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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ul 03. 2021

<시계태엽오렌지> 속 영화적 공간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시계태엽의 오렌지>의 로케이션을 구하기 위해 건축 잡지 두세 종의 10년 분량을 전부 사들인 뒤 2주 동안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시계태엽의 오렌지>의 로케이션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자주 수정처럼 맑은 해상도를 선호하기에 그의 이미지는 보석 세공처럼 정교하다. 그리하여  <시계태엽의 오렌지>의 배경 역시 꼼꼼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영화는 별나고 기이한 공간으로 가득하다. 괴이한 분위기를 위해 배색과 맞지 않은 배치를 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미술품을 곳곳에 배치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공간을 중심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주도적 분위기, 색조, 복합적 정서는 상당 부분이 이 공간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로테스크의 공간.



  <시계태엽의 오렌지>를 관통하는 느낌이 있다. 바로 ‘그로테스크’ 하다는 점이다. 그로테스크 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미술사가 존 러스킨 John Ruskin은 ‘그로테스크 groteque’를 이렇게 정의한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로테스크는 두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하나는 우스꽝스럽고 다른 하나는 공포스럽다. 어느 것이 우세한가에 따라서 그로테스크는 쾌활한 그로테스크와 끔찍한 그로테스크로 나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들을 적절하게 고려할 수 없다. 어느 정도 뒤섞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채 완전히 쾌활한 그로테스크는 거의 없다. 또한 재미를 배제한 절대적 공포의 그로테스크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테스크는 카니발적이면서 동시에 공포적인 것이다. 무언가 신나지만 어딘가 무섭다. 그렇기에 모호하다. 희극적이면서 공포스럽다. 관객들은 그 이미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또 하나 그로테스크의 특징은 신체의 기형적이고 혐오스러운 재현과 밀접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항문, 질, 다른 구멍들을 과하게 강조하거나 지독하게 마르거나 추한 인간 신체에 집착한다. 큐브릭의 영화는 이처럼 괴상하고 왜곡되고 때로는 희화화된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계태엽의 오렌지>의 주요 배경 역시 이러한 그로테스크를 중심으로 한다. 이 영화를 분석하는데 기존에 쟁점이 되었던 몇 가지 키워드를 벗어나서 공간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이 영화의 상징적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3개의 공간을 통해 이 영화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코로바 밀크바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코로바 밀크바는 강렬한 오프닝 숏의 배경이다. 동시에 대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다. 이 영화의 구조상 코로바 밀크바의 강렬함이 관객들을 바로 영화의 분위기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코로바 밀크바는 조각가 앨런 존스의 패티시 ‘가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앨런 존스의 가구는 ‘이래서는 안된다.’라는 뉘앙스가 조금 숨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코로바 밀크바는 너무 당당하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이 ‘왜 안되냐‘는 듯이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더욱 불쾌하다. 이 공간은 주인공 알렉스의 여성관을 보여준다. 여자가 완전히 복종하고 있는 자세와 구도. 이는 알렉스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이자 알렉스가 행할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곳은 알렉스의 남성적 섹슈얼리티를 몽환적으로 시각화한 공간이다. 여성의 대상화의 측면에서 두 오브제는 비슷하지만 코로바 밀크바가 휠씬 더 그로테스크하다.


 

Allen Jones (B. 1937) | Table


  왜냐하면 마네킹들이 시체처럼 창백하기 때문이다. 공포영화에서 인형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대상-시체를 연상시키는 소재다. 거기에 쓸데없이 화려한 머리 장식, 화려한 조명, 우스꽝스러운 벽지는 카니발적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가 코로바 밀크바의 그로테스크함을 만들어낸다.


 

<2001 space odyssey>의 화이트 모더니즘


  이 공간은 큐브릭 감독이 상상하는 미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화이트 모더니즘을 미래의 이미지로 제시한 바 있다. 코로바 밀크바는 이 미래 공간을 외설화한 것이다. 예술과 외설이 혼합되는 작품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그에게 미래사회의 이미지이다. 그는 “에로틱 예술은 결국 대중 예술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래에는 여술, 키치, 포르노가 점차 민주화되고 서로 분리될 수 없게 될 것이다.


 




2. 주인공 알렉스의 방.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알렉스의 방은 그의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하는 방이다. 그래서 이 방은 보이는 각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방이 된다. 첫 번째는 악의 화신 알렉스의 방이다. 성기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그림은 코로바 밀크바의 마네킹처럼 노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림의 여성기에 남근을 상징하는 뱀을 올려놓았다. 여성의 그림 아래에는 고문당하는 예수의 상이 있다. 마치 가혹행위를 당하는 군인들 같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알렉스는 이날 여성을 성폭행하고 남성은 폭행했다. 그는 이 하루를 마치고 ‘최고의 날’이라 평한다. 그의 방은 그가 묘사한 대로 최고의 날을 다시 반복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이 고전예술과 함께한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이 최고의 날을 마무리 짓기 위해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다. 이것이 이 방의 두 번째 측면인 예술 애호가 알렉스의 측면이다. 그의 방에는 커다란 베토벤의 사진, 그리고 음향 장비가 잔뜩 구비되어 있다. 그의 방의 두 번째 사진을 보면 정말 같은 방인가 싶다. 한 각도에서 보았을 때는 변태 성욕자의 방이고, 다른 각도에서 봤을 때는 그저 고전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의 방이다. 이 부조화는 어디서 오는가? 사실 시계태엽의 오렌지의 작가인 앤서니 버지스는 독일 고전 음악이 어느 정도 악마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베토벤은 나치에 의해 체제 선전으로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야만적 파시즘과 관계가 있다. 좀 더 종교적인 원작 소설에서 알렉스는 갱생을 하며 그의 취향은 독일 고전음악에서 독일 가곡으로 바뀐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그의 고전적인 취미가 반영된 방은 팝아트 감성인 부모가 사는 아파트와 대비된다. 이 영화에서 고전 취향과 팝아트-키치는 자주 충돌한다. 영화에 선한 인물이 없듯이 이 영화의 예술 취향도 정답이 없게 제시된다. 대중들의 저속한 팝아트 취향에는 조롱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사탄의 인물은 고전 예술을 좋아한다. 이러한 아이러니 역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좋아하는 것이다.







