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영화 <타인의 취향> 리뷰
영화 <타인의 취향>은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개봉, 2009년 재개봉된 좀 오래된 프랑스 영화다.
등장인물
사장 (카스텔라) : 돈은 많으나 문화 예술에 대한 안목이 없다. 연극도 싫어했다. 자기 취향을 잘 모른다.
사장 아내 (앙젤리끄) :남편의 먹는 것, 보는 것 등 모든 것을 통제. 동물을 사랑하고 실내장식 디자이너.
비서 (브루노) : 다른 사람의 취향을 이해해 보려 하고 경호원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하고 맞춰보려고 함.
경호원 (프랑크) ; 전직 경찰관. 곧은 성격.
회사 자문(베베르) : 좋은 학교 출신,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불편함.
영어 선생, 여배우 (클라라) : 어설픈 모습의 사장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술집 바텐더, 마약 거래 (마니) : 융통성 있는 성격이지만 융통성 없는 사람과 부딪친다.
사장 여동생 (베아트리스) 이혼 후, 갈 곳이 없어지자, 오빠(카스텔라)가 머물 곳을 마련해 준다.
그 외, 여배우 쿨라라의 친구 앙투안과 그의 동성 애인 화가 부누아, 의상담당
감상
이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악하거나 남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갈등이 있고 조금씩 불행하다. "취향" 때문이다. 타인의 취향을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품고 부딪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보이는 모습을, 상대는 자기 취향으로 판단하고 오해도 생긴다. 취향을 무시당할 때 상처도 받는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취향은 여러 분야에 있어서 종류가 다양하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좋아, 호두 아이스크림이 좋아?"처럼 어떤 취향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할 수 없다. 어떤 취향은 마약 거래, 경찰의 정의로움, 성에 대한 태도처럼 도덕성, 윤리적 가치관과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다. 또 어떤 취향은 문화, 예술처럼 '수준이 높다', '낮다'로 평가되기도 한다.
취향은 각자 다르고 변한다. 취향 때문에 알게 모르게 벌어지는 사소한 불행이 많다. 이것을 자각하고 의식한다면 관계에서 오는 불쾌한 감정이 다소 줄어들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관계 중, 사모님인 앙젤리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모님 앙젤리끄는 언뜻 보면 완벽하다. 돈도 풍족하고 외모도 세련되고 예쁘다. 바쁜 사장인 남편의 관리도 철저하게 해 준다. 남편 조카의 연극 공연과 이혼해서 갈 곳 없는 시누이도 챙겨준다. 동물을 사랑하고, 인테리어 감각도 있고 집도 예쁘게 꾸민다. 착해 보이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해하고 생활에 불만이나 불편도 없으니 성격도 적당히 밝다. 그런데 남편(사장)은 여배우 클라라에게 반한다. 클라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자 포기하지만, 어느 날 남편은 집을 나간다.
자세히 보면 앙젤리끄에게도 문제가 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은 잘하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흐뭇해한다.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이 있다. 나르시시스트라고 해도 사람마다 특성과 정도가 다르다. 앙젤리끄는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질투가 유난히 심한,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을 공감하지 않는 특성이 강하다. 자기는 특별하다고 느끼고 레벨이 높은 사람은 좋게 보지만 그 외에는 조금씩 무시하고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자신감으로 타인의 경계를 넘으려 한다.
구체적으로, 남편이 좋아하는 단 음식 같이 몸에 안 좋은 것은 절대로 못 먹게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편 뒤에서 적당히 초콜릿을 먹는다. 남편에게 들켜 "왜 몰래 먹냐?"라고 물으면, "당신이 먹고 싶어 할까 봐"라고 한다. 실내 인테리어를 잘하긴 하지만 남편에게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만의 취향대로 꾸민다. 남편이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 놓자, 상의도 없이 그림을 치운다.
이혼해서 갈 때가 없는 시누이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 준다. 시누이가 고맙다고 하자 "오빠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오빠이지 않느냐, " "오빠가 해 줄 만하니까 해주는 거다." 등 말도 예쁘게 한다. 실내도 예쁘게 꾸며 주려한다. 하지만 시누이가 초록색을 원하면, 그건 너무 딱딱하다. 핑크나 꽃무늬가 좋다. 등을 주장하며 결국 자기가 원하는 데로 꾸민다.
