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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un 12. 2021

사라진 영광의 빛, 화백 이쾌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품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쾌대, 상황, 캔버스에 유채, 130×160cm, 1938, 개인소장


 


  제목은 <상황>. 제목 그대로 작품의 주제는 어떠한 ‘상황’인 듯한데, 어떤 상황인지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의 관건은 다양한 해석이 뒤따른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당신 나름대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추측해보라. 답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일단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의 모든 부분에서 그러하다. 바닥 위의 깨진 그릇, 인물들의 강렬한 표정과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서로 다른 방향. 어느 하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 신부 차림을 한 여성인데, 금방 혼례를 치른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방어적인 모습이다. 의식을 치르는 무희의 모습이 보일 정도다. 그리고 그 뒤에 손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한 반나체의 여성, 잔뜩 표정을 찌푸린 남성, 검은 남바위를 쓰고 의뭉스러운 웃음을 한 노인 등이 보인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물들의 모습과 표정에서 특정 상황이 명확히 그려지긴 어려울 것이다.


  그림에 대한 답은 작가에게 있는 법. 위 작품의 주인이자 역사 속 자취를 감추었던 거장, 이쾌대를 만나보려 한다.


 


 


꿈의 시작


 

이쾌대,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우리 땅이 일제의 손에 넘어간 직후인 1913년에 이쾌대가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고 그의 그림 실력도 일찍이 인정받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할 만큼 그는 당시에 회화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화가였다.


*조선미술전람회: 일제 강점기 때, 문화 통치의 수단으로 조선 총독부가 행한 미술 행사다. (출처: 우리말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그는 훗날 뮤즈가 될 유갑봉이란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고 그렇게 그의 삶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쾌대는 순탄했던 삶 속에서 단순히 순탄함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그리고 싶은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격정기를 그림에 담아내려 했다. 그리고 민족의 역사 이면에 자리한 아픔과 설움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목표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주목한 대상이 바로 ‘조선인의 얼굴’이었다.


 


 



꿈: 조선의 얼굴과 조선의 미술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민족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의 형 이여성(李如星, 1901-?)도 마찬가지로 화가였는데, 동시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하여 3년간 복역했고 비밀리에 독립군에게 자금을 댈 정도로 시대 상황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형처럼 이쾌대 또한 자신의 뜻을 활발히 펼친다. 바로 그림으로 말이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그는 동료 화가들을 결집하여 *조선신미술가협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조선신미술가협회: 보수적인 아카데미즘보다 진취적인 화풍을 선호했던 일제 말 대표 미술 단체이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에서 유일한 조선인 미술동인회로 이쾌대, 이중섭, 문학수, 최재덕 등의 화가가 참여했다. (출처: 한겨레)


  민족미술 부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조선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던 이쾌대의 꿈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그는 신미술가협회 동료들과 함께 자유로운 조선의 미술을 펼쳐나가고자 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외면하는 선택이자 조선의 미감을 살리는 활동의 신미술가협회는 이쾌대가 자신의 꿈을 좇았던 흔적이었다.


그는 활동을 하며 평범한 조선인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


<부인도>, 1943, 개인소장 /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 국립현대미술관


 

  오른쪽 하단의 그림에 주목해보라. 이 작품은 이쾌대의 자화상이다. 2015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던 이쾌대의 전시회 포스터이기도 한 이 자화상은 자유로운 분위기다. 우리가 유년시절 흔히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물들이던 풍경화 그림처럼 더없이 맑다.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덩어리를 이루고 그 아래에는 알록달록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나무와 초가지붕의 고즈넉한 풍경을 뒤로하여 화가 자신이 우뚝 서 있다. 푸른 하늘의 청신한 기(氣)를 한껏 받은 두루마기를 걸친 채로. 그의 표정은 또 어떤가. 굳게 다문 두 입술과 뚫어질 듯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 모자의 챙 아래로 늘어지는 그의 주름살 고인 얼굴선은 결연한 독립투사 못지않다.


  서양의 채색 기법과 구도 속에서 그는 서양 붓에 비해 모(毛) 끝이 긴 ‘한국화 붓’을 들고 있다.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뒷배경의 아낙네들과 같은 ‘조선’의 얼굴을 그리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무엇인가 이뤄보겠다는 희망으로, 그는 붓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하지만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은 앞으로 자신이 놓이게 될 운명을 알았을까. 광복을 맞이한 조국과 분단된 한반도가 이끌고 갈 그의 운명을.


 


 



조선의 해방, 그리고 분단



  민족미술, 조선의 미술에 주목했던 그로서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조국이 처음엔 얼마나 반가웠을까.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 조선의 진정한 미술을 아름답게 펼쳐나갈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의 대표작을 보면 희망만이 다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쾌대, <군상1-해방고지>, 캔버스에 유화, 181x222.5cm, 1948, 국립현대미술관



  이리저리 인물들이 엉켜 있다.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속 반나체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는 이 장면은 마치 태초 공간의 아노미 현상 같지 않은가. 심지어 몇 구의 시체도 보인다.


