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 글쓰기가 내게 미친 영향
글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작년 5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1000자 이상짜리 글을 쓰고 있다. 2월에도 성공적으로 글을 올리게 된다면 10번째 글이 된다. 이 문단을 쓰는 순간조차 이번 달은 글을 올리지 못할 것 같은 무거운 마음이 든다. 이런 와중에 글을 써가는 소감을 쓴다는 게 쑥스럽지만 지금까지 느낀 바를 풀어내 보려 한다.
이과생인 나에게 이런 사적인 글쓰기는 이례적인 경험이다. 길이감이 있는 글은 과제같이 강제성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좀 더 거슬러 가면 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이던 시기, 그때만큼은 나도 감정적이고 자발적으로 일기를 썼다.
안타까운 건 그렇게 쓴 대부분의 글은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울분에 찬 상태여서, 글을 쓴다기보단 욕지거리를 쏟아내는데 가까웠다. 내 글씨가 쓰이는 것조차 아깝다 생각할 만큼 아끼던 파란 다이어리에 정작 담긴 건 다시 보기에도 아픈 내용인 게 아이러니하다. 좀 더 커서 그 다이어리를 찾으려 했으나 이사 중에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좋았든 나빴든 나의 기억인데 잃어버린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이렇게 '내 글'이랄게 별로 없다 보니 어쩌다 과거에 남긴 기록을 만나면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얼마 전 파일을 정리하다 입사 직후 교육 중에 썼던 글들을 몇 개 읽었는데 내 PC에 있지 않았다면 내 글인지도 모를 만큼 낯선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무채색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글을 잘 썼다 못 썼다를 떠나 이런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이젠 내 기억과 기록들을 잘 관리할 수 있게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USB나 메일함 어딘 가에 있던 내 파일들도 클라우드로 옮기고 드문드문 생각나는 문장이든 생각이든 심지어 그날 했던 운동도 Notion에 남겨둔다. 아직은 조각난 내 모습들이 꽃가루마냥 흩어진 모양새다만 좀 더 요령이 생기면 앞으로의 기록만큼은 정갈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전에도 내 자료들을 정리하려 시도를 했다가도 이것 또한 꾸준키가 쉽지 않았는데, 글을 쓰기로 계획하면서 기록의 중요성도 주기적으로 상기되다 보니 이젠 제법 윤곽이 갖춰졌다.
쓰는 글의 주제에 상관없이 글을 쓰는 동안의 감정의 변화를 관찰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생각을 활자로 옮기면 내 마음마저 전이된다. 그럼 내 감정의 진폭이 서서히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아주 슬펐던 때든 기뻤든 때든 조금 진정이 된다.
지난 10개의 주제를 생각하는 동안 어떤 날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떤 때는 나를 위로할 양으로 문장을 썼다 지웠고, 어떤 달은 뭘 써야 할 지 몰라 조급함마저 느꼈다. 그래도 신기하게 글을 올릴 때쯤엔 담담하게 '발행'버튼을 클릭할 수 있었고 글을 업로드하고 나면 안도감과 후련함이 몰려왔다.
머신러닝에는 데이터 Normalization이라는 과정이 있다. 특정 데이터가 AI 모델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적정한 크기로 맞춰주는 일종의 전처리(Pre-processing)작업이다. 이 단순한 과정이 모델의 성능을 좌우하기도 하는데 글쓰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살다 보면 나도 내 감정을 면밀히 관찰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알고 앞으로의 나를 알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조금 무정해 보여도 힘든 일도 기쁜 일도 한 발짝 떨어져서 내려다봐야 한다.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이를 처리해내기도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이 정리된다 해서 마음이 비어있는 건 아니다. 전이되고 희석된 만큼 내 마음의 공간이 생긴다. 그럼 그 공간에 새로운 마음이 들어선다. 그 물살은 기존의 것보다 정화되고 산소가 풍부해서 조금 더 나를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공개된 플랫폼에 글을 올리는 만큼 이런 개인적인 효용에서 조금 더 나아간 욕심도 생겼다.
나는 개개인은 고유하지만 나만 아는 감정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간직한 기쁨과 아픔을 똑같은 원인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느껴봤을 것이다. 고로 나와 완벽히 다른 타인이라도 누군가는 나의 경험과 감상을 통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애써 서툰 문장을 읽어준 이에게 내가 얻는 산소를 나누고 싶다.
그러자니 이왕이면 재밌게 아니면 유익한 내용을 써야 할텐데, 그래서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이며 글을 쓰냐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어진다. 확실한 건 무언가 꾸준히 쓰려면 그만큼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대로 쓰기도 하지만 쓰는 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쓸 지 더욱 신중해진다. 앞으로도 어떤 문장들을 쓸 지, 어떻게 해야 지속적으로 쓸 수 있을 지 고민해야겠다. 오늘 희석된 만큼 더 생생한 내가 되길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