동물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만큼 사람은 사랑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길거리에 지나가던 행인을 물자, 오히려 행인에게 화를 내고 미워한다. "물만하니까 물었을 거다."라는 주장이다. 시누이를 물었을 때는 "좀 친해지지 그러셨어요?"라고 한다. 시누이는 "안 물리려면 친해져애 하는 거예요?"라고 되묻는다. 물린 사람에 대한 공감은 못하지만, 강아지의 나쁜 습관에 대해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강아지를 이해해 준다. 강아지가 들판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인다. 세상이 얼마나 추하고 끔찍한지 모른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삶을 모른다. 그저 행복하다."라고 감탄한다. 그때 비서가 혼잣말처럼 답한다. "그럼 놀이동산에 가야죠." 앙젤리끄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타자를 해석할 수 있는 동물이 사람보다 좋다.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던 중 앙젤리끄는 비서에게, 그가 "운전할 때, 위험한 길로 다녀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갑자기 사람이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냐?"라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차를 세운다. 놀란 비서가 차를 세우자 그녀는 아픈 새를 발견하고 위험하게, 차도 한 복판에서 한동안 쓰다듬고 (비서는 앞 뒤로 차가 오는지 놀라서 보고 위험하다고 말도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느낀 후에야 새를 데리고 차에 탄다. 며칠 후, 비서가 새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 짧게 "죽었다"라고 한다. 비서는 "동물 병원에 데려갈 걸 그랬어요."라고 한다. 앙젤리끄가 자신에게 동물을 사랑한다는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시간을 주는 것보다, 새 입장에서는 병원으로 데려가서 치료받게 해주는 것이 나았을 거다.
앙젤리끄는 사회적 태도도 깔끔해서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귓속 말로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취향에 대해 조용히 무시하고 못마땅해한다. 연극을 볼 때는 "무대의상이 별로다". 여배우 클라라의 몰입된 연기에 대해서는 "저 여자 웃긴다.", 비록 이혼했지만 시누이가 사랑하고 있는 시누이의 남편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다."라고 하고, 시누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인테리어 감각 등도 못 마땅하다. 단, 엘리트인 남편 회사 자문에 대해서는 "저 사람 괜찮다. 옷도 잘 입는다."라고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들은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조금씩은 자기중심적이어서 타인의 입장과 취향 차이로 오해와 문제가 생긴다. 나르시스의 기본 성향인 '자기 사랑'은 꼭 나쁜 것은 아니어서 건강하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때는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자기 중심성이 강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하지 않는 것이 특성이니 더 많은 오해와 문제가 일어난다.
현대는 나르시시스트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각 계층에 성별과 관계없이 있지만, 앙젤리끄처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중년 여성의 취향과 관련된 나르시시스트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앙젤리끄처럼, 남편의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자신의 지위와 능력으로 알고 자만심이 생겨 타인은 무시하는데 남편까지 무시한다.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자식에 대해서도 자기 취향대로 만들려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많다. 자신은 완벽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가족들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사람이 이런 사람과 잘 엮이게 되는데,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카스텔라(사장)처럼 점점 자기 취향을 모르게 되고 무기력해진다.
나르시시스트도 주변인을 정말 생각해 줄 때가 있다. 그래서 남을 도와주는데, 상대가 자신의 결정에 주저할 경우, 그들은 무의식에 있던 자기 우월성 욕구가 올라오며 "그래, 네가 선택해." 하지만 팔짱을 끼고 속으로는 "얼마나 바보처럼 선택하나 보자"라는 태도를 취하며,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나 구체적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아예 말을 안 하고 숨기면 음흉한 성격이겠지만, 관념적인 말로, 자기만 뭔가 알고 있는 것을 암시하며 선택을 더 주저하게 한다. 자녀의 경우에는 "자신을 떠나서 잘하지 못하게 되는 것"에 은근한 쾌감을 느끼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한다. 자식이 잘되면 자기와 동일시하며 또 교만해진다. 이들은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은 착하고 완벽하고, 취향도 뛰어나고 옳은데 외롭다거나, 다른 사람들은 다 취향이 저급하고 바보 같다고 느끼고 타인을 침범하고 싶다면 자기가 '나르시시스트'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여자 친구가 떠나고 비서(브루노)는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리도 제대로 못 내지만 혼자서 꾸준히 연습한다. 마침내 비서가 다른 연주자들과 합주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취향은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때처럼, 처음에는 각자의 악기로 아름답게 갈고닦아, 다양한 악기가 서로 조율하고 맞추면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취향은 변하기도 하고, 자기 취향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의상을 담당하는 클라라의 친구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스타일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클라라도 사장(카스텔라)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무대 뒤에서 방청객 중 사장을 찾고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장(카스텔라)의 경우에도 자신의 취향을 잘 몰라 좀 어설프지만, 취향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프랑스는 한 때 미술의 주류를 주도하던 나라인 만큼 개인의 취향을 잘 훈련하고, 취향에 대해 존중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어서 자각하려고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든다. 그에 비해 동양권 나라들은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덜 존중받았다. 우리 세대는 똑같은 교복과 머리모양, 신발, 가방, 양말에 똑같이 앉아서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이 걷는 연습도 하며 자랐다. 그래서 좋아 보이는 사람과 똑같아지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려 한다. 성인이 되어 광고가 시키는 대로 '잘' 소비하는 것을 자기 감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남은 무시한다. 혹은 불협화음을 내는 것을 개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며 개성을 없애는 주입된 교육을 받았고, 전쟁 같은 위급 상황에서는 개인의 개성보다 전체에 대한 교육이 앞서왔다. 이제 우리나라도 개인의 취향과 개성이 존중받기 시작하고 있다. 개인의 바른 연습과 화합, 조화로운 조율을 맞춰야 할 때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취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오래된 영화지만 지금 우리가 봐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