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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Oct 21. 2020

[Parapluie] 비밀의 숲 속 길 잃은 회계분식

직업적 글쓰기

비밀의 숲 2를 보지 않으신 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비밀의 숲 2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사실적인 듯 사실적이지 않은 캐릭터와, 병렬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내면의 정의감이 불타는 경험도 간접적으로 할 수 있었다.


평소에 드라마를 몰아 보는 편이라 비밀의 숲도 에피소드가 좀 쌓이기를 기다렸다가 정주행 하기 시작했는데, 13회 초반에 정주행의 속도에 제한이 잠깐 걸렸다. 다음이 그 문제의 장면이다.


13회 초반, 한조 계열 호텔에 오주선 변호사가 강원철 지검장을 소환한다.

 변호사는 강 지검장에게 한조 엔지니어링 재무제표를 며시 건넨다.


카메라는 재무제표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좌측으로 텍스트처럼 예쁘게 정렬된 숫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싸늘하다.  장면에 이어 나오는 대사들이 더 싸늘하다.

강: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오: 분식 맞죠?
강: 당기 매입한 자사주가 육만 육천 주. 같은 기간에 매입비용만큼의 유동자산의 이동이 있었네요.
오: 역시, 경제통이라고 하시더니.
강: 이 정도면 분식이 아니라 창조경제죠. 이런 걸 오다가 주웠을 리는 없고, 어디서 나셨습니까.


좌측 정렬 재무제표부터 얼토당토않은데,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필자는 이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이 장면을 다섯 번을 돌려서 봤다.


개를 갸우뚱리며 사를 복기까지 해본 결과 필자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강 지검장허풍쟁이 혹은 무당이거나, 아니면 작가가 조금 덜 성실했나.


1. 영 수상한 재무제표


먼저 재무제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재무제표는 기본적으로 숫자를 우측 정렬 표기한다. Dart(금감원 전자공시사이트)에 가서 아무 보고서나 열어 보면, 다음과 같은 재무제표를 구경할 수 있다.

이 가지런한 우측 정렬!

숫자들을 가지런히 오른쪽으로 정렬하는 이유는, 이렇게 표시해야 숫자의 금액 단위가 바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처럼 나온 재무제표는


1) 작가 또는 소품 담당자가 재무제표를 본 일이 없거나,

2) 오 변호사가 고도의 작전으로 일부러 좌측 정렬 재무제표를 준비했고, 강 지검장은 두뇌회전 속도가 너무너무 빨라서 이걸 바로 읽어낼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필자에게 저런 재무제표주어진다면, 우선 엑셀 변환해서 ctrl 1을 잽싸게 누른 후 서식 설정 우측 정렬로 변환한 후 비교분석을 수행할 것이다.


2. 정말 자사주 매입일까?


강 지검장은 재무제표를 보자마자 자사주 매입을 단언한다. 생소한 단어는 전문성을 위장하기에 용이하다.


자사주(treasury stock), 또는 자기주식이란, 회사가 시장에 유통 중이던 발행주식을 다시 사들 주식을 말한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행위는 회사가 스스로 자기 주식을 사서 금고(treasury)에 넣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순하다. 자사주 매입의 목적은 보통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수량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재무제표를 받자마자 강 지검장은 자사주 매입을 육만 육천 주,라고 읽어낸다. 로 자사주의 수량을 읽어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기업이 자사주 2주를 1주당 100원에 매입했다면, 다음과 같은 회계처리가 수행된다.

차변: 기타 자본(자기 주식) 200 (=2 × 100)
              대변: 현금 또는 유동자산 200

그런데 강 지검장이 본 재무상태표는 전기와 당기말 자산, 부채 및 자본의 잔액, 즉 금액만 표시된다. 자사주를 한 주에 얼마에 거래했는지 알아야 수량이 도출이 가능하다. 따라서 드라마에서처럼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재무상태표만 보고 육만 육천 주라는 수량을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은 강 지검장이 신기가 있거나.


게다가, 보통 공시 수준에서 재무상태표에 자사주, 또는 자기주식을 단일 계정으로 공시하는 회사는 없다.


위에서 예시로 든 회사의 자본 쪽 재무상태표를 한번 보자. 이 회사도 기타자본항목, 이라고 표시할 뿐이다. 


다시 위로 가서 드라마 속 화면을 보자.


재무상태표상 비유동자산은 파생상품자산, 확정계약자산, 유형자산, 무형자산, 기타비유동자산, 이연법인세자산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 정도의 세분화 수준이라면, 자본 내역에 자기주식이 별도로 공시될 리 없다. 드라마가 재무상태표 하단의 자본 쪽까지 보여주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99퍼센트는 확실하다.


그렇다 대체 강 지검장은 어떻게 기타자본이 자기주식으로 증가했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걸까? 기타 자본은 자기주식 외에도 무수히 많은 다른 사유로 변동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매입비용"만큼의 유동자산 변동도 자기주식 외의 많은 사유로 감소할 수 있다.