  수많은 인물들이 작품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멀리서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좌측 흰옷을 입은 여인, 이 여인을 향해 있는 우측의 사람들, 그리고 그 외 앞뒤의 사람들. 여인은 무언가를 급하게 전하려는 듯 옷자락을 나부끼며 뛰어온다.


  여인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은 바로 조국 광복의 소식이다.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의 표정을 주목해보라. 놀란 표정, 의구심 가득한 표정. 환희에 가득 찬 표정과 가만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표정도 있다.


이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러 뛰어오는 여인의 벅찬 표정과는 사뭇 다른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이쾌대가 이러한 여러 감정의 ‘군상’으로 해방의 환희와 희망, 동시에 혼돈과 불안을 묘사했던 이유.


해방기 민족 앞엔 ‘희망’이 있었지만, 바로 그 앞엔 ‘이데올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꿈


 


  광복 이후 이쾌대는 북한의 *좌익 미술단체와 남한의 *보도연맹 양쪽에서 활동하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선전미술은 그가 생각했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범한 조선의 얼굴을 화폭에 담는 것. 우리 민족의 진정한 미술을 자유롭게 그리는 것. 그것이 그의 이상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고 남과 북의 대립은 더욱 거세어진다. 서울에 남아있던 이쾌대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좌익세력으로 다시 넘어간다. 스탈린 초상화를 그리며 선전에 가담하는 일은 내키지 않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살아남아야 했기에.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여 국군에 체포되었을 때 이쾌대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남과 북. 공산주의와 반공. 이러한 이분법적 선택의 경계들 속에 그의 꿈은 부재했다. 조선의 얼굴을 그리려던 그의 꿈은, 조선의 분단된 현실 속에서 조각나버린다.
 


그리고 이쾌대가 북한을 선택한 순간 그의 이름 석 자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꿈: 흩뿌려진 영광의 빛


 

  역사는 여러 종류의 힘든 시기를 품는다. 우리는 식민지 시기, 한국전쟁, IMF 외환위기 등의 아픔들을 지났고 현재는 코로나19의 새로운 어려움을 마주했다. 남·북의 손가락질이 이쾌대의 꿈을 흔들었듯, 혹시 당신의 꿈도 어디에선가 처참히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 봉쇄로 가로막힌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 간절한 구직의 꿈.


각자의 분야에서 우리는 처절히 흔들리면서도 더 처절히 꿈꾼다.



  6월은 추모의 달이다. 누군가를 가슴 깊이 추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남긴 ‘무언가’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다.


  화백 이쾌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꿈’을 남겼다. 개인의 삶에선 이뤄지지 못했던 꿈이었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꿈은 곧 영광이 되어 빛났고 우리는 후손으로서 또 다른 꿈을 이어간다.


  꿈을 지킨 채 펼쳐나가는 일은 이쾌대를 포함한 수많은 선인들의 꿈에 답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사는 모든 영광의 빛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가 거듭되어 대지가 모습을 바꿀 때마다 작은 영광들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어 잊히고 만다.


  특히 분단된 한반도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6월은 역사 속 사라진 자들의 시간이었고, 이쾌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쩌면 초반에 언급한 작품 <상황>도 잊힌 사람들과 그들 개인의 꿈을 표현한 그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가 그러하듯 각자의 자리에서 꿈을 꾸고 살아갔던 이들. 긴장된 분위기의 힘든 상황 속에서 그릇 깨지듯 꿈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가슴속에 꼬옥 품고 살아갔던 개인들의 모습 아닐까. 혹은 같은 듯 다른, 각자의 소중한 꿈들의 모습.


  그것이 어떠한 형태든 ‘꿈’은 소중하다.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할지언정 열렬히 꿈을 꾸었다는 ‘흔적’은 남기 마련이기에.


  오늘날 기억되는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된다는 확신은 그 누구도 차마 하지 못했을 것.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한 몸을 바쳐 독립을 외쳤던 이유는 바로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조선 땅에도 열렬히 꾸었던 ‘꿈’이 존재했음을 담은 기록 말이다.


 





이쾌대가, 6월에 사라진 자들이, 혹은 이름 모를 누군가가 품었을 꿈.


이제 그 꿈을 따스하게 품어 환히 빛낼 사람은 우리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오늘을 꿈꾸면서.


 


 


“이루지 못한 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다시 쓰인다.”

(김연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책 소개 中)
 


 




[참고 웹사이트]


한겨레, “조선독립만세...그날 우리 앞에는 희망이 있었다”,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구술·집필), 김경애 기자(기획·진행), 2017.01.12., http://naver.me/FjMXZaFJ 



매일경제, “[죽은 예술가의 사회] 좌익·우익에게 이용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화가”, 조성준 기자, 2020.10.07., http://naver.me/x8GoxAZy 


 



글 | 김은강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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