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선곡표에는 댓글이 꽤 많이 달렸다. 이런 반응 하나하나가 감사하다. 댓글에 달린 음악들을 들어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댓글로 추천받은 음악들을 자연스럽게 유튜브 검색하여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시청기록이 쌓여 관련 아티스트나 장르 같은 것들이 알고리즘에 반영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원래라면 선행되는 것이지만 생각의 흐름상) 나도 선곡표를 유튜브 재생목록으로 올렸으니 대부분은 그대로 들을 것이고, 청취자의 알고리즘에 반영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추천이 추천을 낳는 형태로 나의 취향을 다른 사람의 알고리즘에 주입하는 것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큰 흥미와 책임감이 생겼다.
지난번 댓글을 통해 추천받은 노래는 우선 의무적으로 2회 연속 청취를 하고 글을 쓰면서 또 몇 번 더 듣고 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지만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 음악 좀 듣는 친구(물론 에픽하이 팬이었다.)와 서로 자기 취향의 노래들을 들려주면서 두 번씩 듣는 게 일종의 룰이었기 때문에 습관으로 남은 것일 테다. 또, 예전부터 만약 직업이 디제이라면 노래 듣는 게 주 업무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듣는 게 일인 사람이라면 처음 듣게 된 노래는 두 번쯤은 들어주는 게 직업윤리가 아닐까 라고 스스로 정했다.
세카이노 오와리의 Rain 은 처음 듣는 곡이지만 밴드의 노래는 몇 곡 알고 있었다. Tree와 Earth 앨범은 mp3로 구입해서 핸드폰에 가지고 있기도 하고. 아주 팬은 아니어서 공연은 가본 적 없지만 12년 지산에서 늦게 온 사촌을 기다리는 바람에 못 본 게 좀 아쉽기는 하다. 세카이노 오와리는 보컬 멤버의 목소리가 아이 같은 면이 있어 매력 있다. 노래 자체도 좋고 공연도 정말 잘한다고 하니 다음번 기회가 있다면 공연을 가봐야겠다.
일본밴드 노래를 듣다 보니 중고등학교때 일본 밴드에 심취했던 기억을 되살려 언제 한번 인상깊은 일본밴드 노래를 주제로 한 달치 리스트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에 떠오르는 건 앞서 이야기한 두 앨범을 다운받아 들었던 때 같이 들었던 Awesome City Club이나 Suchmos, Meta Five 정도인데 열 손가락 안에 꼽으라면 못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부러 하나하나 되뇌어본다. 이런 사이드 추천을 위한 별책부록 리스트도 만들어야 될까 싶다.
잔나비의 November Rain과 사뮈의 봄비는 제목만 보고 건스앤로지스와 신중현이 떠올랐는데 내가 너무 구세대였나 보다. 잔나비야 요즘 인디씬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밴드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잘 아는 밴드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게다가 한껏 게으름 피우다 보니 어느새 11월이 코앞이라 더욱 듣기 좋은 것 같다. 사뮈의 봄비는 듣는 내내 강산에나 안치환이 생각나면서도 노래든 가수든 더 비슷한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청각적 심상에도 데자뷰가 있는 듯하다. 어찌됐든 좋은 노래들을 또 알아가게 되어 이렇게 글을 쓰는 보람이 있고 감사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변잡기가 너무 길었다. 이번 달 주제는 '소음 혹은 고요'다. 앞에서 이야기 한 사뮈의 봄비를 듣다 보면 끝부분에 기타를 마구 후리는 부분이 등장한다. 어찌 보면 그저 시끄러움 소음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고조를 표현하거나 오히려 명상에 잠길 수도 있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런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말하고 보니 고요는 지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MEW는 2015년 펜타포트 라인업에 올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정작 그 해에는 펜타포트 대신 안산밸리를 가서 못 보고 대신 사운드클라우드에 위의 부틀렉 녹음본만 감격하며 들었다. 이후 그 해 연말쯤 다른 페스티벌에 보고 싶던 밴드인 Daughter와 같은 날 출연한다고 하여 예매했으나 페스티벌 자체가 취소되어 결국 라이브는 볼 수 없었다. 사실 알게 됐다고 말은 했지만 아는 곡은 이 곡 한곡뿐이다.
