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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Mar 02. 2018

나를 위한 삶

영화 <리틀 포레스트 2 : 겨울과 봄>

<나를 위한 삶

-Little Forest: Winter&Spring.sin.2015.Junichi Mori.



내 마음 한편에 작은 숲을 기르는 일, 혹은 내가 자랄 숲을 찾는 일. 나를 위한 삶.




 화면 속에 등장한 사람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어느 여러 일본 영화에서 보고 기억해뒀었는데, 누구더라. 동명의 원작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가 일본 영화를 거쳐 한국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에 원작부터 봐야지! 하는 마음에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들을 섭렵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주인공의 얼굴이 어디서 확실히 본 얼굴이었다. 심지어 굉장히 좋아하던 얼굴이었다. 그제야, 대충 읽고 넘어갔던 하시모토 아이가 내가 봤던 그 하시모토 아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 편으로 나누어져 개봉한, 정확히는 절기마다 나뉜 형태로 리메이크된 이 영화. 그중 내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던 영화를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이야기인 2편이었다. 1편에서 나왔던 ‘요리는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이란 대사처럼. 나에게는 글이, 앞서서는 영화가 그렇다. 사계 중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지금의 나를 다시금 살아나게 만드는 영화. 추위에 잔뜩 웅크렸던 어깨가 조금씩 열리는 것 같다. 자 이제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야지. 탁한 마음처럼 게을렀다간, 겨울을 나지 못한다. 




짓밟힌 것들이 외롭지 않기 위하여 


 ‘가을에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늘 오던 청구서들 사이로 하늘색 편지 한 통이 끼워져 왔다. 기다리고 있었으나 기대하지는 않았던 이치코는 살짝 벙찐채로 문을 닫는다. 우체부 아저씨가 비탈길을 다 내려갈 때까지 느릿한 시선은 꺼지지 않는다. 영화는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당부하는 듯 눈과 함께 시작한다. 같은 자리에서 달라져가는 풍경이, 계절들이 맞물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기 위해. 



 리틀 포레스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싱그러운 요리이다. 어지간하면 일명 ‘리틀 포레스트 레시피’가 돌아다니겠는가. ‘그동안 소홀했던 나에게 정직한 한 끼를 대접합니다.’가 메인 카피답게 1st dish부터 7th dish 그리고 디저트까지. 매 시즌마다 반복되는 오프닝 멘트. 이 영화는 하나의 요리에 얽힌 에피소드들로 짜인 커다란 퀼트 같다. 겉보기엔 예쁘고 먹음직스럽지만 사실상 그 이야기들 사이에 끈끈한 개연성은 별로 없다. 가볍다. 엄마가 왜 집을 나갔는지, 이치코가 왜 도시 생활을 접고 돌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라곤 일절 없다. 있긴 있지만 없는 수준이다. 처음엔 내가 레시피 영상을 보려고 이걸 보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의 눈알을 요리가 아닌 이치코에게로 옮기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부족한 설명들을 메꾸고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것들이 무심하게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그저 흘러가는 것에 조심스레 제동을 거는 장치들. 그것들은 이치코가 맺었던, 혹은 여전히 맺고 있는 관계들이다. 엄마와 함께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거나, 유우타로부터 대답하지 못할 질문들을 듣거나, 키코와 싸우거나 하는 일들 같은 것들 말이다. 관계 속에서 이치코는 길을 걷고, 멈추어서고, 하늘을 본다. 파란빛과 먹구름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린 하늘 같은 자신을 본다. 


 마을에서 신세 진 분들께 가져다 드리면 좋아하실 거야 라는 말에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할 정도로 철저히 ‘홀로’인 이치코.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엄마 덕에 시작되어버린 홀로서기. 돈을 벌고 있는 와중에는 절대로 장작 패기를 끝낼 수 없는,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 힘들어 죽겠는데도 어떻게 생각해봐도 ‘도망자’ 일뿐인 자신이 한심한 이치코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한다. 자신이 지나온 삶에 관하여,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관하여 말이다.



