 법한 혹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기록하는 관찰자. 오늘날 끝없는 전염병과 불황 속 낙오자라는 ‘프론화’가 되길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 ‘디스트릭트 9’ 속 세상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막이 내린 후, 우린 누구를 향해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 글은 단순히 인종차별이 나쁘다, 혹은 피해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글이 아니다. 오히려 신세 한탄 혹은 이리도 나약한 인간을 창조한 신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에 관한 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메르바’는 과연 천벌을 받은 것일까? 혹은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일까? 영화를 본 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단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뿐이다.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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