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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Nov 09. 2020

[장문장]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날 때

어리숙한 남성을 위한 소개팅 백서

0.

세상은 감옥이다.

하지만 열쇠가 있다면 감옥도 집이 될 수 있다.

사랑이 바로 그 열쇠다.

- 영화 마틴 에덴에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날 때

나는 보았다. 내가 아는 가장 성실하고 선량한 인간조차 소개팅에서는 이상한 짓을 하고야 마는 것을.

이 문서는 도저히 소개팅이 익숙해지지 않는 남성들을 위한 가이드다. 주변의 다양한 피해사례와 원칙주의자 필자의 소개팅 원칙을 기초로, 소개팅의 동작원리와 그 실천을 논하고자 한다. 이 문서는 철저하게 남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자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이처럼 성별로 입장을 구분하는 이유는, 소개팅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장 성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개팅은 전혀 현대적이지 못하게도, 남녀의 역할이 지나치게 명확하게 구분되어있다. 아무리 주도적인 여성이라도 소개팅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벗어던지기 어려우며, 아무리 과묵한 남자라도 힘을 내서 주도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소개팅에서 암묵적으로 정의하는 남성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연락하는 등 연락을 주도한다.

첫 만남에서 결제를 한다.

(원한다면) 에프터를 신청한다.

반대로 여성의 주도적인 행동은 철저하게 제한된다. 위에 적힌 남성의 의무들은 여성들에게는 반대로 금기에 가깝다. 첫 만남에서 더치페이를 한다면 명확한 거절의 표시다, 라는 공공연한 말이나, 여자가 에프터를 신청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이 블라인드 같은 커뮤니티에서 왕왕 보일 만큼 소개팅에서 여성은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소개팅이 구시대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일회성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성역할을 극복하려는 진보적인 실험을 하기에 소개팅은 너무나 생경하고 불편하며 단발적이다.

이 문서는 소개팅의 명확한 성역할을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의 입장에서 성역할을 전적으로 수용하며 어떻게 그 역할을 잘 해낼 것인가를 다룬다. 이런 진보적이지 못한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는 앞서 비판한 구시대성이 사실은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시대상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문서는 남-남 혹은 여-여 소개팅에 있어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불안을 최소화하는 커뮤니케이션

소개팅은 면접과 거의 같다. 합격만 하면 슬금슬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다닐 거지만, 일단은 깔끔한 면접복장을 갖추고, 좋은 인상을 주고받기 위해 노력하며, 평가받고, 평가한다. 이 필수 불가결한 과정은 서로에게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불편함과 어려움을 줄이는 커뮤니케이션은 소개팅의 성공률을 높인다.

따라서 이 문서는 소개팅 과정에서 여성의 불편과 불안을 최소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제시한다. 아래 가이드는 남성이 소개팅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움받는 상황만은 방지할 것이다.

호감을 사는 것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실천 가이드

소개팅의 시계열적 구성은 주선-사전 연락-만남-에프터로 나뉜다. 주선 이후 연락처를 받는 그 순간부터 소개팅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문서는 사전 연락부터 에프터까지 과정을 시계열 순으로 훑으며 가이드할 것이다.   


1. 연락처를 받은 날 연락한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본인의 연락처가 상대방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즉 그때부터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기대의 여부와 관계없이, 연락을 기다리는 상태가 되는 것은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락처를 받은 당일 내에 연락을 하는 것은 상대의 신경을 갉아먹지 않는 좋은 태도다. 혹시 연락처를 늦게 받았다거나 시간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미리 주선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틀 내에는 무조건 연락한다.     

늦은 첫 연락은 마치 첫 만남에 지각한듯한 나쁜 인상을 남긴다.


2. 퇴근이든 식사 여부든 일상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사는 곳과 직장을 물어본다. 

