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서양 고전 음악계의 거목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 – 1827)이 탄생한 지 25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선배 음악가들의 작법과 스타일을 가다듬고 보다 완숙하게 녹여내었으며,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실험함으로써 수많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준 베토벤. 베토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작년부터 이미 클래식 음반 업계와 공연 업계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한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공연장에서 베토벤의 작품들을 직접 감상하기 어렵게 된 코로나 시국, 아쉬운 마음을 달래줄 10개의 명곡들과 명녹음들을 선정해보았다. 9월에 들어서면서 물씬 다가온 가을의 정취에 베토벤의 음악을 곁들여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리스트의 순서는 작품 번호 순서대로이며, 음반의 연주자와 지휘자들은 중복되지 않게 골랐다.
*악기 및 연주자 약어 안내 – 지휘자(Cond.-Conductor), 피아노(Pf.-Pianoforte), 바이올린(Vn.-Violin), 첼로(Vc.-Violoncello)
#1 Op. 24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바장조 (Violin Sonata No. 5 ‘Spring’ in F major)
Itzhak Perlman 이작 펄만(Vn.), Vladimir Ashkenazy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Pf.)
Decca, 1974
근엄하면서 엄격한 이미지의 베토벤도 이런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멜로디를 가진 곡들을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은 베토벤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다양한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멜로디의 1악장 등 총 4악장으로 구성된 곡이다.
선천적인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거장이 된 이작 펄만과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협연이다. 경쟁하는 듯하면서도 서로를 품어주는 듯한 바이올린 소나타 장르의 특성이 묻어나는 명연이다. 풍성하면서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와 명징한 피아노 음색이 매력적인 녹음.
#2 Op. 56 삼중협주곡 다장조 (Triple Concerto in C Major)
Herbert von Karajan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Cond.), David Oistrakh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Vn.), Mstislav Rostropovich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Vc.), Sviatoslav Richter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Pf.)
EMI, 1969
피아노 삼중주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독특한 구성을 가진 곡이다. 세 악기를 관현악과 조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 이후 베토벤은 이러한 구성을 다시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 곡만큼은 오늘날에도 즐겨 연주되는 레퍼토리로 남게 되었다. 연주자들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곡이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소련의 전설적인 세 연주자가 함께한 이 녹음을 선정해보았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은 협연"으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연주이기도 하다. 클래식 음반 역사상 역대 최고의 라인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구성을 자랑한다. 명인들의 녹음답게 바이올린과 첼로, 그리고 피아노 어디 하나 빠짐 없는 탄탄한 연주를 들려주고, 카라얀의 반주 또한 적절하게 세 독주 악기들을 뒷받침한다.
#3 Op. 61,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Violin Concerto in D Major)
Frans Brüggen 프란스 브뤼헨 (Cond.), Thomas Zehetmair 토마스 체헤트마이어 (Vn.) 18 세기 오케스트라 Orchetra of the 18th Century
Philips, 1998
기존에도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형태는 존재했다. 모차르트와 하이든, 바흐 등도 훌륭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남겼다. 하지만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이전에 발표되었던 곡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더 웅장하고 치밀하다. 화사하면서도 재치있는 곡의 전개가 듣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리코더와 플롯 연주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고음악 전문 오케스트라인 18세기 오케스트라를 직접 조직한 지휘자 프란스 브뤼헨과 매섭지만 정교한 속주를 자랑하는 바이올린 명인 토마스 체헤트마이어가 함께한 녹음을 선정해보았다. 시대연주 특유의 질감과 음색이 묻어나면서도 체헤트마이어의 날카로운 느낌 또한 잘 살아나는 명연. 1악장의 카덴차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4 Op. 69, 첼로 소나타 제 3번 가장조 (Cello Sonata No.3 in A Major)
Pierre Fournier 피에르 푸르니에 (Vc.), Friedrich Gulda 프리드리히 굴다(Pf.)
DG, 1959
첼로가 가진 매력과 장점을 극대화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작품들은 첼로가 독주악기로서 빛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3악장으로 구성된 첼로 소나타 3번은 그 중에서도 멜로디가 아름답게 빛나며 첼로 특유의 중저음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기품있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어 귀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피에르 푸르니에와 재즈와 클래식 등 장르를 넘나들며 파격적인 연주로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얻었던 프리드리히 굴다의 협연이다. 푸근하면서도 따뜻한 첼로와 명랑하게 뒷받침해주는 피아노의 조화가 특징이다.
#5 Op. 73,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황제' 내림마장조 (Piano Concerto No. 5 ‘Emperor’ in Eb Major)
Nikolaus Harnoncourt 니콜라스 아르농쿠르 (Cond.), Pierre-Laurent Aimard 피에르 -로랑 에마르 (Pf.), Chamber Orchestra of Europe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Teldec, 2003
베토벤의 위대함 중 하나는 기존 장르를 확장시키고 동시에 치밀한 구성으로 완성도를 높인 것에 있다. 그가 작곡한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어느 한 곡 빼놓을 수 없는 명곡들이지만, 가장 마지막에 작곡한 5번 ‘황제’는 특히 사랑받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도입부를 생략하고 화려한 피아노 카덴차로 시작하는 1악장부터 섬세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2악장과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마무리를 보여주는 3악장까지. 가히 그의 중기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명곡이다.
불레즈나 리게티부터 드뷔시, 바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인 피에르-로랑 에마르와 시대연주의 대가인 니콜라스 아르농쿠르가 함께한 음반을 선정해보았다. 투명한 피아노의 음색과 탄탄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조화가 담백한 매력을 지닌다.
