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동안 달마다 코엑스를 방문했다. 주로 2호선 삼성역 6번 출구를 이용했다. 유동인구가 많아 후다닥 지나가기 마련인 그곳에 빨간 재켓을 입고 한 손엔 빅이슈 잡지를 손에 든 빅판(빅이슈 판매자)이 계셨다. 살까 말까 고민만 하며 몇 번 지나치다 한 날은 '이번엔 사보자' 마음 먹고 빅판에게 다가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멀리서부터 '저 그쪽으로 갑니다~'라고 티 내고 가는 게 민망해서 지나치는 척 가까이 가서 몸을 홱 돌려세웠다.
'잡지 하나 주시겠어요'라고 말하자마자 '카드로도 결제됩니다'라는 말을 건네셨다. 앞에 '카드 결제 가능' 판넬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카드지갑을 손에 쥔 채로 다가간 상태였지만 '아 그래요? 카드 결제할게요'라고 말했다.
영수증이 카드 결제기를 통과하며 둥글게 말려 나오자마자 이를 얼른 낚아채 내 카드 위에 올려 손가락으로 한 번 피시곤 두 손으로 건네셨다. 생각지 못하게 너무 정중히 주셔 나도 모르게 '아 네네'라고 말하며 카드를 받았다.
그 정중한 기억과 더불어 특히 삼성역 빅판분이 기억에 남는 건 그 분의 글 때문이었다. 잡지를 펼치니 복사된 종이가 껴 있었는데 자작시와 짧지 않은 글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빅판분들이 자기 글을 실은 이달의 특별 이벤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잡지를 살 때마다 빼곡히 글이 쓰인 종이가 있었다.
언뜻 보면 이런 폰트가 있었나? 생각이 들 만큼 깍듯하고 촘촘히 쓰인 글이었다. 마무리는 항상 감사하는 내용인데 이를 읽고 있자면 5000원으로 좋은 사람인 척 해보고 싶던 알량한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재활용품을 버릴때 잡지는 쉽게 버리지만, 그 종이는 따로 빼서 몇 번은 더 읽게 된다. 약간씩 바뀌는 포맷과 종이 분량에 딱 맞게 쓰인 글을 보면, 이 한 장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셨을 과정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쉬이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삼성역을 갈 일이 없다 한 번 들렀더니 빅판분이 보이지 않았다. 근무 시간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코로나 때문에 잠시 쉬시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자리를 옮기신 걸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건 마음이 안 좋았다. 글 잘 보고 있다고 한마디 해드릴걸. 그 어떤 잡지 섹션보다 본인의 글씨체를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전하지도 못했구나라는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특히 글을 쓰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응원과 감상이 얼마나 크게 와닿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한동안 삼성역은 가지 않다 선릉역을 갈 일이 있었다. 삼성역은 선릉 다음이지만 10분 정도 여유가 있어 혹시나하는 마음에 들렀다. 반갑게도 그 빅판분이 서 계셨다. 시간이 타이트해서 달려가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인파들과 비슷한 속도로 걸으며 다가갔다.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icebreaking엔 젬병이지만 이번엔 꼭 말하자 마음먹었다.
'근데 잡지에 종이가 끼워져있던데 직접 쓰신 거에요?
'아 네... 예전부터 썼어요. 뭐 내용은 별거 없고... '
'글씨가 엄청 예쁘시더라고요'
'아니 뭐 밤에 쓰느라 글씨도 점점 이상해지고 그래요'
'글 잘 보겠습니다'
쓰고 보니 몇 줄 되지만 실제 대화시간은 체감상 10초도 되지 않았다. 나도 이런 대화는 너무 어색해서 대화한다기 보단 내 말을 내뱉고 왔다. 빅판분은 이번엔 양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꾸벅 인사를 하셨다. (여담이지만 검색해보니 이미 단골까지도 있다는 유명한 빅판이셨다)
한껏 뿌듯해진 마음에 잡지를 옆구리에 꽉 끼고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약속장소를 한 정거장 지나쳐가며 그분을 찾아갔던 것도, 내가 그분에게 꼭 말을 건네야겠다 마음먹은 것도 사실은 내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서였다.
그 행위가 그 분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일인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그럼 그것만으로 족한 것인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빅이슈 매거진 자체도 마찰이 있었고 빅판분들의 삶의 실질적으로 나아지고 있는지 의구심도 든다. 내가 그 속사정을 파헤칠 순 없으나 최소한 자립을 돕고 싶은 많은 사람의 선의가 훼손되지 않아야할텐데... 잡지를 살 때마다 생각한다.
그런 생각도 잠시, 집에 오자마자 잡지포장지를 뜯고 후루룩 페이지를 넘기며 종이부터 찾았다. 글씨가 이상하다 하셨지만, 여전히 정갈한 글씨체였다.
글을 읽고 나니 마음이 다시금 따뜻해졌다 가라앉았다. 이 빅판분은 앞으로도 꼭꼭 눌러쓴 글씨만큼이나 단단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실 수 있을까. 이 잡지가 폐간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전에 쓰신 글들로 그분의 이력을 만들어 드릴 순 없을까. 별지가 아닌 잡지에 정기적으로 이분의 글이 실렸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럼 격주로 발간해야 하는 빅이슈 기자들은 소재를 얻고, 의지 있는 빅판분들은 컨텐츠 제작 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어떤 형태든 나의 창작물을 만드는 건 힘들지만 보람된 일이다. 이 과정은 빅판분들의 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정서적 자립에도 기여할수 있다. 구매자 입장에선 잡지엔 사회적 의미가 있는 잡지를 샀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게 될 것 있다. 겪어보니 내가 읽은 인쇄물의 저자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경험이다.
물론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내용만 담아 자칫 고루해지길 원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게 그런 취지의 잡지였어?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밌었으면, 그래서 구매의 목적이 '선의'에만 그치지 않길 바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머리가 복잡하다. 잠시 모두 멈추고 빅판분의 글을 몇 번 읽었다. 때론 꼬리를 무는 계산을 접어두고 온전히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당신의 오늘을 응원한다는 그 흔한 문장이 왜 이리 마음이 쓰이는 지 모르겠다. 그 분이 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어딘가에서 깊은 응원을 받으시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