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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여사 Dec 20. 2022

난 어쩌다 제3 국 몽키아리언이 되었나?

28년차 해외살이중

코로나로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의 28년 차 외국 생활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 나는 어쩌다 오게 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속 제3 국 몽키아라에 13년째 거주 중이다. (사실 몽키아라는 나라가 아닌 쿠알라룸푸르 속 외국인들이 모여사는 동네 이름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로컬과는 굉장히 다른 제3 국 같은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동네이기에 나라라고 명했다).


처음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남편의 직장에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사실 발령이라기보다 남편이 어떻게든 해외에 주재원으로 나가기 위해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말 그대로 삽질을 해서 얻어낸 기회이다.


2000년 남편이 말단 직원이었던 시절 말레이시아로 출장길에 따라가서 2주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예상외로 너무나 발전된 말레이시아의 모습에 반한적이 있었다. 물론 시내 한가운데 호텔에서 가장 좋은 모습만 봐서였겠지만 싼 물가와 화려한 도시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20여 년 전 당시에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는 그 당시 한국보다 훨씬 서양화되어 있었다.


그때 남편에게 "난 말레이시아에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얘기했었는데 그게 10년 후 현실이 될지는 사실 우리 둘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호주 시드니에서 15년째 생활중이었다. 다시 말해 남편은 한 글로벌 회사의 호주 지사에서 일하다가 말레이시아 주재원으로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말레이시아  발령은 우리에게는 축복이었다. 난 혈육 하나 없이 혼자(결혼을 하고 아이도 둘이나 있었지만 혼자 사는듯한 시간이었다) 15년의 호주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우리의 결혼생활은 내일 당장 와장창 깨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너덜너덜 해진 상태였다.


나의 호주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비자가 나오자마자 야반도주하듯 한 달 만에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년 계약으로 떠나는 길이었기 때문에 가구와 전자제품, 겨울옷 등은 모두 두고 아이들(그 당시 큰아이가 만 5세, 작은아이가 만 2.5세)의 옷과 부엌살림만 보냈다. 해외 이삿짐이 얼마나 없었는지 보통 주재원 발령이 나면 컨테이너를 쓴다는데 우리는 큰 이삿짐 박스 6개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한 달 만에 집 정리를 하고 놔두고 갈 것과 가져갈 것을 구분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혼자 그 짐을 다 정리하느라 몸살이 난 상태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급체와 두통에 시달리며 화장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도 보채는 둘째 아이를 무릎에 앉혀 달래면서 8시간의 비행을 견뎠다.


내 인생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새로운 나라에 간다는 설렘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도착한 나는 말레이시아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너무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도착을 했기 때문에 호텔에서 한 달간 생활하며 아이들 학교와 살 집을 구했다.


마치 동남아 리조트에 온 듯한 콘도(한국의 아파트 같은 개념으로 여기서는 콘도라고 부른다)에 한번 반하고 한국 백화점의 명품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쇼핑몰에 다시 한번 반했다. 게다가 호주 물가의 3분의 1 가격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니 이런 천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이들의 학교는 2년만 다닐 계획으로 왔기 때문에 최대한 집에서 가까운 (큰 아이가 유치원 Kindergarten에 입학할 나이였다) 미국식 국제학교로 정했다. 학교는 생각보다 작고 호주의 사립학교를 상상했던 나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외관이었지만 그 당시 말레이시아를 통틀어 가장 비싼 국제학교였고 집에서 5분 운전거리니 다른 학교는 우리의 옵션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입학시키고 말레이시아의 생활을 가장 럭셔리하게 보내고자 메이드를 구하고 주말에 쇼핑을 다니고 그렇게 말레이시아 생활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최대한 즐겨보자는 심보였다. 호주에서 개고생 한 15년을 보상받겠다는 심보였다.


호주에 사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는 줄곳 알바와 취직으로 내 밥벌이는 내가 하고 살았었다.


둘째 임신 5개월에 과부하에 걸려 사표를 내던지기 전까지 나는 육아, 임신, 회사, 집안 일등 감당도 안 되는 모든 일을 두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저글링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에 온 후 일, 육아, 모든 잡일에서 자유로와 지고 남편 잘 만난 여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놀고먹기를 했는데 그때는 한국사람 중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편인 내게(그렇다. 나의 눈물 나게 치열했던 15년 호주 생활에서 얻은 것 중 하나다)  의사 선생님이 병원에서 통역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 아니, 난 지금 일하고 싶지 않아. 나 놀고먹을래”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할 만큼 내 머릿속에는 호주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고자 하는 고약한 심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와 돌아보면 딱 그렇게 즐거웠던 2년만 만끽하고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그 이후로 3년을 더 놀고먹었다(남편은 2년에 한 번씩 계약 연장을 했다). 다시 일상에 익숙해지고 놀고먹는 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난 나의 소중한 30대 초중반을 허비하고 있었던 거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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