#6 Op. 97 피아노 3중주 제 7번 ‘대공’, 내림나장조 (Piano Trio No.7 ‘Archduke Trio’ in B-flat Major)
Chung Trio 정트리오
EMI, 1994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곡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작곡되었으며, 동시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곡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공 트리오. 귀족적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1악장과 경쾌한 2악장, 서정적인 3악장을 거쳐 화려한 4악장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세계적인 클래식 아티스트들인 정명훈과 정경화, 정명화로 구성된 가족 그룹인 정트리오의 이 음반을 선정하였다. 다른 녹음들과 비교했을 때 화려함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단아하면서도 조화로운 연주가 인상적이다.
#7 Op. 106 피아노 소나타 제 29번 ‘함머클라비어’, 내림나장조
(Piano Sonata No.29 ‘Hammerklavier’ in B-flat Major)
Sir András Schiff 안드라스 쉬프 (Pf.)
ECM, 2008
피아노포르테, 혹은 함머클라비어라고 불리우는 최신식의 피아노가 베토벤의 말년기에 등장하였다. 기존의 피아노보다 음량이 훨씬 크고, 페달 등을 활용해서 폭넓은 표현이 가능해진 함머클라비어를 접한 베토벤은 최신 악기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곡들을 썼다. 이 후기 소나타들은 이후 낭만주의 피아노곡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함머클라비어라는 부제가 명시된 29번 소나타는, 거의 교향곡에 비견될만한 방대한 스케일과 꽉 찬 푸가와 대위법, 그리고 화성 전개를 자랑하는 대곡이자 난곡이다.
투명한 터치와 원곡에 충실하면서도 기품있는 음색을 장점으로 하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가 재즈 전문 레이블에서 클래식 음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던 ECM과 만나 내놓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녹음을 선정했다. ECM 특유의 사운드 품질을 담은 레코딩 기술이 빛을 발하는 음반이며, 쉬프 또한 곡을 완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cf. 유튜브에서 그가 진행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렉쳐도 찾아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시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8 Op. 123 장엄 미사 (Mass in D Major “Missa Solemnis”)
John Eliot Gardiner 존 엘리엇 가디너 (Cond.),
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 낭만과 혁명 오케스트라
Archiv, 1990
바흐의 B단조 미사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등과 더불어 최고의 종교음악 중 한곡으로 꼽히는 곡이다. 종교 음악인 동시에 교향곡에 비견될 만큼 풍성하고 꽉 찬 기악의 조화가 매력이다. 또한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하는데, 특히 성악 파트의 난이도가 굉장히 높아 오늘날에도 연주와 녹음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곡이다. 종교를 초월하는 선율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며, 중세와 그 이전의 대위법 형식을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내고, 곡 전반에서 느껴지는 실험적이고 변화무쌍한 전개는 이 작품을 가히 베토벤 후기의 걸작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게 한다.
곡이 만들어질 당시, 악기 편성과 템포, 튜닝 등을 중시하는 '시대연주'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끈 지휘자 중 한 명인 존 엘리엇 가디너와 그가 조직한 낭만과 혁명 오케스트라의 녹음을 선정했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장엄 미사를 베토벤이 지시한 아주 빠른 원(元) 템포에 가깝게 연주하였고, 오케스트라의 조직력과 지휘자의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듣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는 훌륭한 음반이다.
#9 Op. 125 교향곡 9번 ‘합창’, 라단조 (Symphony No. 9 “Choral”)
Claudio Abbado 클라우디오 아바도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DG, 2000
인류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9번 교향곡을 빼놓고서는 베토벤의 음악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보다 더 위대한 음악적 가치를 지니는 위치로 올려놓은 그의 9개의 교향곡은 한 곡도 빠짐없이 걸작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고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하는 곡은 단연 ‘합창’ 교향곡이 아닐까 한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4악장의 환희의 송가에서 교향곡에 합창 부분을 넣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인 곡으로, 후대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이정표이자 넘어야 할 큰 산이 된 곡이기도 하다.
위암을 극복하면서 인간승리를 보여주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며 젊은 연주자들 양성에도 힘썼던 이탈리아의 명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이 발표한 음반을 선정했다. 현대악기로 시대연주 기법을 절충해 사용한 판본으로 로마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연주이다. 아바도 특유의 속도감과, 투명하면서 단단한 현악기와 관악기의 질감이 인상적이고, 균형이 잘 잡힌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명반이다.
#10 현악 사중주 op.130 13번 & op.133 대푸가
Emerson String Quartet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
DG, 1997
현악 사중주는 베토벤이 자신의 말년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장르이다. 이 중 제 13번은 총 6악장으로 구성되어 방대한 곡의 길이를 자랑한다. 본디 마지막 6악장이었던 푸가 부분이 길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떨어져서 대푸가라는 이름으로 따로 발표되고 대신 새로 만든 6악장이 덧붙여지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또한 5악장은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에 다른 명곡들과 함께 실리기도 하였다. 대푸가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곡이 구성되었다, 밀도가 높으면서 난해한 곡으로, 후대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현악사중주 13번과 대푸가의 녹음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대푸가와 13번을 따로 녹음하는가 하면, 원래 베토벤의 의도대로 대푸가를 현악사중주 13번의 6악장에 배치시키는 형태도 존재한다. 선정한 에머슨 현악 사중주단의 해석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대신 13번에 있던 새로 쓰인 6악장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베토벤이 의도했던 빠른 템포이면서 빈틈 없고 현란한 연주를 선보인다.
훌륭한 음악가는 인류 역사상 다수 등장했으나, 한결같이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표현해낸 음악가는 베토벤이 유일무이하다. 2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거장 베토벤. 이번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에도 그의 웅장한 울림이 전해지길 바란다.
글 | 최진호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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