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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Apr 10. 2021

상흔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 | 故 김창열 화백



김창열 화백, 국립현대미술관




  혹시 물방울을 자세히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찬란한 빛을 머금을 때면 한없이 영롱하다가도 이내 그 빛의 힘으로 으스러져 형태를 잃고 만다. 빗물이 되고 눈물이 되어 유(有)와 무(無) 사이를 오가는 물방울의 움직임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무한한 변주의 매력에 흠뻑 빠진 이가 바로 김창열이었다. 그는 물방울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설명한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어 유화 채를 떼어내고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렸어,
그런데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빛나는데 상당히 아름다웠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2016, 45)




  그가 당시에 보았던 물방울의 영롱함은 곧 작가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모습을 드러낸다. 김창열의 손끝에서 탄생한 물방울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물방울, 그 이전에 상흔(傷痕)



김창열, 상흔(傷痕), 1960년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김창열이 처음부터 물방울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물방울 그림 이전의 초기작에서 그의 작품 의도를 더 잘 찾아볼 수 있다. 위 작품 <상흔>은 *‘앵포르멜’ 시절의 그림이다.
 
  *앵포르멜(Informel): 제2차 세계대전의 참사를 겪고 그 파괴와 고통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껴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 운동. 색채에 중점을 두고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나타났다.
 
  앵포르멜 경향의 그림답게 강렬한 노란 색조와 거친 표현이 두드러진다. 한국 작가가 유럽의 미술 사조를 들여가며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제목 그 자체인 ‘상흔’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은 6·25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던 시기였는데, 당시 김창열은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국 땅을 밟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는 한국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을 잃는 경험을 그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민족의 죽음. 친했던 중학교 동기 60여 명의 죽음. 심지어 어여삐 아끼던 어린 여동생의 죽음까지. 한 명의 화가에게 드리운 무수한 죽음의 그림자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그리고 ‘상흔’이 되어 가슴에 남는다. 
 
  고통으로 물든 김창열의 마음으로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면 쓰라린 감정이 솟아오른다. 상하를 가로지르는 거친 자국. 눈물로 부풀어 오른 듯한 두꺼운 질감.

이같이 상처로 굳어버린 그의 마음은 이내 물방울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물방울은 가장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고 무(無)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 상흔 때문에 나온 눈물이다.
그것보다 진한 액체는 없다.

(『서울신문』, 신진호 기자, 2021.01.05.)






김창열, 회귀(Recurrence), oil and ink on canvas, 59.5×72.5cm, 1981, Sotheby’s




  노란빛 그림자를 드리운 물방울은 왜인지 노란 색조의 상흔을 머금고 있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상처 자국 같기도 하다. 마치 아픔을 간직한 작은 영혼처럼. 상흔에 바스러져버린 물방울은 자국을 남긴다. 자국을 남긴다는 건 환히 빛나던 자신의 형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물방울들은 각자의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물방울의 모습에 혹시 우리네 인생이 보이지는 않는가.

  상처와 설움이 응집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은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이 마주한 인생 만개의 순간이다. 부단한 노력과 피와 땀. 그 속에서 으스러질 뻔한 상처들. 이 모든 것들이 쌓여 결국 빛을 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의 어른들은 이렇게 많이들 말씀하셨다. “아픔이 곧 피와 살이 되는 거란다.” 이는 진부한 듯 보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상처의 경험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많은 기회를 준다. 그 기회 속에서 우리는 점점 성장해나간다.

  성장의 과정으로 단단해진 물방울일수록 강인하다. 아픔과 노력으로 단단히 응집된 물방울일수록 쉽게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거대한 몸집으로 누구보다 영롱하게 빛난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어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상흔’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



김창열, 회귀(Recurrence)SH201205, 마포에 유채, 아크릴, 45.5×53cm (10호), 2012, 케이옥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물방울이 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명문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는 지인. 사업에 크게 성공한 동창. 혹은 빛나는 명예를 거머쥔 거물급 재력가. 그들을 볼 때면 슬금슬금 배가 아파지기도 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몸서리친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인생의 만개는 그들의 상흔으로 일구어진 결과물이다. 쉽게 판단할 게 아니다. 피땀 어린 노력과 실패가 응어리진 물방울을 어찌 찬란한 외양만 보고 판단하겠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실패 없이 인생의 만개를 마주한 사람도 있지 않겠냐고. 그저 성공만 한 사람도 있지 않겠냐고.

물론 맞는 말이다. 승승장구만 하여 일궈낸 물방울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아름다운 순간’은, 다시 말해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빛으로 빛나 빛으로 으스러지고 마는 물방울처럼 말이다. 형태를 견고히 유지하는 것은 그 물방울의 힘에 달렸다.

그리고 그 힘의 역량은, 한 사람이 상처와 설움을 딛고 올라선 힘과 비례한다.
 
이제 남이 아닌 당신의 물방울에 주목하라.
상흔을 딛고 올라선 바로 그 순간. 보란 듯이 가장 찬란한 빛을 뿜어낼 것이다.
 
타계한 순간까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났던 김창열의 물방울처럼.
 
 


그에게 죽음의 의미를 물었다.
“그냥 없는 걸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물방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고 있지요.
물방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매일경제』, 전지현 기자, 2017.11.29.)





당신의 물방울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아 우리 곁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故 김창열 화백의 명복을 빕니다.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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