3. 재무상태표만 보고 해석을 마쳤다고?


지금까지 재무제표와 재무상태표를 다소 혼용해서 사용했는데, 여기서 용어를 짚고 넘어가겠다.


재무제표는 재무상태표, 손익계산서, 자본변동표, 현금흐름표 및 주석으로 구성된다. 이 다섯 개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만드는 하나의 세트가 재무제표이다.


각 요소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재무상태표: 기업의 전기 및 당기말 자산, 부채, 자본 금액을 보여준다. "한 시점"의 잔액이 표시된다.

손익계산서: 전기 및 당기 동안의 매출, 매출원가 등 손익을 보여준다. "기간"의 거래금액이 표시된다.

현금흐름표: 영업활동, 투자활동, 재무활동에서 현금이 어떻게 유입되고 유출되었는지 보여준다. "기간"의 현금유출입이 표시된다.

자본변동표: 자본의 각 요소가 전기 및 당기 동안 어떻게 변동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또한 "기간"의 거래를 설명한다.

주석: 위 네 가지 재무제표의 세부 내용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강 지검장이 건네받은 재무제표는 자산, 부채, 자본 잔액을 보여주는 재무상태표다.


위에서 말했듯 재무상태표만으로는 자사주 매입금액도 알 수 없고, 수량은 더더욱 알 수 없다.


필자라면 자사주 매입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오 변호사에게 나머지 재무제표를 요청한 후, 다음 사항을 확인할 것이다.

현금흐름표의 재무활동 현금유출에 자본거래 내용 또는 자사주 매입 관련 내용이 있는가?

자본변동표의 기타자본이 감소하였는가? 현금흐름표상 재무활동 현금유출금액과 유사한 수준인가?

만약 현금유출액과 자본변동표상 금액이 상이하다면, 비현금거래(미지급한 금액 등)는 주석 상 공시되었는가?

기타자본 관련 주석에 변동사항이 작성되었는가?


오 변호사 즉시 자사주 매입 운운하는 강 지검장을 보며 "경제통"이라고 감탄할 때, 나는 재무상태표만 보고 바로 결론을 내린 강 지검장의 패기(또는 신기)에 감탄했다.


4. 그래서 그게 왜 분식일까?


오 변호사와 강 지검장 모두 언급한 분식의 정의는 뭘까?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개회사 내부 경영진과 관련 타기업 및 연관자들이 비정상적인 자금 운용, 매출액 과대 계산 지출액 축소 계산, 자산 가치 허위 계산, 부채 축소, 계산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재무 변화를 허위로 조작하는 비도덕적인 불법 행위

강 지검장은 자사주 매입에 대해 분식을 뛰어넘은 창조경제라고 말다. 사주 매입이 비정상적인 자금 운용이랄지 자산 가치 허위 계상 등과 떤 관련이 있길래 창조경제까지 언급한 것인지 의문이다.


자사주 매입을 위해서는 상법상 명시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강 지검장 한조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한조의 재무제표만 가지고 불법 자사주 매입임을 바로 한눈에 본 걸까? 그렇다면 저 종이 쪼가리 하나로는 위법성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으므로 강 지검장의 판단은 논리적 비약이다.


아니면 자사주 매입으로 주주들이 보유한 지분율을 걱정한 걸까?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유통보통주식수에서 자사주가 제외되므로 주주들이 보유한 지분율에는 변화가 없다. 주가가 일시적으로 오를 수도 있겠으나 시장경제에서 결국 주가는 기업의 가치를 반영한다. 그 찰나의 시간으로 누군가 미리 알고 거래를 했다면 그것은 해당 개인 또는 기업의 자본시장법 위반에 해당하므로 분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고 판단된다.


작가가 어느 맥락에서 공시 전 재무제표를 강 지검장 앞에 던졌는지는 충분히 이해 가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장치로 강 지검장이 경제통이는 사실은 의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훌륭한 스토리를 써낸 작가 노고를 무시하거나 비웃으려고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만 드라마의 대상은 중이고, 회계법인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 침대에 드러누워 넷플릭스를 튼 필자와 같은 회계사도 대중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런 엉뚱한 장면이 나오면 그때부터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는 현저히 떨어기 마련이다.


여담으로 비밀의 숲 시즌1 1화에 어린 황시목이 뇌파검사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린 시목의 머리에는 심전도 전극이 붙어 있다 (초록 이어폰 같은 기구 위 F는 foot의 약자다).

누가 머리에다가 심전도 전극을 붙인 것인가!

실제 뇌파 검사는 좀 깨지만 수영모자 같은 걸 쓰고 한다.

구글에 뇌파검사를 검색해보자

작가는 캐릭터 구상 시 황시목을 머리에서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원철 지검장 역시 재무상태표 하나 가지고 매입한 자사주 수까지 알 수 있는 엄청난 신기를 보유한 인물아닐 것이다. 이런 오해의 여지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디테일과 피드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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