3. 캣 우먼의 방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캣 우먼의 방은 노골적인 성의 이미지. 외설, 여성차별적 이미지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 공간의 주요 양식은 팝아트다. 곧 고전 예술을 사랑하는 알렉스가 이 방 안에 침입해 클래식 음악 배경에 맞춰서 그녀를 공격한다. 이 공간에서도 여전히 고전 예술과 팝 아트 사이의 대립 혹은 칩임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기를 강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방에서 알렉스가 남근 모양의 예술품으로 캣 우먼을 폭행하는 장면에서 보듯 이 공간은 기본적으로 강간의 이미지이다. 그런 면에서 이 공간은 코로바 밀크바와 알렉스의 방에 연장선상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 공간이 알렉스의 공격 대상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알렉스가 싫어하는 팝 아트들이 전시되어 있고, 성적 대상화된 여성들의 이미지가 마치 알렉스에게 파괴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 공간의 뒷받침 덕분에 극단적 남성 섹슈얼리티가 끝내 완성된다.


  캣 레이디의 집은 코로바 밀크 바와 함께 이 작품의 외설적인 아우라를 더해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그로테스크는 신체의 괴기스러운 이미지에 있다. 여성기가 과하게 강조되는 이미지, 캣 레이디의 마른 몸에 꽉 끼는 타이즈. 이러한 극단적인 디자인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는 전반부에서 알렉스의 에너지와 위트를 체험한다. 악마이자 괴물인 알렉스는 그 표정과 몸짓으로도 표현하지만 그를 둘러싼 공간으로도 표현한다. 이 쓸데없이 예술적인 공간들이 알렉스의 가학증에 위트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예술적 기질이 있는 범죄자로 묘사된다.








왜 후반부에 공간적 표현은 극도로 적어지는가?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시계태엽의 오렌지>를 공간의 축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돌연 당혹스러운 현상과 마주쳤다. 영화의 후반부-루도비코 프로그램 이후부터 마땅히 분석할 공간이 없는 것이다. 후반부 서사가 전반부의 공간을 반복할 때 상징적인 표현은 제한된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할 법한 배경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전까지 모호했던 시간 배경도 왠지 우리가 사는 현재와 비슷해 보인다. 초반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도 사라진다. 더 이상 신나고 흥겨운 무언가도 없어졌다. 배경만 보면 초현실주의 영화에서 자연주의 영화로 바뀐 거 같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떠오르는 이유는 후반부가 알렉스의 내면보다는 그에게 가해지는 복수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복수가 가해지는 알렉스의 내면을 전반부와 같이 표현적인 공간으로 그려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예를 들어 작가 알렉산더는 알렉스를 방에 가두고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통해 고문한다. 방의 공간을 통해 알렉스의 파괴된 내면을 표현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스가 갇힌 방은 참 분석할 거리가 없는 건조한 방이다. 그동안 쭉 전시되어 온 조각이나 그림도 없다. 과장된 분위기도 사라졌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영화의 마지막 장소인 알렉스가 입원한 병실 역시 특별한 상징적 요소가 없다. 이 공간에서 외설과 가식이 공존하고 권력과 남성적 욕망이 결탁한다. 영화에 정치적 주제를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지만 강렬한 무언가가 없어졌다. 배우+공간으로 말하던 영화가 배우가 말하는 영화가 되었다. 초반부 강렬한 인상을 줬던 코로바 밀크 바와 비교해보면 정말 같은 영화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 영화는 공간을 통해서 분석하면 안 되는 영화였던 걸까? 아니면 공간 표현이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에는 무언가 숨겨진 의미가 있는 걸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드라이한 현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후반부의 주요 내용은 참으로 잔혹하다. 영화는 젊은 살인자가 그를 통제하는 국가 관료보다 더 천사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관료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악의 화신보다 무자비하다. 영화 후반부에서 알렉스는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이에 따라 배경도 달라질 뿐 아니라 복장도 달라진다. 영화에서 국가 관료들이 입는 제복은 개봉될 당시 영국에서 입었던 복장과 똑같은 것이다. 알렉스의 복장도 평범한 영국 남성의 복장이 된다. 전반부는 배우가 표현을 하는 만큼 공간이 표현했다. 공간이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는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정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드라이한 현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제 악마적 자아에 대해서 묘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루도비코 프로그램 이후에 죽었으니까. 외설적인 이미지가 쏙 없어진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성욕마저도 국가 권력에 의해 거세되었으니까. 후반부는 악마를 제어하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의 현실에 이야기이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더욱 자연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배경은 예술이 사라지고 사회가 등장한다.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두 번째 이유는 알렉스 개인의 시점과 관계된다. 마약을 마시고 몽환적으로 폭력을 배설하던 알렉스가 ‘꿈에서 깨어나고’ 드라이한 현실 세계에 순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초반부에 몽환적인 배경들은 마치 꿈과 같다. 배색도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이고 공간도 시대감을 상실하고 있다. 코로바 밀크바의 공간도, 캣 레이디의 공간도 알렉스의 꿈속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여도 크게 부족함이 없다. 그 공간이 알렉스의 자아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도비코 이후의 배경은 더 이상 폭력과 성욕을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알렉스가 바라보는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글 | 박지원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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