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충돌과 따뜻함
인도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관광객이었다.
길거리 음식에 눈을 반짝이고, 사리 매는 법을 유튜브로 검색하고,
길모퉁이에서 망고 하나를 사 먹으며 이국적인 하루를 즐겼다.
하지만 진짜 인도를 느낀 순간은,
화려한 사원도, 시장도, 타지마할도 아닌
한 인도 가정집의 부엌에서였다.
“우리 집에 와요. 저녁 같이 해요.”
대학 수업에서 만난 친구, 프리야가 무심하게 말했을 때
나는 단순히 외국인에게 친절한 인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고,
며칠 뒤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만든 ‘알루 고비’를 손으로 먹고 있었다.
그날 나는 외국인이 아닌 ‘손님’이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손님은 신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향신료와 꽃내음이 진하게 섞인 공기가 나를 반겼다.
작은 제단 앞엔 신상을 향해 갓 피운 기름등불이 흔들리고 있었고,
거실에는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며 레이스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멈췄다.
소파가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바닥에 낮은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맨발로 부엌과 거실 사이를 오갔다.
“앉아요, 편하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몸은 영 어색했다.
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릎을 꿇자니 오래 못 버티겠고,
땀이 나는 손으로는 뭘 만져도 조심스러웠다.
음식은 하나씩 테이블에 놓이지 않았다.
큰 원형 쟁반에 밥과 커리, 달, 피클, 요거트가 함께 담겼다.
프리야 어머니는 차파티를 직접 반죽해 구웠고,
향신료의 강렬한 향이 코끝을 지나 뇌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서 손으로 먹으라는 신호.
수저는 없었다.
처음엔 밥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달과 커리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익숙하지 않은 식감과 온기에 당황했지만,
프리야가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 말해줬다.
“이건 도구가 아니라, 너랑 음식 사이의 거리야.”
그 말이 내 어색함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프리야의 엄마는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접시가 비면 가장 먼저 눈치채고 다시 밥을 올려줬고,
내가 매운맛에 기침을 하자 얼른 단 요거트를 건넸다.
말은 없었지만, 온도와 리듬이 있었다.
부엌에서 차이(Chai)를 끓이는 소리,
가스불 위에서 튀겨지는 파코라의 바삭한 소리,
누군가 손뼉을 치며 따라 부르는 발리우드 음악.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모든 것에 잠겨 있었다.
저녁이 끝나고, 프리야의 여동생은 나를 방으로 데려가
사리 입는 법을 보여줬다.
무려 여섯 미터나 되는 천을 어떻게 접고 감는지,
팔루는 어떻게 넘기는지, 허리는 얼마나 조이면 좋은지를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이건 여자들이 스스로를 감싸는 방식이야. 좀 불편하더라도,
느껴봐야 돼. 감싸는 느낌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문화 체험’이 아니라 문화의 안쪽에 들어가는 감각을 경험했다.
겉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살아보는 것은 정말 달랐다.
밤이 깊어지자, 가족은 제단 앞에 모여 짧은 기도를 드렸다.
나도 어색하게 두 손을 모았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넌 외국인이 아니야.
이 집에 왔다는 건, 우리 가족이 된 거야.”
프리야의 아버지가 한국어로 외운 듯 말하며 웃었다.
그 발음은 서툴렀지만, 마음은 정확히 와닿았다.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때, 나는 익숙하게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집의 문은,
내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닫히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배웅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와도 된다”는 말 없는 환대였다.
그날 이후, 나는 인도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환대'란 말의 뜻도 다시 배웠다.
초대란,
요리를 잘하고 방을 깨끗이 치우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