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이 각종 잡지를 통해 세상에 공개된다. 그렇게 인간의 시야는 지구를 넘어 우주를 향했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의 세계가 존재함을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세계는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되었다.
이 지구 사진이 공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루치오 폰타나는 새로운 공간 개념에 매료되었다. 인간이 지구를 넘어 우주를 향하게 된 것과 같이, 그는 캔버스를 넘어서는 예술, 평면이 아닌 ‘공간’ 더 나아가서는 ‘4차원’을 향하는 예술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현대 1900년 대의 미술가들은 미술의 본질, 그리고 미술의 근간이 되는 캔버스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2차원인 캔버스 공간에 최대한 사실적으로 3차원의 대상을 표현하던 미술가들은 이 무렵 단색화와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부상에 힘입어 캔버스의 평면성을 회화의 뿌리로 삼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 캔버스는 본질적으로 평평한 대상임을 인정하고, 그 평면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작업에 몰두했던 동시대 작가들과는 달리 폰타나는 캔버스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였다. 그는 캔버스를 칼로 가르고, 구멍을 뚫어 작업했다.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은 각각 ‘탈리’와 ‘부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파격적인 작품 세계는 신성시되던 캔버스에 대한 모독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당대 대중은 물론 미술계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캔버스의 평면성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그의 작품은 너무도 난해했다. 그러나 그는 “캔버스를 파괴하기 위해 구멍을 낸 것이 아닌, 미지의 우주를 발견하기 위해 구멍을 냈다"라고 말한다.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캔버스 평면이 아닌 구멍, 또는 칼이 지나간 자리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는 그 뒤를 상상한다. 저 구멍, 저 상처 뒤에는 과연 어떤 세계가 있을까? 캔버스를 넘은 예술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의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의 우주를 탐험하게 만들고, 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사실주의적 또는 표현주의적 작품들이 관람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면, 그의 작품은 무(無)에 가깝다. 주로 단색으로 칠해진 그의 캔버스는 언뜻 보면 텅 빈 공간과도 같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행위가 덧입혀지면 단색의 캔버스는 더 이상 공백이 아닌 새로운 우주를 향한 문이 된다.
그는 운동, 색채, 시간을 넘어 공간을 포괄하는 예술만이 당대 제2차 세계 대전과 급격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격변하던 시대의 격동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동시에 그는 전쟁을 겪으며 인간과 그들이 만든 규칙에도 큰 회의를 느꼈기에 이토록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납작한, 지루한 그리고 텅 빈 캔버스를 마치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대상으로 탈바꿈하였다. 마치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이 인간의 시야를 확장해 주었듯, 폰타나의 작품은 미술의 영역을 빈 캔버스에서 캔버스 밖으로 확장하였다.
매끈한 캔버스에 과감한 상처를 입히는 일. 그것이 공백처럼 보이던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 공간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그가 세상에 드러낸 텅 빈 캔버스 화면과 이를 가로지르던 칼자국, 그리고 구멍들은 캔버스의 중심의 기존 미술에 종말을 선포하고,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전통적 예술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는 완결성에 집착했다면, 그의 예술은 빈 공간 그리고 상처로부터 창조되는 공간 너머의 미지의 영역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폰타나는 말한다. 자신의 작품은 “무한한, 상상할 수도 없는, 재현과 표현의 종말, 그리고 무(無)의 시작”을 알렸다고.
글 | 이서연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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