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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un 16. 2021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끝도 없이 넓은 텍사스의 땅에서 이 정도 크기의 집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남자 혼자 살기 더없이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기에 내심 ‘마커스’는 ‘토비’의 절제된 씀씀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커스’는 전날 밤부터 아침까지 그를 찾아갈지 말지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너무나도 많은 고민을 해서인지 막상 그의 집 앞으로 도착했을 때 머뭇거림 없이 문을 두드렸다. 문 역시나 그의 집처럼 낡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새것도 아닌 적당한 적갈색 문이었다. 어떤 말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할 순간도 없이 문이 열렸다. ‘토비’였다. 처음 그를 찾아간 이후로 한 달이 지났었다. ‘알베르토’의 장례를 치르고 은퇴를 한 이후론 하염없이 tv와 맥주가 ‘마커스’의 일상이었다. 처음엔 분노와 억울함이 그를 휘몰아쳤었다. 경찰과 검사는 전과가 있던 토비의 형 ‘태너’만을 고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토비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매달 4만 달러가 그의 집 앞마당에서 뿜어져 나오며 전과도 없는 깨끗한 사람. 그게 이 세상이 토비를 정의하는 방법이었다. 서류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마커스의 직감은 달랐다. 절대로 멍청한 ‘태너‘ 혼자서 꾸민 짓이 아니다. 절제는커녕 한 마리 짐승처럼 본능에 이끌려 평생을 살아온 놈이 은행에서 100달러 지폐 한 장 훔치지 않았다는 건 불가능했다. 배고픈 원숭이가 바닥에 떨어진 바나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꼴이었다. 분명히 조련사가 있었다. 그리고 마커스는 그 조련사가 다름 아닌 ‘태너’의 동생 ‘토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잠깐의 회상에 잠겼던 ‘마커스’는 ‘토비’가 건넨 맥주를 보고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근무 시간이 아니니 괜찮죠?”

  ‘토비’의 표정은 언제나 같았다. 자기 형이 죽었을 때도 아마 저런 표정이었을까. 기쁜 것도 그렇다고 슬픈 것도 아니다. 침착하면서 평온했다. 마커스는 그런 평온한 ‘토비’의 표정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울컥했다. 절대로 흥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몸도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그로서는 착잡했다. 마커스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건네받았다.

“놀리는 겐가? 난 허구한 날 술만 퍼먹고 tv 앞에서 잠만 자는 은퇴한 늙은이라고.”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서로 간의 긴장감을 풀고자 가벼운 농담을 나눴다. 서로의 일상에 대해, 점점 사람들이 떠나는 동네 이야기에 대해 어제도 했었고 내일도 할 법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서로는 덕담을 나누기엔 역시나 불편한 관계임을 이내 깨달았다. 둘은 친해질 수 없었고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마커스’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 불평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엄연히 방문 목적이 있었고 그에게는 그것이 비공식적인 ‘취조’의 과정이었으며 ‘토비’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마커스’는 역시나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토비’의 성격과 똑닮은 테이블에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내가 온 목적은 자네도 알 거야. 진실을 알고 싶네.”

‘토비’는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방문 때 답을 했던 것 같은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커스’는 테이블에 손바닥을 내리쳤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난 자네랑 말장난이나 하러 온 게 아니네, 네가 그 빌어먹을 원숭이 ‘태너’의 조련사임을 난 알고 있다고.”

  ‘토비’는 그답게 찬찬히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정돈된 수염, 멀끔한 옷가지, 깨끗한 손까지. 외면은 영락없이 평화롭게 노년을 즐기는 중산층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달랐다. 평생을 보안관으로 살아왔던 그는 죽을 때까지 저 눈빛을 놓지 않을 터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토비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대로 말을 꺼내야 할까. 만약 저 늙은이의 수작이면 어떡할까. 들어올 때 몸수색이라도 할 걸 그는 내심 아쉬움을 삼켰다. 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그의 몸 어딘가에 녹음기나 도청기가 있다면 나보다 가족에게 더 큰 문제가 될 터였다.

