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높지 않다, 그저 가까울 뿐이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수십 개의 사원을 방문했다.
델리의 붉은 사원, 바라나시의 갠지스 옆 사원,
마두라이의 다채로운 탑이 솟은 미낙시 사원,
골목 끝 낡은 돌바닥 위에 위치한 이름 모를 작은 신전까지.
그곳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신은 언제나 높지 않았고,
오히려 놀라울 만큼 가까웠다.
한국에서 종교란 종종 ‘무겁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절을 갈 때는 몸을 낮추고, 교회를 갈 때는 옷깃을 여민다.
기도는 조용해야 하고, 웃음보다는 경건함이 우선된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달랐다.
힌두 사원은 놀랍도록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신상 앞에서 뛰고, 남자들은 웃으며 무언가를 나누고,
어떤 이는 맨발로 돌바닥에 드러누워 기도를 하고,
어떤 이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지나간다.
나는 처음엔 이 풍경이 당황스러웠다.
“이게 정말 신 앞에서 해도 되는 행동일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신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었고,
늘 곁에 있는 ‘가족’ 같은 존재라는 걸.
힌두 사원에서 신상을 보면 대부분 사람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높은 단상 위에 앉은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가까이 다가가 직접 꽃을 올리고, 물을 붓고, 터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어떤 이는 신의 발에 이마를 대고,
어떤 이는 꽃잎을 뿌리며 속삭인다.
그 손짓과 표정은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비밀을 고백하는 아이 같았다.
신은 심판자가 아니라 위로자였고,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함께 사는 친구였다.
힌두교에는 수많은 신이 있다.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락슈미, 두르가, 가네샤…
각각의 신은 각자의 사연과 성격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때그때 자신의 상황에 맞는 신에게 찾아간다.
경제적으로 힘들 땐 락슈미 여신에게,
새로운 시작 앞에서는 가네샤에게,
삶의 고비에선 시바에게 향한다.
나는 처음 이걸 들었을 때 조금 의아했다.
“신이 그렇게 선택 가능한 존재인가요?”
하지만 인도인에게 신은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존재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는 존재다.
마치 엄마처럼.
속상하면 안아주고, 화나면 달래주고,
때로는 투정을 들어주는 그런 존재.
힌두 사원 앞에는 수세기 된 조각들이 남아 있다.
비가 내린 날, 사원의 돌신상은 검게 젖어 있었고
작은 돌기둥 위에 놓인 기름등불은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신은 ‘절대자’라기보다는,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친구, 조언자, 그리고 관찰자 같았다.
한 노스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은 늘 여기 있어요. 우리가 오든 말든, 신은 늘 있었고, 또 있을 거예요.
그걸 아는 사람은 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저 매일 인사하러 오지요.”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신이란 존재를 어렵게 멀리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곁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 바로 믿음이라는 걸,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조용한 골목 사원을 발견했다.
신도 한 명 없이 조용했고, 종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작은 신상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고, 앞에는 마른 꽃잎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건 것도, 기도를 올린 것도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지고, 고개가 약간 숙여졌다.
어쩌면 그게
힌두 사원이 주는 진짜 힘인지도 모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공간.
신이 있든 없든,
내 마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 ‘온도’.
인도에서 나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경건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신과의 거리다.
너무 멀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그 거리.
그 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신 앞에 선다.
어쩌면 그게, 인도인들이 가진 가장 부드러운 신앙의 방식 아닐까.
“힌두 사원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천천히 다가가는 평평한 길이었다.
신은 그저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다가가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