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1916-1956)
당신에게 ‘소’라는 동물은 어떤 이미지인가. 권태로운 모습. 우직한 모습. 혹은 저 먼 스페인 땅의 투우소들처럼 격렬한 모습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소의 다양한 이미지에 그와 연결되는 각자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삶의 내력을 지닌 수많은 소들 가운데 한 마리의 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에 태어나 되새김질을 배우고 사랑을 경험한 후, 위기에 닥치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내고자 했던 소.
그 소가 바로 이중섭이자 그의 삶 자체였다.
화가 이중섭의 삶은 오산학교에서 시작된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스승 임용련을 만나 본격적으로 미술에 뜻을 품게 된다. 스승으로부터 훗날 작품 세계를 위한 되새김질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이중섭은, 이후 도쿄로 건너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중섭은 그곳에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라는 일본 여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꽃피운다. 일제 치하 아래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랑은 언제나 아슬아슬했지만 결코 불씨가 꺼지는 법은 없었다. 둘은 공원이나 다방을 거닐기도 하고, 잠시 떨어져 있을 때면 엽서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전했다.
유학을 끝마친 뒤에도 이중섭은 여러 미술가와 교류가 가능한 도쿄에 남아 전시에 활발히 참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리라.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대대적인 징병이 이루어졌고, 한국인은 더 이상 도쿄에 머무를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중섭은 결국 마사코를 일본에 남겨둔 채 무거운 발을 내디디며 먼저 고국으로 돌아온다. 고국 땅을 밟은 그는 식민 지배가 한껏 휩쓸고 간 참혹한 장면들을 마주한다. 한반도를 짓누른 고통의 흔적들과 마사코에 대한 그리움은, 소 한 마리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일들이었다.
그러던 1945년 4월, 마사코가 이중섭을 찾아온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갑작스런 재회, 그리고 수년 만의 눈맞춤. 이윽고 두 남녀는 결혼식을 올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쪽같은 아이들까지 품에 안는다.
이제 행복해지나 싶었지만 현실은 소 가족에게 녹록지 않았다. 조국 땅에는 광복을 맞이하기가 무섭게 전쟁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한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원산에 있던 이중섭 가족은 기나 긴 피난길에 오른다. 그들은 부산, 서귀포 등을 오가며 고된 피난 생활을 이어가지만 ‘함께’ 이기에 행복했다.
바람이 부는 굴곡진 길 위에 무거운 소달구지를 끌고 있는 한 남자. 그는 뒤를 돌아 가족의 미소를 확인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달구지를 끄는 소도 꽃을 든 아이의 노랫소리에 맞춰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쩌면 이중섭은 남자가 아니라 금빛 소일지도 모르겠다. 만만찮은 무게를 기꺼이 받들면서도 아이의 콧노래가 발산하는 희망을 품고 나아갔던 이중섭의 모습 말이다.
당찬 발걸음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곳. 달구지가 향하는 곳. 그곳이 어딘지는 소만이 안다. 아무리 목적지가 멀고 피난길이 힘들어도 이중섭은 기다리고 버텼을 것이다. 지독한 사회의 혼란이 끝나고, 가족과 함께 다시 마주할 푸른 하늘을 위해.
하늘도 무심하시지. 맑은 하늘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잿빛으로 변하고 만다. 피난길은 더욱 힘들어지고 마사코의 건강은 점점 악화된다. 마사코는 건강 문제와 아이들의 양육 문제로 결국 고국 일본 땅에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린다. 이중섭도 함께 가고 싶었겠지만 당시 한국인은 일본에 갈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하던 소는 그저 멀어지는 아내와 아이들의 꽁무니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열심히 끌었던 달구지는 이제 텅 비었다. 소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가족의 환한 미소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뒤돌면 보이던 그 미소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 소는 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한다.
그림 속 소년은 창가에 올린 손 위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소년의 표정은 시름에 젖어있는 것도, 행복해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되레 오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창밖에 살짝 내민 손등 위로 하얀 눈송이가 조금씩 떨어진다. 결국 다 녹으면 눈인지 눈물인지 모를 만큼만 조금씩. 저 뒤편에 광주리를 이고 한 여인이 걸어오지만 눈을 감은 소년은 그녀를 보지 못한다.