‘토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날카로웠던 ‘마커스’의 눈빛은 ‘토비’의 물음에 늦깎이 손주를 만난 것처럼 풀어졌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이봐 ‘토비’, 내가 말했잖나. 난 은퇴한 늙은 몸이라고, 걱정 말게 난 자네를 감옥에 넣을 생각은 추오도 없다네, 차라리 자네를 처음 찾아갔던 날, 그때 자넬 총으로 쏴 죽였으면 죽였지 지금은 그럴 생각도 없네.”

  ‘토비’는 자신이 그를 벗어날 방법 따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피하고 말을 돌려봤자였다. 수십 년을 보안관으로 살아왔던, 아니 그의 삶 자체가 보안관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벗어날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내 곁에 형 ‘태너’도 총도 없다. 내 목덜미를 문 것은 늙어 갈기가 다 빠졌지만 이빨만큼은 건재한 한 마리의 사자였다.

“자 이만하면 됐으니 어서 말해보게 ‘토비’, 매달 자네 앞마당에 4만 달러가 넘는 돈이 뿜어져 나오고 전과 하나 없는 똑똑한 자네가 왜 고작 4만 달러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은행을 털고 사람들을 죽이고 내 동료를 죽였는가?”

‘토비’는 ‘마커스’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가난했어요. 내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아니 어쩌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이 황무지에 정착했던 때부터 말이에요. 그렇게 오랫동안 가난에 빠져 살다 보면 어느새 가난에 적응하고 익숙해지죠. 그래요 가난은 일종의 ‘버릇’이에요. 이놈은 아주 지독해서 무슨 짓을 하고 발버둥 쳐봐도 벗어나질 못하죠. 가난에 적응해버린 내 조상의 유전자는 그들의 자식의 자식들에게 퍼져 나가 우리까지 온 거예요.”

‘마커스’는 조롱이 섞인 표정과 함께 말했다.

“이 세상에 가난하게 태어났다고 해서 평생을 가난하게 살라는 법은 없어. 여긴 기회의 땅이지 않나. 저 멀리 냄새나는 아시아 놈들과 무지한 멕시코 놈들이 아메리칸드림이니 뭐니 하며 닥치는 대로 이 국경을 넘지. 그걸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는가?”

‘토비’는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 채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이 나라는 축복받은 곳이죠. 근데 말이에요, 우리 형제는 기회가 와도 어떻게 생겨 먹은 지도 몰라서 잡질 못하죠. 허구한 날 우리 형제와 엄마를 개처럼 패던 아버지, 울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 밖에서 싸움질하고 사고만 치던 형. 우리에게 기회는 오늘 하루 조용하게 지나가길 기도하는 그런 빌어먹을 인생이었어요. 기회의 땅? 웃기지 마요 보안관 양반, 우리에겐 기회의 땅으로 갈 차비도 없었어요.”

‘토비’는 들고 있던 빈 맥주병을 내려놓은 다음 조용히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곤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당신이 날 찾아왔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안락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댄 채 ‘토비’를 응시하던 ‘마커스’는 그렇다는 듯이 제스처를 취하며 대답했다.

“가난은 전염병과도 같다는 말 말인가?”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맞아요, 가난은 전염병과도 같아요. 그래서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론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죠. 그래서 나와 형은 결심했어요. 내 자식이 살기 위해 그래서 이 가난을 끊을 수만 있다면, 잠깐의 어긋남은 괜찮지 않을까.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만 잠시 비켜가면 된다 그리고 다시 원래 사회의 길로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말이에요. 잠깐의 어긋남으로 어긋나지 않으려고 우린 발버둥 친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 4명을 죽였나?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게 잠깐 어긋난 거라고?”

  ‘마커스’는 안락의자에 기댔던 어깨와 등을 ‘토비’쪽으로 거칠게 당기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마커스’의 커다란 주먹이 ‘토비’에게 향할 것만 같았다.

