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달글 Sep 28. 2020

[장문장] 우리가 돈 받고 글 쓰는 건 아니니까


“안녕하세요 장문장입니다. 글 쓰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난 5월 한달글을 시작한 뒤로, 매달 마감일이면 이렇게 운을 떼었다. 글은 평균 4개 정도가 올라왔고, 단톡방의 인원수를 따져본다면 마감률은 항상 절반에 못 미쳤다. 그래도 닦달하지는 않았다. 글 쓰는 건 쉽지 않으니까.


닦달하지는 않았지만 초조했다. 건강한 압박이 되었으면 한 프로젝트가 누군가에게 일상의 가시가 될까 봐 말이다. 링에 올라선 순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닫듯이,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순간 눈앞이 침침해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글쓰기란 세상을 해석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해석과 번역 모두 지난한 연습이 필요하다. 나 또한 내 글이 부끄러워서 숨기던 시기가 있었다. 15살의 장문장은 빨간 노트를 마이 주머니에 넣고, 절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아 30살에 다다른 장문장은 이제 꽤나 긴 글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써서 광장에 내던질 정도는 되었다. 오래도록 글쓰기에 실패하고 또 성공하면서, 나는 글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두 벽의 존재를 알았다. 이 두 장벽을 단숨에 넘어설 수 있는 비법은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마음가짐, 말하자면 자세를 잡는 것 정도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제를 정하는 자세, 그리고 탈고하는 자세다.



주제를 정하는 자세


무엇이 의미 있는가


우리는 개울에 서있다. 소박하게 흐르는 개울가에서 어떤 것을 쓸까 고민한다. 예전에 썼던 메모, 최근에 느낀 감정, 인상적인 문장들이 떠오르고, 이걸로 할까? 싶은 주제가 두어 개 지나친다. 그렇게 가까스로 주제 하나를 쥐고 나면 이제야 닫힌 문과 마주한다. 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을까? 시간을 내어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걸 누가 읽어? 그렇게 다시 개울가에서 한없이 흐르는 물결을 마주한다. 무엇이 의미 있는가? 그것을 찾지 못하면, 계속 서있기만 해야 한다.


내 글이 독자에게 가치가 있는가는 중요한 질문이다. 글을 읽는 것은 유희이자 노동이다. 즐거움이든 의미이든 주지 못한다면 독자는 시간을 버리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글을 다 써서 눈앞에 독자가 있을 때 물어볼 일이다. 독자에게 주는 가치란 쓰기의 결과이자 읽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주제를 정하는 자세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물으면 된다. 왜냐면, 단독적인 것은 자연히 보편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가장 단독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한때 뜨거웠던 대중철학자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서는 단독성과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말하면 와 닿지 않을 테니, 단독성-보편성 쌍의 대척점에 있는 일반성-특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일반성과 특수성 논리는, 예컨대 인간이란 개념이 일반성이라면 이 것은 강신주나 김서연 혹은 심수영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들은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에 지난 지 않는다. 인간 3명을 죽이라고 하면 이 세 명을 죽이면 된다. 이러한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모든 것이 돈으로 구매 가능하므로, 돈은 일반성을, 모든 사물과 사람이 특수성을 나타낸다. 이 도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들은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일반성이 특수성을 지배한다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가 탄생한다.”



즉, 일반성-특수성 안에서 인간은 고유한 성질을 상실한 채 비교되고, 교환을 위한 상품으로써 기능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이 상실한 고유한 성질, 그것이 바로 단독성이다.


“단독성이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체성을 의미한다.”


단독성이란 교환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단독적인 것은 다른 그 무엇과도 같지 않으며, 같은 성질이 없으므로 비교가 불가능하다. 고로 하나의 기준을 통한 가치의 설정이 불가능하게 된다. 즉 나라는 인간은 다른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러므로 교환 자체가 불가능한 단독적인 개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므로 일반성 도식과 다른 새로운 관계의 형태가 필요한데, 그 관계가 바로 보편성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비교, 교환할 수 없는 단독자는 어떻게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을까? 보편성이란 단독적인 주체가 공유하는 가치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계약 연애를 했다. 계약 조건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잠자리를 가져도 된다’는 것이었다.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은 그 누구와도 다른 단독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두 커플의 사랑에는 사랑의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을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결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역으로 우리만의 단독적인 사랑에 성공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의 방식에 공명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사랑은 지극히 단독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공감할 수 있다. 그들의 사랑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독적인 것은 언제나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역사를 지나온 작품들은 모두 단독성을 궁구하여 보편성에 다다른 것이다. 그 시대에만 의미 있는 작품들은 시대가 지나면서 가치를 잃지만,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보편성을 꿰뚫은 작품들은 시대가 지나도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가? 가장 단독적인 것이 의미 있다. (거창하지만) 문학을 한다면, 굳이 타인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지 먼저 물을 필요는 없다. 보편성은 글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얼마나 깊게 관조했는가, 내 감정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가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 없이 날 것으로 써낸다면 비로소 나의 이야기는 타자에 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장 날 것으로 갈수록, 가장 내면에 집착할수록 점점 더 보편적인 글을 써낼 수 있다.


