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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Oct 19. 2020

[장문장] P와 도벽

0.

P는 외로움을 진열해두었다.


1.

 2000년대 초반에는 영어캠프가 유행했다. 중학교 방학 2~3주를 활용하여, 숙식을 함께하고, 외국인 영어교사가 통솔하고,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며, 비용은 10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다양했고, 비용이 높을수록 교사들의 피부색이 밝아졌다. 교육 분야에 있어 한 때 반짝했던 유행들이 늘 그렇듯 대부분의 영어캠프는 한참 졸속이었다. 자격 없는 교사와 허술한 관리, 자유를 탐하는 청소년이라는 삼박자가 모인 영어캠프는 방탕과 타락의 생츄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P는 짧게 유행한 영어캠프의 희생자였다. P의 어머니는 아들을 극심하게 아껴서, 비행기를 태워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외국에 보내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강사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된, 그러니까 가장 비싼 영어캠프에 P를 집어넣었다.

 P는 친구를 아주 신중하게 고르는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P에게는 인간에 대한 취향이 있었다. P의 친구들은 예의 바르고, 목소리가 크지 않고, 자기 팔다리의 위치를 잘 감각하는 아이들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P에게 영어캠프는 너무 좁은 풀이었고, P는 반나절만에 이곳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영어캠프의 아이들은 시끄럽고, 뛰어다니며, 자기 몸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것들이었다. 분명 학교였다면 멀리 했겠지만, P는 입맛이 까다로운 주제에 외로움을 많이 탔다. P는 어쩔 수 없이 경박한 존재들과 친하게 지냈다. 외로움은 P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되었다. P는 내가 이런 애들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고, P는 그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다녔지만 누구의 이름도 외우지 않았다.

 영어캠프는 호텔인지 모텔인지 수련원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름은 호텔이고, 시설은 모텔인데, 건물 끝에서 긴 복도를 지나면 교실이나 강당, 운동장 같은 것들이 나왔다. 심지어는 급식소도 있어서 아이들은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호텔 옆에는 작고 낡은 마트가 있었는데,  중년의 머리가 벗겨지고 뚱뚱한 사장이 홀로 힘겹게 카운터를 지켰다. 소년들에게 CCTV 하나 없는 구멍가게는 군침이 도는 먹잇감이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이 조금씩 군것질 거리를 훔쳐왔고, 무용담을 펼쳤으며, 지고 싶지 않은 다른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도둑질을 해본 적이 없다는 P에게 앞니가 유난히 튀어나와있던 아이가 물건을 소매에 잽싸게 넣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P는 라이터나 담뱃갑 따위로 앞니의 눈에 찰 때까지 연습을 해야 했다.

 1개를 사고 1개를 훔친다. 도둑의 규칙은 간단했다. P는 아이스크림을 샀고, 소매 안에는 트윅스 초코바가 들어있었다. 마트를 나오니 바람은 쌀쌀했다. 눈앞의 4차선 도로에는 드문드문 차들이 빠르게 달렸다. 아이들은 교실로 뛰어올라가 훔친 것과 산 것을 한 곳에 쏟아내고는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P는 조금 뒤처져서 올라가 그 열기를 꽤나 오래 바라봤다. 광경은 점점 멀어졌고 복도의 불은 꺼졌으며 P는 홀로 남았다. 그 뒤로 P는 혼자 다녔다. 빈 복도, 빈 교실, 빈 계단이 익숙해지도록 혼자였다.


 영어캠프가 어땠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P는 "수준 낮은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처음으로 도둑질을 해봤다"라고 말했다. P의 어머니는 쓰러질 듯 괴로워했고, P가 영어캠프를 싫어했던 것이 유치하게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영어캠프를 증오했다.

 P는 영어캠프 이후로 도둑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삶을 살았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도덕적인 혐오감이 든 것은 아니었고, 그저 도둑질은 그에게 아무런 감동도 흥밋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런 P가 다시 도둑질을 시작한 것은 10년은 지나고 나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이었다.   

 

2.

 P의 좁은 집에는 3층짜리 유리 장식장이 있었다. 가정집에 하나쯤 있을법한, 아버지의 오래되고 독한 술이 들어찰만한 장식장이었다. 예전에 P의 집에 왔을 때,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내 이목을 끌었던 것은 가장 첫 행 첫 열에 자리 잡은 건 머스터드색 양말이었다. 서울숲의 은밀한 편집샵에서 호기롭게 내놓은 시즌 아이템처럼 양말은 잘 접힌 채로 당당하게 놓여있었다. 그때 P는 수집품이야, 하고 웃었다.


 그 날은 어느 결혼식의 답례품으로 받은 와인을 들고 P의 집을 찾았다. P가 바쁘게 적당한 안주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찬장을 뒤지면서 와인 오프너를 찾았다. 이리저리 손에 닿는 것들을 잡다 보니 금방 익숙한 것이 잡혔다. 촉감만으로도 와인 오프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1년이 넘도록 썼던 것이니까.

P의 집에는 내 와인 오프너가 있었다.


 내 손에 검정색의 단단한 와인 오프너가 들렸다. 그 와인 오프너는 1년 전 한강에서 와인을 마셨을 때 들고 가서는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때의 낭패감은 아직도 선명했다. 내가 오프너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들고 온 와인을 딸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 가서 싸구려 오프너를 샀기 때문이다. 더 보태자면 그 싸구려 오프너가 이질적으로 튼튼한 나머지 아직까지도 그 못생긴 걸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P가 나와 함께 편의점에 가주었다.

