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인도에 머물며 가장 먼저 놀란 건
사람들의 집 거실, 부엌, 오토바이, 상점 구석구석마다 작은 신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벽에 붙은 가네샤의 웃는 얼굴,
차 대시보드 위의 락슈미 여신,
집 입구마다 매일 새롭게 바뀌는 꽃 목걸이.
신은 성스러운 공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인도에서는 신이 집 안에, 가방 안에, 마음 안에 늘 같이 있었다.
힌두교의 근간은 세 가지 신의 조합으로 설명된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
처음엔 이 셋의 조합이 낯설었다.
왜 ‘파괴’가 신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인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세 신은 삶의 순환 그 자체라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브라흐마의 시기,
그것을 안정적으로 지켜내는 비슈누의 시간,
그리고 끝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시바의 순간.
인도인은 삶의 변화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변화는 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작도, 끝도, 혼란도 모두 다 신의 얼굴이다.
힌두교에는 수천 개의 신이 있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신은 하나의 본질에서 갈라진 ‘다양한 성격’들이다.
가네샤는 장애물을 없애주는 신이자,
새로운 시작을 돕는 지혜의 상징이다.
두르가는 여성적 힘과 용기의 화신이고,
칼리는 파괴와 치유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외형이 다른 신이 아니라,
삶의 상황마다 필요한 감정과 힘을 상징하는 얼굴들이다.
불안한 날에는 가네샤를 찾고,
용기가 필요한 날에는 두르가를 찾는다.
이건 마치 우리 내면의 심리적 도구함에서
적절한 도구를 꺼내 드는 것과 비슷하다.
신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인도의 사고방식 속에서는 감정과 상황을 해석하는 틀에 가깝다.
하루는 시장에서 한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채소를 주우며 중얼거렸다.
“크리슈나가 오늘 좀 장난이 심하네.”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불운을 신의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 속엔 원망이 아닌 농담과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인도에서는 삶의 어떤 일도 ‘절대적인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건 신이 준 시험일 수도 있고,
과거 생의 업(業)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신의 뜻일 수도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만든다.
삶을 한 편의 서사로 보고,
자신은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역할로 받아들이는 태도.
신화는 인도인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이고,
해석이며, 감정의 언어다.
가장 놀라운 건,
사람들이 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린다는 것이다.
마치 친구처럼, 부모처럼, 때론 아예 투정하듯 말한다.
“왜 나한테만 이래요?”
“이번만 도와줘요, 그럼 진짜 착하게 살게요.”
“어제도 못했잖아요. 오늘은 좀 잘 되게 해줘요.”
이 대화들은 종교적인 경건함보다,
정서적인 거리의 가까움을 보여준다.
신은 그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삶의 공범자다.
인도에 있는 동안,
나 역시 불안한 날이면 작은 신상을 한 번 만져보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가네샤의 미소를 떠올렸다.
종교가 없던 나에게,
그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보다는
마음을 다독이는 방식이었다.
인도는 신을 믿게 만든다기보다,
‘신을 곁에 둔다’는 감각을 선물한다.
신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 모든 상징은,
삶의 복잡함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