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매일같이 똑같은 구간을 반복하며 돌아간다. 하나의 목적지, 하나의 선로. 특별한 것도 없는 이 이동 수단은 마치 우리의 일상과도 같다. 학생은 집, 학교를 반복하고 직장인은 집, 직장을 반복하듯, 주변 환경, 직업, 나이 등의 요소에 따라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이다. 바뀌는 것은 없다. 마음은 매일 마주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지하철 없는 휴양지로 떠나고 싶지만, 몸은 어느새 지옥철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집어넣기 바쁘다.
영화 <콜래트럴>은 살인청부업자 빈센트와 그를 태우게 된 택시 기사 ‘맥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맥스를 협박해 의뢰를 받은 살인을 실행하는 ‘빈센트’와 그를 막기 위해 ‘맥스’는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살인청부업자는 왜 택시를 탔을까?
영화 속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왜 프로 살인청부업자가 ‘택시’를 탔을까? ‘살인’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을 가진 그들의 세계에 대해 잘은 모른다. 하지만 살인 그 자체가 발각 시 엄청난 중죄에 해당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각자만의 정확한 기준과 방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극 중 ‘빈센트’는 살인을 할 시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심장 부분에 2발 그리고 확인 사살 형식으로 머리 1발을 쏘는 일명 ‘모가디슈 드릴’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 청부업자가 택시를 탄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할 수밖에 없다. 먼저 비밀 유지를 위해 살인 행위의 유력한 목격자가 되는 ‘택시 기사’를 타깃 외에 추가로 살해해야만 한다. 혹은 애초에 시작부터 자신의 협박이 택시 운전사에게 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영화 속 ‘맥스’처럼 ‘업무’를 방해할 수 있는 등 갖가지의 위험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왜 택시에 탔을까?
사실 영화 ‘콜래트럴’의 백미이자 핵심은 ‘빈센트’의 입을 빌려 ‘맥스’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에게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일관된 존재론적 물음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변화하는 ‘맥스’의 성장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다룰 의문은 많고 많은 환경, 공간 그리고 직업 중에서 왜 하필 ‘택시’ 이냐는 것이다.
“LA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죽으면, 누가 알기나 해줄까?”
앞서 영화는 ‘빈센트’의 말을 빌려 관객들 그리고 ‘맥스’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물음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대사는 단순히 일방향적으로 ‘맥스’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빈센트’는 직접 ‘맥스’라는 타자와 1) 택시라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직접 그를 살인 현장에 대동하여 자신의 2) 직업적 행위에 대한 사실성을 인정받으며, 이러한 살인 행위로 일어난 ‘맥스’의 공포, 적대심을 통한 자신의 3) 존재적 가치를 확인해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무대 위 관객들(맥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연기 혹은 개그가 원활히 진행됨을 확인하며 다음 극을 이어가는 연기자, 코미디언(빈센트)인 것이다.
결국 그토록 ‘빈센트’가 택시를 고수했던 이유는 택시만의 사적인(Private) 특성에서 기인한다. 택시는 대중교통 중 유일하게 운전기사와 승객의 1대1 쌍방향적 소통을 기대할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은 없거나 많아 봐야 1명이 전부인 운전기사와 불특정 다수의 군중으로 구성된 시스템이다. 또한 택시에서 승객은 운전기사와 교감을 통해서 자신이 정한 목적지를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하다. 하지만 버스와 지하철에선 사전에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단순히 타고 내릴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군중 속 고독을 혐오하는 ‘빈센트’에게 (극 중 ‘빈센트’는 ‘맥스’에게 LA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죽었지만 6시간 동안 아무도 알지 못했다며 LA의 삭막함이 싫다고 말하는 장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혼자 운전을 하는 것은 스스로 직업적 행위와 존재적 가치를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고독한 군중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사회 속에서 타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고립감으로 번민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 ‘빈센트’는 그런 고독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또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강조하고 싶어 택시를 선택했다. 끊임없는 자신의 범죄 행위를 통해 놀라고 두려움에 떠는 운전기사들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며 자신의 ‘살아있음’의 욕구를 채우는 주인공 ‘빈센트’. 영화의 후반부에서 ‘맥스’를 쫓으며 ‘빈센트’는 외친다.
“I do this for a living!”
그렇다, ‘빈센트’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타인에게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택시를 택했다.
사춘기 시절, 흔히들 겪는 방황 혹은 일종의 엇나감에 대해 사람들은 ‘탈선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지하철은 운전기사에게 아무리 외쳐도 일직선으로 곧게 정해진 선로 이외에는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난다면 어른들 말처럼 ‘사고’인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가 선택한 교통수단인 택시는 처음 정해진 목적지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탈선했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승객의 마음 가는 대로 갈 뿐이다. 그 누구도 중간에 차를 돌려 달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극 중 ‘빈센트’의 살인 행위에 대해선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직접 자신이 목적지를 선택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그러한 주체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찾으려 택시를 타는 그의 결심은 오늘날 쳇바퀴 같은 지옥철에 갇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8월의 무더운 여름, ‘빈센트’는 우리의 쳇바퀴 같은 지옥철에 자그마한 제동을 걸었다. 이제 정지된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탈 차례다.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설사 그 목적지가 눈앞에 다 왔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를 돌려도 된다. 겁내지 말자, 쉼표가 문장을 끝마치는 마침표가 아닌 것처럼, 지하철은 멈췄지만, 우리의 삶은 멈춘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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