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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Apr 07. 2021

관계의 핵심을 말하다 | 영화 <엠마>



  우울보다는 찬란을, 불행보다는 행복을 떠올리게 하는 달, 어쩐지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황홀함이 차오르는 달. 진부하지만, 누구나 로맨틱함을 꿈꿔보는 4월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항상 순조로울 수는 없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인간관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과 이완, 그 미묘함을 대체 누가 훤히 꿰뚫을 수 있을까. 우리는 관계의 급류에 휩쓸리며 살아간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관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여기 있다. 바로 오만한 ‘엠마 우드하우스’다.


 





관계를 ‘연출’하겠다는 오만







“예쁘고 영리하며 부유한 엠마 우드하우스는 스물한 살이 되도록 괴롭거나 화낼 일이 거의 없었다.”

 



tellyvisions




  19세기 영국 하이베리에 사는 ‘엠마 우드하우스’는 운 좋게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 험한 일 한번 해본 적 없는 귀족 아가씨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곁에 머무르는 그녀는 사실상 ‘하트필드 저택의 안주인’이며, 스스로를 능력 있는 중매쟁이, 뛰어난 연출가로 생각한다. 적당해 보이는 두 사람을 찾아내어 은근하게 유도하고 인연을 맺어주는 일은 엠마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녀는 결혼도 마다하고 주변 사람들을 맺어주며 살 것이라 말한다. 오랜 친구인 ‘조지 나이틀리’와 가벼운 언쟁을 하는 일, 항상 조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몰락 귀족 ‘베이츠 양’을 대하는 일이 엠마의 일상에 가장 큰 곤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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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엠마 우드하우스의 친구 ‘해리엇 스미스’가 있다. 엠마는 순진하고 꾸밈없는 평민 해리엇을 친구로서 아끼지만, 그녀의 지극히 ‘평민적인’ 면모에 때때로 불편해한다. 엠마는 그녀가 결혼을 통해 귀족이 되기를 바란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상대를 물색하던 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남자는 바로 목사 ‘엘튼’이다.


  그때 해리엇을 마음에 두고 있던 소작농 ‘마틴’이 그녀에게 청혼하고, 엠마는 크게 당황한다. 그녀는 “자기 행복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말을 돌리면서도 짐짓 불편한 티를 낸다. 시종일관 엠마의 눈치를 보는 해리엇은 마틴이 마음에 들었음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나이틀리는 엠마가 해리엇을 부추긴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그녀를 비난하며 만약 해리엇과 엘튼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전부 헛수고가 될 거라 충고한다.  


  이후 엠마는 해리엇과 엘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하지만, 엘튼은 뜬금없게도 엠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당황하는 엠마에게 그는 해리엇 따위의 평민에는 관심도 없으며, 자신은 처음부터 엠마를 사모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엠마가 해리엇의 혼사를 망쳐버린 셈이 된 것이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꼬이기 시작한다.


 






모든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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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두 명의 인물이 더 등장한다. 한 명은 말로만 들었던 베이츠 양의 조카 ‘제인 페어팩스’이다. 어느 날 엠마는 하트필드 저택에 베이츠 양을 초대하고, 동년배인 제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우아한 행동에 뛰어난 피아노 실력까지, 엠마는 제인이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비범하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낀다. 나이틀리는 ‘제인은 당신이 되고 싶어 하는 교양 있는 여성의 모습’이라며 어김없이 엠마의 속을 긁는다. 그녀는 나이틀리와 제인이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 묘한 감정을 느낀다.



 

focusfeatures



  다른 한 명은 거대한 영지를 상속받을 예정인 미남 ‘프랭크 처칠’이다. 그는 ‘엠마 우드하우스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결혼 상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번 언급되던 남자로, 이제껏 여러 핑계를 대며 하트필드를 방문하지 않던 비밀의 인물이다. 처칠을 만난 후 엠마는 그의 멀끔한 외관과 능수능란한 말솜씨에 은은한 호감을 느끼지만, 나이틀리는 이를 보고 “처칠은 멍청한 외모지상주의자”라며 비난한다.


 


vox



  한편 엠마에게 거절당한 엘튼은 단 6주 만에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무도회에서 해리엇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다. 이때 나이틀리가 해리엇을 구출해 주고, 그 모습을 본 엠마는 나이틀리를 다시 보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엘튼의 천박함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이 일 이후로 엠마와 나이틀리 사이에서는 묘한 기류가 싹튼다. 서로를 의식하는 바쁜 시선과 때때로 내려앉는 수줍은 어색함을 훔쳐보며, 관객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작 둘은 모르지만 말이다.




bfi




  하지만 일은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어느 점심 나들이 시간에, 처칠과 농담을 주고받던 엠마는 베이츠 양에게 말실수를 하게 된다. 베이츠 양은 수치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엠마에게 비난의 시선을 던진다. 특히 나이틀리는 이 일에 크게 실망해 그녀의 무례를 맹렬하게 꾸짖는다. 엠마는 모든 일이 하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겨우 가까워진 나이틀리와 또다시 틀어졌다는 점에 당혹스러워하며 울음을 터뜨리지만, 결국 자신이 끔찍하게 오만했음을 인정하고 베이츠 양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마침내 실타래는 풀리고