“그래요, 그건 실수였어요.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요. 애초에 우리 계획에 그렇게 큰 은행은 없었…”

  ‘토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커스’의 무거운 손이 ‘토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토비’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평온한 표정을 내비쳤다. 마치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커스’가 자신의 멱살을 잡을 거라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토비’의 반응에 ‘마커스’는 이내 김이 빠졌다. 잡았던 멱살을 힘없이 풀었다. 그리고 사과의 제스처를 보낸 후 마치 다시는 앞으로 뺄 일은 없다는 듯이 안락의자에 그의 등을 밀어 넣었다.

‘토비’는 밑에 두었던 새 맥주를 그에게 건네주며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겐 농장을 담보로 한 은행 빚이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죠. 아까 당신이 말했었죠. 여긴 기회의 땅이라고요. 그런데 우린 그 기회를 쓰기엔 시간이 촉박했어요. 3일 내로 4만 달러를 갚아야 했어요. 록펠러, 카네기에게도 3일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일 거예요. 그리고 나와 형은 그 3일이 우리 형제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걸린 지긋지긋한 가난이란 전염병을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우린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은행을 털었어요. 그렇게 4만 달러를 훔쳤고 그 돈을 다시 은행에 돌려줬어요. 참으로 웃기죠? 결국 아무것도 바뀐 건 없어요. 우린 단지 농장 밑 유전을 은행으로부터 지킨 것뿐이에요.”

  ‘마커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해 한평생 살아온 터전을 뺏기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온 그였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스스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이기도 했다. 공감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빌린 돈을 갚지 못했으니 그들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들의 불성실만을 꼬집었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낭만적이었을 뿐이었다. 은행은 그리고 그 은행을 감싸고 있는 사회는 애초에 그들이 돈을 갚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돈만을 쥐여준 채 평생을 일해도 갚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갚지 못하게 만들어서 그들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과연 내가 이 형제와 같은 처지였다면 그리 떳떳할 수 있었을까? 나도 보안관이란 직업이 없었다면 힘없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짧은 혼란이 그를 쉴 새 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이내 ‘태너’에게 목숨을 잃은 동료 ‘알베르토’의 얼굴과 그들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무고한 이들의 삶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잠깐의 혼란으로 ‘마커스’는 ‘하워드’ 형제에게 약간의 이해심을 가질 뻔했다. 머리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는 입을 열었다.

“토비, 네가 어떤 옳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너희 형제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 내 동료를 죽였어. 너희 형제는 내게 결코 일말의 공감과 이해를 얻지 못할 거야.”

“오, 마커스. 난 애초에 당신에게 우리 형제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어요. 의도치는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것에 죽을죄를 지은 건 맞죠. 하지만 동시에 내 자식에게도 가난이란 전염병을 물려주는 것 또한 죽을죄를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난 내 자식이 가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더러운 짓도 피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이 가장의 도리이고 아버지로서 책임감이지 않겠어요?”

  ‘하워드’ 형제의 모든 행위의 동기와 과정을 알게 된 ‘마커스’였다. 그에게 이 집에 있어야 할 목적은 더는 없었다. 문을 나서며 ‘마커스’는 자신의 처지를 위해선 살인도 서슴지 않을 거란 더러운 양심의 토비에게 침을 뱉듯이 말을 뱉었다.

“그래, 그렇게 빼앗은 돈, 스스로 영광스럽다고 여기나?”

  ‘토비’는 ‘마커스’의 두 눈을 응시한 채 낡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새것도 아닌 적당한 크기의 적갈색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야. 그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요?”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끝도 없이 넓은 텍사스의 땅에서 이 정도 크기의 집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남자 혼자 살기 더없이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기에 내심 마커스는 토비의 절제된 씀씀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그의 절제력에 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토비의 멍청한 형 ‘태너’가 그 정도로만 일을 그르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토비 스스로 ‘태너’의 역할까지 했다면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늙어 버린 그에게, 어느새 이 도시는 감당하기 버거운 무언가로 변해있었다.





글 | 이성도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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