이 곡은 정서적으로 고요하면서 클라이막스의 기타후리기까지 이번 주제에 완벽히 들어맞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곡들이 멜로디나 리듬감의 변화, 벌스, 코러스, 브릿지, 다시 코러스와 같은 진행으로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곡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비슷한 자리를 맴돌다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노래들 중에서도 이런 느낌을 주는 곡들이 많으니 이번 플레이리스트의 서문이자 맛보기 곡으로서, 열차보다는 연꽃의 이미지를 그리며 즐겨주길 바란다.
뮤와 비슷하게 내한공연에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보지 못한 밴드가 모과이이다. 2014년 내한 때에는 이후 2015년에도 결국 못 본 도터가 오프닝밴드를 선다기에 일석이조라면서 예매했다가 모종의 수술로 못 보고, 2018년 공연은 1년간 백수생활의 시작으로 당시 또 다른 백수 친구와 함께 제주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 집에 놀러 가느라 놓치게 되었다. 모과이는 포스트락 장르를 대표하는 밴드로, 해당 장르에서 위상으로 따지자면 세계 최고의 페스티벌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글래스톤베리에 2014년에 헤드라이너로 공연하는데 메탈리카가 같은 시간 다른 스테이지에 헤드라이너로 서게 되자 '드럼도 못 치는 게 어딜'과 같은 뉘앙스로 도발을 할 정도였다. 곡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필자는 이 곡을 통해 모과이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약간 게으른 듯 울렁이는 베이스와 역시 제자리를 맴도는 멜로디와 뒤에 깔리는 노이즈가 어우러져 포스트락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찌 보면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애초에 모과이가 원조 격이니 진짜 원조 맛집 같은 곡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모과이의 음악은 뮤보다는 두루두루 들은 편인데, 기억에 남았던 곡은 이름부터 인상적인 Mogwai Fear Satan이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이 곡 또한 모과이의 대표곡인가 보다.
이제부터 몇 곡은 한국 밴드의 차례다. 노 리스펙트 포 뷰티는 2014년 펜타포트 즈음 라인업에 있어서인지 어디 소개로 들었는지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고 펜타포트 때 비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압도되어 멍하니 봤던 기억이 있다. 포스트락이라는 장르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면 이 곡과 유사한 음악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곡과 바로 다음 소개할 곡은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락의 전형이며 아주 좋아하는 곡들이다.
고3때 수능 끝난 후 이틀 뒤는 내 생일이었다. 내가 이 날을 기대했던 건 수능이 끝나고 해방감도 있었지만 2009년도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루키 연말결산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인 까닭이 더 컸다. 당시에는 대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경험했던 공연이라고는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직전 친구와 범프오브치킨 내한공연을 보러 일탈하듯 서울로 올라갔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한 무대에 여러 가수들이 오르는 페스티벌과 같은 공연은 처음이었고, 그 해의 슈퍼루키라고 할 만한 밴드들과 국내의 내로라하는 밴드들이 연이어 공연을 펼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별세계였다. 그리고 그날의 주인공인 대상 수상자는 다른 후보들과는 다르게 두곡이 아닌 단 한곡 warm을 연주한 아폴로18이었다. 직전년도 대상 수상자는 국카스텐, 인기상에 장기하와 얼굴들이었고 그 해의 헬로루키에 로맨틱펀치, 몽니, 데이브레이크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아폴로18이 당시 얼마나 큰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폴로18은 한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라는 칭호를 얻으며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 2012년에는 최우수 록음악상을 받는 기염을 토해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나가지는 못했고, 저작권자 요청인지 웬만한 국내 음원서비스에서도 들을 수 없다. 그래도 유튜브에는 앨범버전도 있고 온스테이지 라이브도 있어서 다행히 여러분에게 소개해줄 수 있게 됐다.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앞서 소개한 I Am A Shadow가 나에게 한여름 폭우 속의 만취 같은 느낌이라면 이 곡은 11월 북방의 한파를 온몸으로 맞다 실내로 들어왔을 때 온풍기의 느낌이다. 사연이 있는 노래들은 더욱 각별해지기 마련이다.
