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도착한 그녀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을 적신 분홍 노을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한동안 멈춰있었다. 겨울바람은 기억을 머금고 그녀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눈을 감고 추억으로 도망치는 건 그녀의 유일한 낙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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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연필들을 바라보다 가장 짧은 몽당연필을 집었다. 쪼그려 앉아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던 그녀가 그를 흘끔 바라봤다.
“뭐 그리고 싶어?”
“비밀이야”
밥그릇에 어느새 도착한 고양이에게 ‘비밀도 많다 그치?’ 하며 애교 섞인 약간의 비아냥을 표했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는 그녀의 생각보다 막힘없이 이어졌다. 몰래 무얼 그리나 보려고 했지만, 그는 틈을 주지 않았다. ‘완성되면 보여줄 거야?’라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와 그의 작은 방 한편에는 여러 그림이 붙어있었다. 물론 화가인 그녀의 그림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이사이에 형편없는 그의 그림 몇 개가 걸려있었다. 모두 그녀를 그린 그림인데 그녀와의 공통점은 눈, 코, 입이 있고 머리카락이 길다는 정도 외엔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아래에 본인의 싸인과 그녀의 이름 ‘이라’는 빼먹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유명해지면 팔아야지 자기야’ 장난스런 말도 함께.
사각거리는 소리가 어느새 멈추고, 그는 테이프를 돌돌 말아 벽에 그림을 붙였다.
“이제 봐도 돼?”
“응. 제목은 ‘바람이 분다’ 어때?”
그림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산발처럼 삐친 머리모양을 하고, 동그란 언덕 위에 그려진 나무 한그루 외에 별다른 건 없었다.
“바람이 어딨어?”
“여기, 자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거 그린 건데?”
그녀는 웃음이 터졌고, 그도 따라 웃었다.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에는 여전히 그의 싸인과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짧은 글귀가 보였다.
‘너에게 닿을 바람은 모두 따듯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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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은 작은 언덕의 산책로조차 험한 길로 만들었다. 찬 바람은 그녀의 입김을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항상 함께 쉬던 돌담과 옆에 ‘Strawberry hill’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흐릿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곧 도착한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큰 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그를 떠난 지 보름이 지났을까. 점점 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이 오기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모른 채, 그녀가 선택한 건 이별이었다.
화가인 그녀에게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건 살아있는 죽음이었다. 이별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살고 싶다는 그녀의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언덕의 정상에 도착하자 흐릿한 시야로도 완벽한 풍경이 그녀의 눈에 담겼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따듯한 바람이 불었다.
“이라야”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