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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도슨트 Jul 08. 2021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


  비극은 때때로 예술가의 삶을 더욱 찬란하게 만든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좌절을 주는 지독한 아픔은 도리어 새로운 기회를 선물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가장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더 좋은 결과를 낸다. 그러나 이러한 기분 좋은 반전이 고통의 끝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파도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과 같은, 비극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모여야만이 반전 드라마는 완성된다.

  척 클로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극사실주의 작가이다. 극사실주의는 대상을 마치 사진과 같이,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이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그린다면 그의 주름살 하나도, 속눈썹 한 올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척 클로스는 사람의 얼굴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리는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미술관의 한 벽면을 같을 덮을 만큼 거대했고, 초상화로 표현되는 대상은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얼굴만이 거대하게 확대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어딘가 익살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며, 우리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John, 척 클로스, @chuckclose



  척 클로스의 지나치게 사실적인 그림들은 엄청난 기술력을 요구했고,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 후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는 대상의 사진을 먼저 인쇄한 뒤, 격자로 나누어 아주 작은 셀의 모음으로 만들었고, 그 셀을 한 칸 한 칸 캔버스로 옮겼다. 그렇게 그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토록 사람 얼굴에 집착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척 클로스, @TheNewYorkTimes



  “처음에는 얼굴을 알아보기가 어려워서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하지 못했어요. 그런 제가 왜 아직도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지, 왜 아직도 절박한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20년이 지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제가 오래도록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이가 초상화를 그린다니. 척 클로스는 안면인식 장애를 앓았다. 주변인들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증세가 호전되길 기대하며 주변인들의 얼굴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상대의 얼굴을 낯설게 느꼈고, 그 낯섦에서 비롯된 새로움과 편견 없는 시선이 그로 하여금 더욱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척 클로스, @chuckclose.com



  우리는 상대에게 가지는 좋고 싫은 마음, 그가 나를 대한 방식을 기억하며 그의 얼굴에 투영해서 본다. 그렇기에 그림에 표현되는 인물에는 반드시 작가의 감정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척 클로스의 초상화는 작가의 모든 사적 감정이 제거된, 한 명의 인물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초상 속 모든 주름, 눈의 떨림, 솜털의 표현은 초상 속 대상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충실히 대변한다.

  초상화가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될 줄 알았던 척 클로스의 안면인식 장애는 그렇게 그를 더욱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시련은 이쯤에서 마무리되지 않았다.

  1988년 그는 그의 작품으로 상을 받기 위해 참석한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갑작스러운 복통을 느끼고, 이후 목 아래의 모든 부분이 마비되는 비극을 맞는다. 그의 극사실주의 작품은 세밀한 기교, 표현, 그리고 엄청난 시간을 요구했기에 사지가 마비된 그는 초상화를 그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암담한 상황에서도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붓을 묶어가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척 클로스, @chuckclose.com



  그는 초상화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주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원래 사용하던 격자로 작품을 완성해가는 자신만의 방식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고로 모든 신체 능력을 잃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그 무엇도 잃지 않았다. 물론 이전과 같이 한 땀 한 땀 그려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손가락에 물감과 연필을 찍어 격자 한 칸 한 칸을 채워갔고, 그 물감 도장들이 모여 하나의 얼굴을 이루었다. 그렇게 그의 초상들은 가까이서 보면 마치 눈과 같은 물감 도장이 가득한 추상표현과 같았고, 멀리서 보면 이전과 같이 사실적인 사람 얼굴의 모습을 띄었다.


Lucas, 척 클로스, @widewalls



  그의 물감 도장 초상은 극사실주의 초상화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시에 그가 작업하는 예술의 범주를 사실주의에서부터 추상 표현주의까지 확장해 주었다.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유화에 한정되지 않았고 말년에는 판화, 인쇄, 직물 공예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말한다.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마추어고, 진정한 예술가는 기다리지 않고 작업한다고. 행운이나 천재적인 재능이 아닌, 이러한 그의 멈출 줄 모르는 열정과 강인한 정신이 그에게 닥친 비극을 기회로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일단 앞으로 나아가라. 영감을 기다리지 말고 행동해라. 그때만이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글 | 이서연

편집 | 김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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