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에 온 마음을 다하는 이유
인도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자주 들은 단어 중 하나는 ‘카르마(Karma)’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업보’ 맞다.
하지만 한국에서 무심코 던지는 “그건 업보다”라는 말과는 결이 달랐다.
인도에서는 ‘업’이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자 태도였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들을 기가 막히게 유연하게도, 단단하게도 만들었다.
인도에서 만난 한 스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업이란 벌이 아닙니다.
그건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이 남기는 에너지의 흔적이에요.”
업은 단지 나쁜 짓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무심한 선택조차도
모두 작은 씨앗이 되어 언젠가 피어난다는 믿음.
그래서 인도인들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도
언제나 이 ‘씨앗의 흔적’을 생각한다.
무엇을 말했는지,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썼는지,
심지어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까지도.
나는 한 번 인도 친구에게 물었다.
“너무 억울하지 않아? 그런 일까지 네 탓은 아니잖아.”
그 친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억울하죠. 하지만 이 일이 왜 나에게 왔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이 편해져요.
이 생에서 갚을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감사한 일이에요.”
그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인도에서는 인생의 고통 앞에서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의문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이 또한 내 업이구나”라는 인정과 수용이었다.
슬픔은 있지만 원망은 없고,
괴로움은 있지만 절망은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 삶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윤회를 믿는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수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의 문을 여는 준비다.
가장 신성한 도시 바라나시에서는
그 강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큰 해탈의 길이라 믿는다.
처음엔 그 관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노승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린 오늘의 삶만 사는 게 아니에요.
모든 삶을 연결해 살아가고 있어요.
이 생에서 다 못한 건, 다음 생에 계속 배우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문득 오늘 내가 내뱉은 말 하나,
마음먹은 일 하나에 조금 더 책임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힌두교는 윤회를 믿는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수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다.
인도인의 마음에는 ‘긴 시간’이 있다
급하게 이뤄야 할 것도,
당장 끝내야 할 것도 없다는 그 느긋함은
어쩌면 이 긴 윤회와 업의 개념에서 온다.
인도인에게 있어 삶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 생을 걸쳐 완성되어 가는 한 편의 서사다.
그래서 이들은 서툰 사람을 쉽게 용서하고,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모든 순간에 ‘배움’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둔다.
인도를 떠나는 날,
나는 조용히 갠지스 강가에 앉아 손을 모았다.
무언가를 빌기보다,
그동안의 내 삶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생에서 내가 남긴 말,
마음속에 품었던 감정들,
타인에게 준 작고 큰 영향들…
그 모든 것이 나의 업이겠지.”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다음 생이 어떠하든,
지금 이 삶은 조금 더 정성껏,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야겠다.그래서 인도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의 문을 여는 준비다.
가장 신성한 도시 바라나시에서는
그 강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큰 해탈의 길이라 믿는다.
처음엔 그 관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노승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린 오늘의 삶만 사는 게 아니에요.
모든 삶을 연결해 살아가고 있어요.
이 생에서 다 못한 건, 다음 생에 계속 배우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문득 오늘 내가 내뱉은 말 하나,
마음먹은 일 하나에 조금 더 책임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