 내가 가만히 와인 오프너를 들고 있으니 P가 와서는 식탁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야, 와인 오프너 꺼내놨는데. P는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식탁에는 흔한 와인 오프너가 하나 있었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5천 원짜리 싸구려 와인 오프너 말이다.


 미안해. 설명할게.

 P는 인질을 구하듯 조심스럽게 내 손에서 와인 오프너를 가져갔다. P는 투명한 유리문을 열어 진열장 두 번째 행에 내 와인 오프너를 두었다. 생각지 못했던 빈칸이 그제야 채워졌다. 진열장 3개 층마다 널찍하게 서너 개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진열장은 오래된 상설전시처럼 낡고 자연스러웠다. 혹은 전사자의 유품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P는 싸구려 오프너로 준비한 와인을 열었다. 앉은뱅이 테이블에는 큐브 치즈와 청포도인지 샤인 머스켓인지가 안주로 올랐다.

 나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았고, P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마치 오늘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듯 경청했다.


3.

 훔쳐야 하는 순간이 있다. 물건을 가방 안에, 소매 안에, 주머니에 살며시 집어넣어야만 하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충동이었고, 질병이었다. P는 도벽이 있었다. 다만 P의 도벽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일반적인 도벽 환자들은 훔치기 직전의 강렬한 스트레스와 훔친 직후 찾아오는 안도감을 갈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명품지갑이든 식당의 수저든 구분하지 않고 훔친다. 하지만 P의 충동에는 명백한 목적이, 그러니까 진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P가 처음 훔친 것은 머스터드색 양말이었다. 멋진 양말에 취미가 붙은 친한 선배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새벽까지 놀다 택시를 탔고, 다음날 아침 가방에 든 양말을 본 P는 온몸의 구멍이 진흙으로 막히는 것만 같은 폐쇄감을 느꼈다. 양말을 훔치던 그 순간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두꺼운 면의 촉감은 질척하게 손에 남아 떨어지질 않았다. 아주 아주 오래된 기름때처럼.

 고통스러운 며칠이 지났다. P는 결국 양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P의 선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양말이 없어진 줄도 모르거나, 그날 집에 방문한 사람들을 의심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느슨해. 타인을 경계하는 사람은 특히 더 그래. 내가 자기 물건을 가져갔다고는 상상도 못 해. 그게 재밌긴 한데, 중요한 건 아냐.

 P는 양말을 신발장 위에 눈에 잘 띄게 올려놓았다. P는 아직 자신의 도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에 붙여놓듯이 눈에 잘 띄는 곳에 범죄의 증거를 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훔친 물건이 4개가 되는 데는 1년이 걸렸다. 옅어진 죄책감과는 별개로, P는 4개의 증거를 두고 도벽의 경향성을 분명하게 읽었다. P의 도벽은 가장 행복할 때 발작했다.

 P는 가끔 영어캠프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몰입이 깨지고 혼자가 되어야 했던 그 순간을 되뇌었다. 그날 소매에 숨긴 트윅스는 P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P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은 것이었다. 영어캠프에서는 모두가 무언가를 훔쳤다. 그만이 아무것도 훔치지 못했다. 어린 P는 영어캠프 아이들과 다르게 존재하는 자신을 자각했다. P는 그때 느꼈던 괴리감의 정체를 그제야 알아냈다.

 그런 점에서 양말은 P의 첫 도둑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 P는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막으려는 의지도 없었다는 점에서, P는 자신의 도벽을 받아들여 하나가 되었다. 그때부터 P의 도벽은 질병이 아니었고, 도벽의 증거는 수집품이라 불렸다. P는 유리로 된 3층짜리 진열장을 샀다.


 집에 있으면 외로워. 혼자 있으면 여튼간에 외롭단 말이야. 가끔은 외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워. 하지만 알잖아, 나는 그렇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니까. 그래서 외로움에 잠겼다 가까스로 빠져나오면 진열장 앞으로 기어가. 그건 내가 외롭지 않다는 증거야. 이 빠져 죽을 것만 같은 외로움이 실은 환상이라는 말이야. 나는 물건을 훔치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태의 기억, 온도, 감상을 가져온 거야. 물건을 훔쳐오긴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P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아는 P는 말수가 적고 조심스럽고,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나는 차분하고 사려 깊은 인간이 동시에 외로움을 도벽으로 채우는 인간일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받아들이려 했다.


마무리

 가져가려면 가져가. 네 거니까. P는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P는 내가 관계를 끊는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와인 오프너를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P에게 누가 이걸 아냐고 물었고, P는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P에게 진열장 첫 행 첫 열의 머스터드색 양말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P는 주저했지만 이내 있을 수 있는 가장 우호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양말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양말을 받아 들었다. 답답하던 마음이 확 풀어져 나왔다. 나는 양말을 들고 P에게 말했다.

 너는 진짜 또라이야. 진열장 1번은 계속 비워놔.


 막상 양말을 받으니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양말을 계속 손에 들고 있을 수 없어서 얼른 가져온 에코백에 집어넣어버렸다.

 여튼 양말은 좀 그래. 그러니까, 주인이 남자였든 여자였든. 둘 다 별로야. 내가 말했다.

 거기서 양말을 빼고 생각해. 양말이지만. P는 안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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