부록으로는 필자의 감상으로 같은 색온도를 발하고 있는 서태지의 take one을 추가했다. 나는 진공관의 오렌지색 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상을 하면서 듣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소음, 혹은 시끄러운 음악이라고 하면 항상 2012년 지산밸리에서 할로우 잰을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영상으로 올려둔 바로 이때 이 공연인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그중에서도 특히 락페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영상에서 적잖은 문화충격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리스트의 음악들을 복선으로 여긴다면 이 광경 또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도입부부터 월 오브 데스로 시작하고 4분24초 써클핏 지령에 맞추어 엉성하지만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 가장 빡센 밴드를 2일째 오후 2시에 편성하는 기획자들까지 엉망진창으로 환상적이다. 필자는 전날 새벽 공연과 뒷풀이로 술을 해 뜰 때까지 마시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8월의 지옥같은 더위에 지쳐 앉아있는데 안철수같은 아저씨가 흡사 절규에 가깝게 노래하는걸 보며 처음 접하는 스크리모 장르의 충격과 함께 무언가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할로우 잰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영상에 나도 있나 다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아마 화면에 잡히지 않는 뒤쪽에서 앞통수가 얼얼한 얼굴로 앉아있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할로우 잰은 단 두 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였고, 두 장 모두 한국 인디씬의 명반으로 일컬어진다. 필자는 2집 발매 소식을 듣자마자 예약구매를 질렀고, 자주 듣지는 않지만 아직도 아끼는 앨범 중에 하나이다.
할로우 잰의 음악에 매력을 느낀 여러분들을 위해 부록에 2집 공연을 슬쩍 넣어두도록 하겠다.
이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들을 전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귀가 피곤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조금 조용한 곡으로 쉬어가도록 하자. 어쩌다 보니 포스트록 잔치가 되었는데, 그 밴드들의 선배 격인 밴드이며, 나는 해체 후 10년 만에 재결합해 낸 앨범으로 뒤늦게 유입되었다. 소위 슈게이징 3대장 중 하나로 불리며, 이 슈게이징 장르는 밴드가 공연 중에 자기 발 끝만 보면서 연주하거나 발치에 있는 이펙터만 만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상으로는 포스트락이나 슈게이징에 대해 일천하여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그저 우연히 들어봤는데 차분하니 좋아서 추천한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앞의 슬로우다이브와 같은 슈게이징 3대장이면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한 My Bloody Valentine(이하 마블발)이다. 나도 많이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노이즈를 주제로 한다면 마블발을 빼놓을 수가 없다. 마블발은 내가 아는 밴드 중에서 노이즈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밴드이다. Loveless앨범이 명반으로 알려져 있고, 그중 When You Sleep이 많은 사람들이 꼽는 명곡이며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곡은 부록에 넣어두도록 하고 왜 노이즈 하면 마블발인지 라이브 영상을 감상해보자.
솔직히 영상을 봐서는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오고 이해도 안 된다. 아마 소리로 몸을 때리는 느낌일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아니면 로스코의 빨갛고 커다란 네모모양 그림을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런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이크도 소리를 다 담아내지 못하기에 공연에서 한번 경험해보고 싶기는 하다.
이번 호에 올라가지 못한 곡들을 부록에 차곡차곡 쌓다 보니 옛날 게임잡지처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형상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곡을 추천이라도 해보겠나 싶어서 꾹꾹 눌러 담았다. 본편에서든 부록에서든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당신만의 보석 같은 곡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으로 추천을 받는 것 또한 매우 보람찬 일이니 글에 대한 의견, 이견, 추천 모두 환영한다.
관련 없는 이야기 한 가지.
"소년과 음악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 소음보모(Noisesitter). 언젠가 친구가 트위터에 밴드 이름을 하나 생각했다며 올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밴드를 하게 된다면 그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우리 밴드 이름으로 해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소년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진 지금까지도 이 이름은 쓰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아니라면 또 어떤가, 나는 아직도 그 꿈을 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