첫 연락은 약속을 잡기 위한 연락 이어야 한다. 따라서 대화의 결론은 "언제 어디서 뵙겠습니다", 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매우 신속하게 끝나야 한다. 아이스브레이킹(잘 안 되지만) 차원에서 수업/일은 마쳤냐, 식사는 했냐부터 시작해서 직장은 어디냐, 어느 지역에 사냐로 넘어가고, 적당한 중간지역을 찾아서 그럼 "~~쯤에서 보면 괜찮겠네요" 정도로 대화를 끌어나간다.


3. 식당은 웬만하면 예약 가능한 곳으로 한다. 

혹시 만나기로 한 지역이 내가 생전 처음 가본 곳이라면, 내가 네이버 검색으로 찾는 곳은 웨이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30분씩 서있기 싫다면 반드시 식당은 예약 가능한 곳으로 정하자.


4. 약속은 연락 2~3일 내로 잡는다. 

직장인이라면 저녁에만 연락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화를 잇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2, 3일 이내에는 시간 장소를 정한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모든 것이 정해졌다면 대화를 끝마친다. 만나기 전 대화가 길어지는 건 대체로 독이다.


5. "만나기 전날에 다시 한번 연락드릴게요",라고 이야기하고 대화를 종료한다. 

만나기 전날에 다시 연락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매너다. 세상에는 온갖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서 당일에 파투를 낸다던가, 바람을 맞힌다던가 하는 일이 가끔 생긴다. 전날에 연락을 한다고 약속을 하면 상대방을 안심시켜줄 수 있고, 더 나아가 대화를 자연스럽게 종료할 수 있다.


6. 옷은 무난하게 입는다. 

만약 고유의 스타일을 지키고 싶다면 미리 말하자. 앞서 말했다시피 소개팅은 면접과 같아서, 패션으로는 감점도 가점도 노리지 않는 편이 좋다. 본인이 스타일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슬랙스에 셔츠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확고하다면 미리 어떤 스타일로 입고 갈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다. 간혹 프로필 사진에서 이미 독특한 스타일이 티가 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예고라도 해준다면 상대방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복장은 남성성의 어필 이상으로 정성을 의미한다. 정성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7. 약속 전날 연락한다. 

짧게 약속을 확인하고 내일 보자 빠이빠이 하면 된다.


8. 약속 장소에는 10분 전에 도착한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는 것을 행하는 자라고 했던가.


9. 에프터를 잡으려면 바로 잡는다. 

에프터는 헤어지기 전이나 헤어지고 집에 들어간 직후에 잡는다. 에프터를 할까 말까 하면서 며칠을 허비한다면 그동안 상대방은 단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기대를 눌러 죽이고 호감을 부정할 것이다.     

에프터를 하지 않으려면 "오늘 즐거웠습니다" 정도로만 인사하고 끝낸다. 모든 예절과 관례를 떠나서, 끌림이 없다면 한 번만 보는 게 서로에게 좋다.


정리

이 몇 가지 사소한 규칙을 지키면 상호 간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남성 입장에서는 적어도 첫 만남 이전에 감점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의 가이드가 수동적인 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필자를 계속 불편하게 한다. 여성의 수동성, 남성의 적극성은 마치 슬랙스에 셔츠를 입은 무난한 패션과도 같다. 개성을 숨기고 고전적 스테레오 타입을 따르는 것이다. 스테레오 타입을 흉내 내는 것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이는 섣불리 판단당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 기원한다. 수비적인 자세다. 남성의 적극성이 수비적인 자세의 발로라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여성이 수동적이니까 남성이 적극적이어야 한다- 같은 인과가 아니라, 그저 오래된 남녀관을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구시대적인 소개팅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수비보다 공격을 지향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나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나를 보여주는 태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굳센 자존이 필요하다. 모든 이에게 굳센 자존을 요구하는 건 너무 엄격한 태도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되지 않는 한 소개팅은 앞으로도 구시대적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남-남 혹은 여-여 소개팅에 대해 궁금해지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인간의 만남이 아닐까-라는 미지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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