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달글 Oct 01. 2020

[미스트] 소개로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소개팅이 들어왔다. 내 생의 두 번째 소개팅, 잔잔한 일상에 변수가 생겼다.


첫 번째 소개팅은 몇 달 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보다 화장도 열심히 하고 옷도 신경 썼다. 일찍 퇴근해보겠다며 인사를 하니 평소 말수가 적은 상사분까지 잘 만나고 오라는 응원을 해주셨다. 그런데 비가 오는 바람에 지하철로 사람이 몰렸고 상대방은 20분을 늦고 말았다. 약속을 정할 때부터 우여곡절들이 있었는데 당일까지 이러니 만남 전부터 속이 상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의 이름을 말하며 식당 2층 예약석에 앉아 기다렸다. 나와 카운터 직원 둘만이 채운 실내는 적막했다. 가게나 볼 양으로 고개를 돌리면 주문인가 싶어 휴대폰에서 다급히 내려놓는 게 느껴졌다. 직원과 마주치는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사람 구경을 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지 않으려 한껏 웅크리고 우산을 진행 방향으로 들이미는 사람들보다 유리창에 비친 내가 더 처량한 기분이었다.


'그래 비가 많이 오잖아. 이건 그쪽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스스로 달래보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난 혹여 늦을까 봐 네이버 지도로 도착 시간을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을 확인했는데...

너무 일찍 와서 근처 카페에 있다가 이곳을 왔는데... 난 대체 무얼 위해 이 노력을 했을까.

막상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사정을 듣다 보니 뾰로통했던 마음은 금세 사라졌지만, 결론적으로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직전이 이래서인지 소개팅이 마냥 설렐수만은 없었다. 그때보다 코로나는 더 심해졌고 연애는 하고 싶으면서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연애가 시작되면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중학생 때 놀이공원에서 신난다며 롤러코스터를 주구장창 탔던 다음 날 결국 몸살이 났다.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서 수업이고 뭐고 책상에 엎드려 있다 양호실에서 종일 몸져누웠다. 소개팅은 끔찍한 몸살을 안겨준 놀이공원 입장권을 사는 것이다. 덜 아프고 더 즐겁길 바라면서.


이런 얘길 하면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 / 사람은 일단 많이 만나는 거다. 가볍게 만나봐라 / 그냥 연애하지 마라

반응도 다양하다. 그러다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소개팅 제안에 고개를 끄덕했고 코로나가 2.5단계이고 또다시 날이 흐렸던 어느 날 첫 만남을 가졌다.


이번에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을 했다. 오랜만에 손이 닿은 색조 화장품과 브러시들이 영 어색했다. 퇴근 시간부터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집에 가서 옷도 갈아입었다.


유난이다 싶지만, 특히 소개팅의 첫 만남은 상대방만큼 주선자도 신경 쓰여 더 힘이 들어간다. 일단 신경 써서 마련해준 자리니 나도 할 수 있는 한, 주선자가 욕먹지 않게 준비하자 마음먹게 된다. 과하려나 싶어 손을 멈추면 이미 평소보다 훨씬 과한 내가 되어 있다. 알아줄 이 없는 작은 일에까지 온 힘이 들어가는 내가 미련하면서도 그것까지 좋게 봐줄 사람을 만나길 내심 기대한다.


나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과 만난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다. 그 사람의 외모, 특유의 습관, 말투, 목소리 그 자체가 새로운 자극이다. 본래 내 정신의 스펙트럼이 모자이크처럼 큰 조각모음이었다면 이 조각이 잘게 부서져 새로운 색이 등록된다. 어색함과 긴장감에 평소보다 톤이 높아지고 말에 두서가 사라졌다. 음식이 맛있어 다행이었다. 입을 막고 있을 시간이 좀 더 늘어났으니 말이다.


이후의 카톡은 애처로울 만큼 신경이 쓰인다. 점을 찍을까, 이모티콘을 보낼까, 느낌표를 찍을까. 그렇게 이모티콘을 보내고선 괜히 보냈군 싶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혼자 뭐하냐 싶은 현타가 와서 한숨을 쉬었다. 글로만 느껴지는 설렘도 있지만, 글로는 전달되지 않는 고심의 흔적이 있는 법이다.


연애가 운전이라면 한 명은 운전대를 잡고 한 명은 조수석에서 갈 곳을 알려줘 한다. 하다 힘들면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쉬다 갈 곳까지 있다면 먼 곳도 갈 수 있다. 그러나 둘 다 운전대를 잡으려 하면 사고가 날 것이고 둘 다 조수석에서 앉으면 시동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시동은 걸리지 않았고 끝났구나 싶은 순간이 왔다. 다음 날 카페에 가서 차이 밀크티를 시켰다. 알러지가 있다는 검사 결과 이후 우유는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좀 따뜻하고 맛있는 게 먹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창가에 앉아 나를 돌이켜본다.


난 사람을 좋아하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되는 편이다. 소개팅은 세 번 정도 만나고 사귈지 결정하는 게 국룰이라는데 그게 가능할까 싶다. 이토록 어색한 방식이지만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기에 기회가 닿는 한 최대한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튀어나오는 평소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을 생각하면 흑역사만 추가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나른한 하루에 더해진 작은 설렘이 좋았다. 어쩌다 카톡이 와있으면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짧은 텍스트에서 느껴지는 상대방의 감정을 추론할 때면 저속으로 위아래로 움직이며 도는 회전목마를 타는 기분이 들어 재밌었다.


끝까지 본 로맨스 드라마래야 고등학생 때 본 '궁'이 고작이고 영화 '무간도'를 재탕하는 나지만 설렘은 그만큼 소중하다. 그러다 놀이공원  폐장시간이 되어 집에 갈 때가 된 것이다. 에버랜드에서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놀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때의 기분이 온 마음을 감쌌다. 설렘과 긴장감 끝난 뒤의 허무함이 뒤섞인다.


기분이 가라앉으려는 찰나 그만 생각하자 밀크티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각보다 씁쓸한 뒷맛을 느끼며 요 몇 주를 되짚어본다.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새로운 색이 생겼다. 나를 돌이켜 봤고 2000자를 넘길 만큼의 경험이 쌓였으니 이 또한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문장]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