글을 써내리는 동력


한 편의 글을 쓰는 건 지난한 과정이다. 그 고된 시간을 버티게 하는 것은 공들여 고른 주제가 가진 힘이다. 나는 글을 쓰고 나서, 이건 1년짜리 글이다, 5년짜리 글이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글은 매체이고, 전달하는 것은 의미다. 그 의미라는 것은 5년 전의 사건, 3년 전의 메모, 어제의 대화가 섞여 만들어진다. 하나의 모호한 상념, 혹은 감정 따위는 비슷한 맥락에서 상기되고, 사건과 의미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진 의미의 그물망이 비로소 글을 써내리는 동력이 된다. 2000자의 글을 완성하는 힘은 거기서 나온다. 추진력, 동력, 혹은 비상주머니에 든 초콜릿 한 조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쓸 수 없다. 글이 막힌다면, 그것은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쓰지 못하겠다면, 과감하게 그 주제를 나중으로 미루어도 좋다. 어떤 주제로든 그럴듯한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허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주제를 정하기 어렵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편이 좋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쓰다 보면, 내가 여태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구나, 싶을 만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주제를 정하는 보다 쉬운 마음가짐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몰랐던 것, 이제 알게 된 것들을 쓴다. 작은 진리이든, 스쳤던 감정이든 내게 새로웠던 모든 것들을 쓴다. 세상 어딘가 내가 고민하고 답을 내린 것을 고민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으리라 상상한다. 이런 편리한 상상은 글쓰기를 조금 쉽게 만들어준다.



탈고하는 자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아무리 주제를 잘 잡아도 잘 써야 글이 된다. 그리고 탈고는 그 매듭을 짓는 일이다. 마음껏 가지고 놀던 찰흙이 어느덧 형태를 갖추고, 점점 단단해지며, 처음의 찰기를 잃어간다. 이제 힘을 주어도 내 마음대로 모양이 바뀌지 않고, 괜히 고치다가 표면에 균열이 늘어난다. 글쓰기에는 이런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생각보다 글은 저절로 써진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그쯤 되면 눈앞에 서있는 정체모를 조형물을 보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그냥 엎어버릴까?


나의 어머니, 전 작가님은 평생 10권이 넘는 장편소설을 써온 소설가다.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다. 글이라는 건 퇴고를 아무리 해도 고칠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탈고를 하셔서 책을 내시냐고. 어머니는 말했다.


책을 낼 때는 원고를 완성했을 때가 아니야. 원고를 포기했을 때야. 다 했을 때가 아니라 더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포기를 덕목이라고 배운 적이 없다. 언제나 노력, 끈질김 따위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글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한달글은 매월 24일을 마감으로 정했다. 마감까지 최선을 다해 퇴고한다, 마감에는 깔끔하게 포기한다. 글쓰기에는 그런 임계점이 필요하다.


언젠가 어머니는 하루 종일 쉼표 하나를 넣었다 빼기도 했다. 포기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노력해야 한다. 할 만큼 했다면 나름의 후련함이 있다. 살다가 보면 안 될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순간이 생긴다. 포기하기 위한 투자인 셈이다. 다만 ‘할 만큼’이란 각자가 다르니, 스스로 챙겨가는 수밖에 없다. 포기하는 것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언제나 글쓰기의 끝이 타협이 아니라 포기라서, 글쓰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힘들다.



다 같이 칭찬하고 마무리합시다


매달 한 곡씩 노래를 녹음해서 인스타나 유튜브에 올리는 프로젝트에 초대된다면, 나는 온몸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할 것이다. 내가 목소리가 있다고 해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더욱이나 남들 앞에 보여준다는 것은 인격 살해이나 다름없다. 직접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자살이다. 못 불러도 괜찮아! 시도가 중요해!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대도 불가능한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달에 한 번 글을 써 올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사뭇 대단한 일이라 칭찬하고 싶다.


사실 글쓰기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태도는 두 가지다. 자아에 대한 관심, 그리고 타자와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 왜 아침의 2호선은 슬픈지, 일요일 23시의 허무와 공허는 어디서 오는지, 왜 나의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지. 글을 쓰는 인간이란 오래도록 이런 질의응답을 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면, 이미 가장 중요한 허들을 넘어섰다.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인 탓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우리가 돈 받고 글 쓰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Parapluie] 왜 쓰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