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 “ 리뷰)
재능이 있어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하지만 순수 예술은 다른 분야에 비해, 자리 잡기까지 필요한 여건이 많고, 성공하는 비율도 낮다. 그런 현실에 예술가는 의기소침해지거나 화가 나고, 그러다 보면 현실은 더욱 피폐 해지고 예술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어려워져, 예술과 현실 모두를 사랑하기 힘들게 된다.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은 2004년에 개봉된 영화다. 영화를 보면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 70, 80년대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 같다. 가난은 힘겹고, 구차하고 지저분하다. 이 영화는 열악한 생활의 민낯을 자연스럽게 담았다. 그런 현실에서도 타인과 삶과 예술을 사랑하고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줄거리>
서울에서 엄마와 둘이 사는 현우(최민식)는 트럼펫을 전공했다. 친구 경수는 학원을 하며 돈을 벌려고 애쓰지만, 현우는 음악을 이용해 속물로 사는 건 싫다. 옛 애인 연희(김호정)는 미련을 갖고 현우를 찾아오지만, 현우는 그녀를 잡지 않는다. 연희는 무기력한 현우가 안타깝다. 봄이 오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한다. 현우는 관현악단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보지만 잘되지 않고, 생계도 어렵다. 인생의 추운 겨울을 보내며, 세상에 대해 마음도 얼어있던 현우는 그해 겨울,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강원도 탄광촌의 한 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로 간다.
학교에서는 실적도 없는 관악부를 없애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음악에 대한 꿈이 있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선생님이 왔다고 좋아한다. 현우는 열악한 환경에서 전국 대회를 준비하며, 제자 아이들과 마을 사람을 알게 되고, 차츰 얼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한다. 전국 대회에 나가 큰 상을 받아온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좋은 추억만 만들고 봄에는 서울로 올라온다. 현실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의 마음은 봄을 맞을 준비가 된 듯하다.
꿈 만 좇던 현우, 그러나 현실은 겨울
현우는 음악과 연희를 사랑했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때문인지, 원치 않는 곳의 막다른 곳에 갇혀 있다.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는 친구 경수가 속물로 보이고, 잘해주지 못할 것 같아 사랑하는 연인을 버린다. 현실은 겨울에 갇힌 듯하다. 마음을 닫고 현실을 미워한다. 봄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곳에서 나오려는 의지도 없이 무기력하다.
현실만 좇는 사람들
음악 말고 기술을 가르치려는 제자 윤석이의 아버지에게, 현우가 윤석이의 꿈에 대해 말하자, 광부인 아버지가 말하길,
"꿈? 오랜만에 들어보네. 나도 꿈이 있었지. 막장 일이 내 꿈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이 다 내 뜻대로 됩디까?"
시골에 내려온 엄마와 같이 자며 현우가 묻는다. "엄마 꿈은 뭐였어?" 엄마(윤여정)도 한때는 ‘문학소녀’가 꿈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꿈은 있지만 꿈꾼다고 다 이뤄지지는 않는다. 광부 아버지나 현우 엄마, 학원 하는 친구 경수는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따라갔지만, 현실도 그리 행복하지는 못하다.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
현우는 옛 애인이 찾아와도 잡지 못하고, 봄이 오면 연희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한다.
약국 하는 수연이도 지나가는 봄을 봄답게 맞지는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다. 수연이는 봄에 대해 말한다. "봄이 오긴 오지만 다녀가요. 서울에서 온 선생님처럼 잠깐 왔다가 간다”라고 한다. 어김없이 봄이 와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 삶에서 봄이 오는 거다. 봄이 와도 봄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쓸쓸하다.
봄이 오고 꿈꾸는 건 좋은데, 봄을 맞지 못하는 사람에게 꿈은 오히려 잔인하다.
얼었던 세상이 녹기 시작할 때
얼음 속에 갇힌 건 현실이 아니라 현우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현우가, 제자의 할머니가 병원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밤무대에 서기도 하고, 음악보다는 아들에게 기술을 익히게 하겠다는 광부 아버지를 설득하러 가고 그를 이해하기도 하며, 사람들과 마음을 나눈다.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거나 정체된 느낌이 들 때, 봉사활동을 하거나, 남을 도와 가르치는 일(이래아 저래라 내 뜻대로 지시하는 거 말고, 진짜 가르치는 일)을 하고 나면 일이 풀릴 때가 있다. 업에 의한 보상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길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도 생겨 길이 보인다.
현우는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마음 속에 봄의 따뜻함이 시작된다.
현우가 시골에 내려가서 엄마(윤여정)와 통화 중에 한 말이다.
현우 : "엄마...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 그냥 뭐든지...."
엄마 : ”넌 지금이 처음이야. 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면 자신에 대한 후회로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원망보다 무기력하던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찾아온다.
꽃은 옆에서 울며 기다리고 있다
연희는 차를 운전하여, 현우가 있는 강원도까지 친구 경수를 바래다주고, 혼자 바닷가로 간다. 그곳에서 트럼펫을 옆에 놓고 울고 있는 중학생을 본다. 아이에게 트럼펫을 불어달라고 한다. 아이는 대신 차비를 달라며 트럼펫을 분다. 그 곡은 현우가 예전에 연희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다. 연희는 그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꿈과 현실을 모두 사랑하기
현우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리기 시작하고 현실도 조금씩 바뀌게 되는 기미가 보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초라한 현실에서도 아름다움과 사랑을 발견한다.
예술(혹은 꿈)만 사랑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봄은 오지 않나 보다. 삶에서의 봄은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따뜻해져야 봄이 오기 시작한다.
꿈을 꾸던 아름다운 사람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피폐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가슴속에 혼자만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며 꿈과 현실을 모두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우가 그랬듯이.
사실적인 현실 묘사와 인간적인 면이 배우 최민식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잘 어울린다. 황량해 보이는 겨울 풍경이, 들여다보면 봄의 씨앗을 품고 있는 따뜻했던 겨울 이야기가 되는, 가슴에 와닿았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