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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Dec 31. 2021

올해의 '커튼콜'이 되어 |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79.2×138.2cm, 1751, 국립중앙박물관 소



희뿌연 안개 사이로 장엄한 바위산이 꼿꼿이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널찍한 면들로 뒤덮인 뒤의 바위산을 배경으로 여러 크기의 산봉우리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이 작품은 겸재 정선(謙齎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다. ‘이건희 컬렉션’의 한 작품으로, 몇 달 전 삼성재단의 故 이건희 회장이 기증해 주목을 받은 그림이기도 하다.


 


 




어느 여름, 인왕산 자락에서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사직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 자연스레 서촌 골목길에 진입하게 된다. 서촌의 아기자기한 전통 찻집과 카페들을 지나치고 난 후에는 사직단이 보인다. 사직단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왕산이다.


 

인왕산 자락길 | 사진=한국관광공사

 


현재는 많은 이들의 쉼터로 자리하는 인왕산이지만, 옛 조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랜 시간 사족(士族/조선 후기 향촌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을 일컫는다) 가문의 전유지가 되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언젠가 인왕산 북쪽 기슭 백운동엔 (···) 청음 김상헌의 장동김문 일파가, 남쪽 기슭 필운대엔 영의정 쌍취헌 권철(1503-1578), 도원수 만취당 권율(1537-1599) 부자의 안동권씨 일파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 이어 권율의 사위로 뒷날 영의정에 오른 백사 이항복(1556-1618)도 필운대를 물려받아 제 것인 양 집터로 삼아 대를 물리고 보니 인왕산 북쪽과 남쪽은 어느덧 사족 가문의 전유지가 되고 말았다.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p.150)


 


이러한 사족 가문의 후원과 관심에 힘입어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화가가 있으니, 바로 겸재 정선이다.


사족의 후원을 받았던 정선은, 사실 몰락 양반가 출신이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소설에 으레 등장하듯 조선 후기는 사회·문화적 격변의 시기인 만큼 몰락한 양반들이 넘쳐났다. 몰락 양반의 유형은 다양했는데, 그중 정선은 전업화가의 길을 선택해 생활을 유지했다. 사족 가문 사이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그는 점차 노경에 접어든다.

<인왕제색도>는 전업화가 정선이 긴 세월을 달린 끝 무렵, 일흔여섯의 어느 여름날 그린 그림이다.


 





안개 걷힌 인왕산: 벗과의 끝에서


 


겸재 정선은 사족 가문만큼이나 여러 문인·시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는데, 그중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을 빼놓을 수 없다.

북악산 아래 같은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만큼 둘의 관계는 특별했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말없이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뒷산 너머 해가 떠오를 때까지 밤을 새가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경치 좋은 산자락에 앉아 이병연은 시로, 정선은 그림으로 각자의 이야기들을 터놓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어느덧 두 사람이 함께한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병연이 노환으로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서 정선은 벗과의 지난 세월을 가만히 떠올려보기 시작한다. 인왕산 자락에 앉아 고즈넉한 풍경을 보며.



인왕산 전경 | 사진=한국관광공사



마침 서울엔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여름 빗방울을 머금은 산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정선의 가슴 깊숙한 곳엔 벗과의 추억이 방울방울 차오른다. 같은 노론 자재로서 나눴던 심정들, 기쁘고 설운 이야기들. 지난 세월 동안 느꼈던 크고 작은 감정들이 눈앞의 바위산이 되어 피어오르는 듯하다.

그 순간 정선은 백 마디 말없이 붓을 든다. 빗물은 먹물이 되고 산자락은 붓자국이 되어 <인왕제색도>로 태어난다. 작품은 당시 정선이 보았던 인왕산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그 풍경을 함께했던 벗과의 추억, 희로애락의 세세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기록물이기도 하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는 한 줄의 글귀가 쓰여 있다.

인왕제색 겸재 신미윤월하완仁王霽色 謙齋 辛未潤月下阮.

신미년 윤오월 하순 ‘안개 걷힌 인왕산’이라는 뜻.


정선은 이처럼 빗속 인왕산의 안개가 걷힌 풍경을 표현했지만,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벗과의 이별을 앞둔 순간에 단순히 슬픔에 잠겨있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지녔던 소중한 감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시름을 걷어냈던 것은 아닐까.


 


 




2022년의 새해를 마주하는 당신에게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어떤 순간이든.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


역사의 긴 세월을 지나 인왕산은 모습을 바꾸어간다. 하나의 인왕산이지만 ‘누가’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정선은 비 오는 인왕산 자락에서 벗과 함께했던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돌이켜보았고, 누군가는 그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무언가를 떠올릴 것이다.


인왕산을 등산하는 사람들 | 사진=연합뉴스


 


세월이 흘러 인왕산의 모습과 산세가 달라지듯, 해가 거듭됨에 따라 ‘나’ 또한 달라진다. 새로운 날들을 마주할수록 ‘나’에 대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모습들이지만, 중요한 건 결국 개별의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가장 진실한 모습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끔은 현재의 ‘나’라는 사람을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 해가 마무리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일 오늘의 상황에서.



경복궁 너머 인왕산 풍경을 바라보는 지금. 벗과의 끝을 붓질로 마무리했던 정선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2022년의 새해를 마주하는 당신,

2021년의 무대로 다시 한 걸음 나와 보라.

올해의 끝에서 돌아보는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당신의 ‘지금’ 인왕산은 어떤 모습인가?


 

이 글이 커튼콜이 되어,

당신의 가장 ‘당신’다운 모습을 간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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