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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an 09. 2021

단순함이 만드는 시작의 빛 | 화가 '앙리 마티스'




  어김없이 새로운 해는 들이닥친다. 단지 숫자 하나 더해지는 것뿐인데 마치 큰 변화라도 되는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른으로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설렘의 순간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의미 없이 부과되는 세월의 야속함이지 않은가.


  나이란 것이 줄어드는 법 없이 갈수록 쌓이기만 하는 것처럼 그에 걸맞은 사회적 과제도 하나 둘 쌓여만 간다. 입시는 어떻게 됐는지, 취업은 했는지, 결혼은 언제 하는지 등 이 익숙한 대사들이 얼마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지! 말만 어른이지 아직도 수많은 갈림길 앞에 헤매는 어린이들이 수두룩한데, 사회는 이것저것 시작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Time&Life




   이렇게 사회에 등 떠밀려 ‘어른’이라 이름 붙여진 우리 ‘어른이’들에게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앙리 마티스가 전하는 따뜻한 위로를 보여주고 싶다.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선행했던 단순함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사회가 원하는 시작이 아닌 내가 진정 원하는 시작을 찾아보자.











가장 단순한 감정의 언어: 그림




  대개 어느 분야에서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거창한 시작을 했을 거라 예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라 평범한 나날의 한순간이 시작점이 되고는 했다. 지금은 ‘색의 마술사’, ‘야수파의 창시자’라 칭송받는 마티스의 시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장 왼쪽에 보이는 집이 마티스의 생가이다.)




  작은 곡물 종자 가게 집안에서 자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이 소년은 가게를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법률 사무소의 매일 같은 격렬한 논쟁이 섬세한 그의 성정에 맞을 리는 만무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충수염으로 입원하게 된다.



  이때 방문한 이웃집 아저씨의 선물이 화가라는 꿈의 시작이 될 줄은 마티스 자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작은 취미용 그림 도구는 마티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감정의 색을 캔버스 위에 듬뿍 떠 올리는 그 단순하고도 간결한 소통 방식은 그의 마음에 꼭 들어맞았다. 결국 마티스는 아버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20대라는 늦은 나이에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시작에 복잡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실재를 그대로 베껴내는 기존 미술이 지겨웠던 마티스는 자신만의 예술을 개척하려 애썼다. 위 작품에서 원근법이나 명암 같은 복잡한 고전주의 기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오직 선과 색의 사용만으로 마치 정말 원을 그리며 춤추는 듯한 역동성을 만들어 냈다. 기존 예술의 복잡함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서야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








또 다른 시작: 붓질에서 가위질로의 걸음




  그의 작품은 갈수록 단순함을 더해갔다. 말년에 붓을 들기 힘들 만큼 관절염이 심했던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붓 대신 가위를 집어 들었다. 화가가 붓이 아닌 가위를 든 모습은 어딘지 생경한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가위질을 통해 한 층 더 나아간 단순함은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볼티모어 미술관 / ©조르주 퐁피두




  위 두 그림의 제목은 모두 파란 누드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그의 작품세계가 갈수록 얼마나 단순해졌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색칠한 캔버스를 즉흥적으로 오려내어 선의 단순함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그 선들을 조화롭게 배열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했다. 선과 색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표현하는 방식. 즉 색채 자체를 오려내어 선과 색의 통일을 이루어 낸 것이다.


  종이 위에서 헤매는 가위 날의 방향은 가위를 잡고 있는 주체의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 손끝에서탄생한 선은 결국 작가의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산물이다. 마티스는 바로 이런 예술을 원했다. 현실을 복제하는 것에 그치는 무감각한 그림이 아닌 감정이 살아 넘실대고 요동치는 그림 말이다.





빛을 오려내다




  한 번 시작한 가위질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선을 오려내는 것에서 나아가 빛을 오려내기에 이르렀다. 간병인이었던 수녀의 부탁으로 프랑스 남부 로자리오 성당(chaple of rosary)의 전체 장식을 맡은 마티스는 스스로 대작이라고 여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완성했다. 이는 그가 죽기 2년 전의 일이었다.

©로자리오 대성당



  마티스는 이 작품을 작업하며 색채를 더욱 단순화했다. 특히 흰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강렬한 붉은색을 줄곧 사용했던 기존 작품들과는 달랐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로자리오 대성당



  마티스는 비록 붉은색을 드러내 사용하진 않았지만, 작품 안에 붉은색을 감춰두었다. 실제 작품을 보면 태양이 비칠 때 스테인드글라스의 색들이 섞여 성당 내부에 붉은빛이 감돈다. 즉, 작품 자체의 색은 더욱 단순화하고, 자연의 빛을 통해 작품에 내재된 붉은색을 끌어낸 것이다. 그의 마지막 가위질로 완성된 빛은 원하던 대로 예배당을 찾는 이들에게 평안을 안겨다 주었다.



“내가 꿈꾸는 것은 균형과 평온함의 예술, 즉 안락의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예술이다.”












시작: 내면의 목소리




  ‘시작’이란 말이 주는 무게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 혹은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 이 중 시작의 무게에 짓눌린 어른이들에게 마티스의 단순함의 미학이 숨통을 터주길 바란다.


  그는 그림을 통해 단순함이 주는 평온을 전하고자 했다. 이는 법학에서 그림으로, 붓질에서 가위질로, 일생을 단순함으로 회귀했던 과정에서 얻은 마음의 평온을 나누고자 함이다. 어쩌면 두려웠을 수도 있는 시작의 길에 그가 용기 있게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본질적인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이다.


  단순함은 곧 내 마음의 소리이다. 가공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마음의 결정,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지 않은 오직 나만의 목소리. 겹겹이 쌓여온 어른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내 안의 가장 단순한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렇게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자. 그렇게 단순함으로 빚어진 당신의 시작이 언젠가는 빛나길 바란다.





글 | 김민경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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