<엄마의 편지>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후쿠코상의 편지는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을 풀어내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가을에 온 편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던 이치코가 겨울, 그리고 봄이 되어 제 목소리로 낭독을 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우타의 말처럼, 코모리의 어른들처럼, 제 삶으로 이해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자주 등장하는 4 분할 화면들은 사계절에 빗대어진 것이고, 옆으로 흘러가는 화면들은 시간 같다. 춥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들처럼, 하룻밤을 기다려야만 맛있어지는 것들처럼, 성급했다간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것들처럼. 모든 일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코모리에서 산다는 것은 겨울이 끝나자마자 다음 겨울 식량을 준비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열 종류가 넘는 채소들을 키우고, 곡물을 재배하고, 먹을 수 있게 가공하고, 가사노동도 하고, 육아도 하고, 산으로 거리로 일하러 나간다. 그런 일들의 반복이다. 이치코는 애써서 밭농사 준비를 해두었지만 올해는 감자를 심지 않기로 했다. 내년 겨울에는 여기 없을 테니까, 하고 떠났다. 생각하는 즉시. 숨을 곳이 없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진취적인 마음으로 살 곳을 선택하기 위해서. 



 누군가와 함께 사계절을 지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은유 작가) 이치코는 코모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그 모든 음식들에는 논과 밭에서 땀 흘리며 보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짠하고 완성되는 건 없다. 이치코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것을 홀대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시선들은 모두 느릿하게 차근차근. 과정, 어느 한 사람이 선택을 하고 길을 떠나는 배움의 여정 속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숲이 되어줘


나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미약한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나는 세계 앞에서 곧잘 도망치곤 했다. 생은 언제나 일직선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정답을 찾아 기약 없이 달려 나가는 꼴이 우스웠었다. 나는 질리고, 지쳤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생은 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고 돌기에 누구도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는. 끝이 없기에 매 순간이 끝이 되는. 각자의 자리에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몫을 다하는 삶. 아 그렇다면 가끔은 도망쳐도 괜찮구나, 인생은 뒤로 갈 수 없구나. 그때부터 나는 멋진 도망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치코를 보며 그리고 후쿠코상의 편지를 함께 읽으며 다른 관념의 생애를 보고, 또 받아들인다. 원이 아니라 나선, 실패가 아닌 팽창. 도망자에게도 마음의 집은 필요하듯이. 오늘의 나도 한걸음 더 나아간 기분이다. 



 사실 나는 결말 부분의 5년이 지난 뒤의 이치코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몰랐었다. 영원히 떠나 안 돌아오는 것을 사실 속으로 바라고 있던 지라, 또다시 떠밀리듯 돌아온 것인지 묻고 싶었었다. 그런데 카구라를 추고, 부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한치의 후회도 없음을 보았다. 우리에게는 낯선 일본의 전통 무용이지만 나풀거리는 소맷자락들을, 기이한 노랫가락들을 홀린 듯 들었다. 교차되며 보인 그녀가 보내온 나날들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진정성이 담긴 쇼트였다고 본다.



 다음 구절은 만화에서만 언급된 이치코의 멘트이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함께 있지도 못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라고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자주 해주셨던 말이 떠오른다. 만남에서 중요한 부분은 헤어짐이고, 호흡에서 중요한 부분은 날숨이다.




“그럼 제가 먼저 말을 꺼내다 보니 이렇게 인사까지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 이치코라고 합니다. 

이번 일을 개최하게 된 첫 번째 목적은 다른 사람의 형편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싫어서 

저희들의 힘을 키워 저희 뜻대로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보조금을 받지 않게 되면 곤란하니까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든지. 

애써서 기업을 유치시켜서 직장이 생겼는데 그쪽 사정으로 철수를 한다던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좀 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요. 그게 자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위해 좀 더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니 선생님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 공부도 여럿이 모여서 하는 편이 즐겁고,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나니까요. 

그렇게 공부한 성과를 발표하는 장과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교류의 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멋진 코모리라는 곳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리틀 포레스트라는 제목에 나만의 의미 부여를 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인생이라는 거, 수많은 생들이 공존하며 제멋대로 자라나고 있는 텃밭처럼. 내 마음 한편에 오만가지 마음들을 정화해줄 숲을 가꾸는 일이 아닐까. 혹은 작은 나무인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곳, 어딘가의 일부가 되고 싶은, 내가 기댈 작은 숲을 찾는 일이 아닐까. 나와 함께 자라날 터전을 말이다.



 그렇기에 되는 대로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도망이어도, 떠나도, 그리고 다시 돌아와도 말이다. 그것이 철저히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당신의 선택이라면. 뭘 하든 간에 괜찮다. 하다못해 벼도 사람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양파도 겨울을 지나 10개월이 걸린다는데. 먼 길을 돌아온 이치코의 삶이 요리라면 오랜 시간을 들인 만큼 맛없을 수가 없다. 이치코는 자신이 선택한 삶으로 떠났다.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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