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다. 살아생전 그는 5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중 2000여 점이 여성 인물화일 정도로 여성을 많이 그렸다. 르누아르는 평생토록 여성을 그렸다. 그 스스로 "신이 여성의 몸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내가 화가가 되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르누아르에게 여성은 곧 아름다움이었다.
그의 작품 속 여성은 마르고 예쁜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벗어난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르누아르는 처제인 가브리엘과 소녀 등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따뜻하고 화사한 색감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림은 영혼을 씻어주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친 영혼을 씻어주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시기별로 알아보았다.
1862년 르누아르는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서 모네, 시슬레 등을 알게 되었다. 그는 피사로, 세잔, 기요맹과 사귀며 훗날 인상파 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다.
르누아르의 초기 작품인 <사냥꾼 디아나>는 고대 신화에서 그림의 주제 요소를 가져왔다. 그가 고전적 주제를 택한 것은 살롱전을 위해서였다. 당시 살롱전은 명성과 함께 부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에 많은 화가의 목표이기도 했다.
르누아르는 프랑스 리모주의 가난한 양복점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늘 그림 그릴 돈이 부족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부모님은 르누아르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르누아르가 어린 나이에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색채를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르누아르가 신화에서 주제를 가져온 것은 당시 예술계 주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노력에도 이 작품은 살롱전에서 부정당하고 만다. 주제는 고전적이지만 여인의 누드가 마치 쿠르베의 그림처럼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됐기 때문이다. 이상화된 누드에 익숙한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사실적인 누드가 거칠고 상스럽게만 느껴졌다.
이 작품 이후에도 르누아르는 살롱전을 열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자 당시 살롱전에 나가지 못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들만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인상파 전에 참여했던 화가들은 르누아르를 포함해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모네, 세잔, 그가, 피가로, 시슬레, 기요맹 등이었다.
인생 자체가 우울한데
그림이라도 밝아야지
1876년 발표한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무도회>를 보면 마치 사람들의 대화와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밝고 즐거운 분위기의 이 그림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으로 채워져 있다. 자칫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데, 전경의 대화하는 사람들부터 후경의 춤추는 사람들까지 균형감 있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초기 명작으로 평가된다. 당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야외 정원 무도회를 묘사한 작품이다. 몽마르뜨 언덕 풍차 근처의 작은 정원에서 열린 이 무도회는 고흐, 피카소 등 많은 화가가 즐겨 그린 장소이기도 하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무도회>를 그리기 전까지 르누아르는 보통 단독 혹은 두 명 정도의 인물만을 그려왔다. 화상이었던 볼라르는 르누아르가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장면을 그리기에 앞서 춤추는 사람들을 빠르게 그린 스케치, 춤추는 한 쌍의 남녀 등 여러 점의 습작을 해왔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끌자 르누아르는 조금 다른 버전으로 몇 장의 그림을 더 그렸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무도회는 1990년 5월 885억여 원에 팔리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1890년대부터 르누아르는 꽃, 어린이, 여성을 많이 그렸다. 르누아르는 모자 등의 소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소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두 소녀, 머리 장식하기>에서 모자의 레이스와 리본 모두 르누아르가 만든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이탈리아 여행은 르누아르의 그림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행을 통해 그는 거장들의 고전적인 작품을 보게 되었고 고전 미술에 깊이 매료된다. 그 결과 인상주의 화풍에 고전스러운 느낌을 더한 르누아르식의 화풍이 만들어졌다.
그의 작품이 고전적인 분위기를 내는 요소로 로코코의 향락과 유희로 가득한 분위기, 이상적인 누드화, 확고한 명암법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다른 인상주의 작품에 비해,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색채의 마술사'라고도 불렸던 르누아르는 프랑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피카소도 르누아르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7점이나 갖고 있을 정도로 르누아르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통은 지나간다
아름다움은 남는다
<장미꽃을 꽂은 금발여인>은 대체로 형상을 희미하게 처리하고 붉은색을 지배적인 색조로 사용했다. 르누아르가 말년에 사용한 전형적인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여인은 몸이 굳어가던 르누아르에게 창작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던 그의 뮤즈이기도 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손에 미술도구를 헝겊으로 고정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류마티스( 손과 손목, 발과 발목 등을 비롯한 여러 관절에서 염증이 나타나는 만성 염증성 질환)였다. 류마티스는 점점 심해져 르누아르는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 르누아르는 화가 마티스의 소개로 그의 마지막 모델 ‘데데’를 만난다. 마티스는 데데를 보자마자 르누아르의 모델로 최적이라며 그에게 소개했다. 데데는 1915년부터 르누아르가 사망하던 해인 1919년까지 그의 주요 모델로 <장미꽃을 꽂은 금발여인>, <목욕하는 여인들> 등 르누아르의 후기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목욕하는 여인들>은 그의 예술 세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풍경 속에 있는 누드'를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인물은 풀, 나무들은 풍경 속에서 서로 포개어져 있는 듯하다. 상단의 여인은 르누아르가 거의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렸다. 작품 하단부의 여인은 데데다.
데데는 르누아르의 둘째 아들인 장 르누아르의 뮤즈이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죽은 후, 데데는 장과 결혼했다. 이후, 데데는 ‘카트린느 에슬링’이라는 이름으로 장의 영화에 출연한다. 장은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유에 대해 데데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쓰기 위함이라고 말했었던 만큼 그녀는 부자 모두의 뮤즈였다. 그 때문인지 르누아르와 그의 아들 장 그리고 데데의 관계를 그린 영화 <르누아르>가 2012년에 개봉되기도 했다.
데데는 르누아르의 생애 마지막 정거장에서 그의 열정을 다시 한번 불타오르게 만든 뮤즈였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처럼 생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그림엔 우울한 색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반짝이고 포근한 색채들로 늘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는 행복을 잃지 않았다. 죽기 3시간 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르누아르는 "이제야 그림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라는 말을 남긴 채 1919년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글 | 박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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