위 그림은 이중섭이 눈을 감기 직전에 그린 절필작이다. 그의 생애 말기의 감정들이 담겨 있어 보는 이 의 심금을 울린다. 하얗게 내리는 눈들이 마치 이중섭이 흘린 눈물 자국 같다. 엉성하지만 뚜렷한 눈물 자국들은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사랑하는 이를 만났으나 아파하며 헤어졌던 인생, 그럼에도 기다렸던 눈물의 인생을.
이중섭이라는 소 한 마리의 삶은 어쩌면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이 아닐까. 조국과 가족을 잃은 서러움, 이념에 희생된 수많은 아픔들. 그리고 울고 웃었던 지난날의 응어리들. 이렇게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동일한 과거를 공유하지만, 이를 대하는 각자의 태도나 삶의 방식은 다르다. 이중섭의 ‘소’가 모두 다른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상단 좌측) 이중섭, <흰 소>, 종이에 유채, 30×41.7cm, 1954년경,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상단 우측) 이중섭, <싸우는 소>,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7.5×39.5cm, 1955, 개인소장 (하단 좌측) 이중섭, <소묘>, 종이에 연필, 1942, 제6회 자유전 출품작 (하단 우측) 이중섭, <소>, 종이에 유채, 29×40.3cm, 1956, 개인소장
위는 이중섭이 삶 전반에 걸쳐 그렸던 수많은 소들 중 일부 작품들이다. 이외에도 그의 그림에는 거의 언제나 소가 함께했다. 소는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에도, 가족을 그린 그림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그 중 같은 표정과 몸짓을 한 소는 없다. 달리는 소, 잠시 멈춘 소, 싸우는 소, 경쾌한 소. 다양한 몸짓들이 모여 결국 ‘소’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어느 몸짓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양한 몸짓들의 혼합이기에 더욱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며, 소중하다.
각자의 중첩된 표정이 한 마리의 소를 형성하듯, 우리들 개개인의 몸짓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바로, 한 ‘민족’으로. 모두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모래알처럼 쌓여 ‘소’의 저력이자 ‘민족’의 저력이 된다. 그리고 이 저력으로, 비로소 우리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이중섭은 ‘기다리는 소’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조국의 해방과 평화를 기다렸다. 그것이 그의 표정이자 몸짓이었다.
가슴 아린 순간들과 억지웃음조차 짓지 못할 순간들이 차고 넘쳤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다렸다. 그에게는 기꺼이 사랑하는 대상을 기다리는 일이 인생을 통틀어 가치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원했고 또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이제 현재의 역사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소인가?”
혹여 아직 모르겠다면, “어떤 소로 살아갈 것인가?”
당신은 지금까지 수많은 다짐과 각오 속에 살았을 것이다. 매 삶의 출발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 약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번번이 웃고 울었을 날들.
지난날의 아쉬움은 가슴 한편에 남겨 두고, 새로이 밝은 시간들을 바라보라. 지킬 표정은 지키고, 당신이고 싶은 표정은 새롭게 지으며.
시간은 흐르고 해는 거듭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서 있다. 새로운 시작점에서, 이제껏 걸어온 두 발을 기지개 켜듯 쭉 편 채로 말이다. 쉬이 흘러갈 날들이면 좋으련만. 이번 시작은 절대 만만치 않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을 맞이하여 어떤 이는 절망하기도, 또 어떤 이는 오히려 허탈하게 웃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각자는 저마다 무수히 움직이며 흐를 것이다. 각자의 좁은 물길은 곧 이리저리 섞이고 부딪히며 새로운 거대한 물길을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물길이 모두를 가히 압도할 정도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소’의 저력이 빛을 발한다. 우리의 부모와, 이중섭과,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명해왔듯.
2021년 신축년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서서히 고막을 울려온다. 그 울음소리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당신의 시작도 조금씩 빛을 발할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정한 몸짓과 표정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나아가다보면 훗날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작이었음을.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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