  관계의 매듭은 아직 단단히 묶여 있다. 해리엇은 지난 무도회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엠마는 그녀가 처칠을 좋아한다고 추측하고, 둘을 결혼시키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처칠은 제인과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였으며, 제인의 가난 때문에 상속이 방해받지 않도록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다시 해리엇의 혼사를 망쳤다는 죄책감에 그녀에게 뛰어간 엠마는, 더더욱 충격적인 내용을 듣게 된다. 해리엇이 마음에 둔 사람은 사실 나이틀리였으며, 해리엇이 말하길 나이틀리도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는 소식이다.


  오해에 오해가 겹치며, 상황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엠마는 나이틀리가 해리엇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나이틀리는 엠마가 아직 처칠을 좋아하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가슴 아픈 상상에 서로 괴로워하며, 어느 여름날 두 사람은 만개한 라일락 나무 밑에서 대화를 나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 했던가, 결국 한 연인이 먼저 굴복한다.





 


- 말해줘요, 엠마. 난 전혀 가망이 없소?
사랑하는 엠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대, 말해줘요.
난 거창한 말은 못 해요. 만약 내가 당신을 덜 사랑했더라면 잘했을까?

…나와 결혼해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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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틀리가 숨겨왔던 마음을 드러낸 순간, 엠마는 너무나도 놀랍고 좋아서 코피를 터트린다. 이 장면은 물론 유머러스한 표현의 일환이겠지만, ‘체면을 중시하던 엠마 우드하우스’, ‘감정을 숨기던 엠마 우드하우스’, ‘오만한 엠마 우드하우스’의 죽음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거짓과 오만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사랑 앞에 어쩔 줄 모르는 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체했을 때 손가락 끝을 따 피를 내면 편안해지듯이, 코피를 흘린 엠마는 마법에서 깨어난 듯 솔직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그녀는 즉시 소작농 마틴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에게 거위 한 마리를 선물로 주며, 자신이 해리엇의 약혼 거절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며칠 후 해리엇은 엠마에게 마틴이 다시금 청혼했음을 알린다. 그녀는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청혼을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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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칠과 제인, 해리엇과 마틴, 엘튼과 그의 부인, 그리고 베이츠 양까지. 모든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엠마와 나이틀리는 결혼식을 올린다. 결국 모든 관계가, 모든 감정이 제 자리를 찾으며 <엠마>의 막이 내린다.


 






사랑을 만개하게 하는 힘, 그 이름은 솔직함




  영화 <엠마>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솔직함, 진실됨’이다. 우리는 주인공 세 명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엠마 우드하우스는 허영심 가득한 귀족의 전형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적당히 체면을 차리며 우아하게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남들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두고 있다 생각하는 오만함 역시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감정과 욕망은 마주 볼 줄 모르는 어린아이다.


  해리엇 스미스는 평민이므로 귀족 사회의 체면과는 거리가 멀어, 스스로의 감정은 읽을 줄 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높은 계급인데다 너무나도 ‘잘난 아가씨’인 엠마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조지 나이틀리는 사람을 판단하는 명철한 눈을 가지고 있으나 정작 엠마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고백하지 못하고, 시종일관 그녀의 곁에 머물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적한다. 세 인물의 작은 거짓으로부터 시작된 미세한 균열은, 그들 자신은 물론 주변의 관계들까지 전부 뒤흔들어버린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모든 문제들은 결국 ‘솔직함’에 의해 해결된다. 등장인물 사이에서 이 ‘솔직함’은 수면에 파동이 그려지듯, 염료가 천을 물들이듯 퍼져나간다. 가장 처음에는 나이틀리의 용기로 시작되어, 그다음은 엠마로, 엠마에게서 해리엇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모든 등장인물들이 솔직해진 순간, 관계의 실타래가 풀렸다. 그 누구의 설계도 없었음에도, 놀랍도록 빠르고 간단하게 말이다.


 






관계를 말하다



  관계란 복잡다단하여, 인간을 거짓 속에 살도록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핑계 삼아 마음을 숨기곤 한다. 또한 체면을 위해 내면의 소리에 귀를 닫으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자.


  비록 <엠마>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이 아닌들 어떤가? 그저 평범한 친구관계, 혹은 가족관계라면? 그럼에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거짓을 바탕으로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상황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사건들은 의외로 단순한 해결책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매듭을 푸는 열쇠는 언제나 ‘솔직함’이다.


  그 어떤 인간관계도 ‘진심’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음을, 솔직한 사람들만이 만개한 관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즐겁게 되뇌며, 모두가 찬란한 4월을 맞이하기 바란다.


 




글 | 강운지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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