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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Mar 05. 2018

그 사람의 화법

영화 <비치온더비치>

<그 사람의 화법

-bitch on the beach. sin.2016. 정가영.



홍상수 키드. 그녀의 영화를 설명할 때, 사실상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놀랍게도 홍상수이다. 물론 영화를 틀어놓고 슥 둘러보다 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감독 본인이 워낙에 그 감독을 좋아하기도 하고(극 중 대사 : “홍상수 천만 가능할 것 같아”). 무빙이 많지 않은 앵글, 십 분이 훌쩍 넘어가는 롱테이크, 마구잡이로 읽히는 듯한 대사들, 흑백 화면 등등. 닮아있다 말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 <비치온더비치>, 그리고 앞으로 주구장창 나올 그녀의 작품들 만큼은 꼭 그녀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불렸으면 한다. 


 이미 수많은 은유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나가고 있는. 사랑스럽다기보단, 매력적인. 참을성 없고 저돌적인 영화에 대해 이번 주에는 쓴다. 조금 많이 늦었지만, 신년 맞이 겸 기분 좋게 막 나가는 영화. 비치 온 더 비치. 그녀의 ‘그녀’에 대해. 


나와 함께 경계를 내달려요.


  때에 따라서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살리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떠한 영화적 기술들을 뽐내려고 하지 않고 되려 깔끔하게 압착기로 누른 것처럼 플랫하게 진행되는 상황들. 이 배짱 있는 행위는 사실 치고 나올 자신의 무기가 있음을 알려주는 선전 포고인 것이다. 혹은 이 영화만의 리듬이자, 리듬을 만들어내는 방법이기도 하고. 100% 애드리브처럼 자연스럽다 못해 툭툭 뱉는 말들. 정가영이라는 필터 없는 이야기꾼, 그리고 정훈 역의 김최용준 배우의 호흡이 이 영화만의 화법이다. 99분의 러닝타임을 지치지 않고 끌고 가는 원동력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근본 없는 대화. 어느샌가 시간이 훌쩍 새어나가 버리는 만담에 가까운. 


 이건 쇼다. 켜켜이 쌓인 말의 리듬이 팔 할을 좌우하는데, 내가 그것들을 줄줄이 읊으며 재방송을 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재미도 없고.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이 영화를 기억해보려 한다. 백번 설명하느니, 한번 보는 게 더 낫기에. 그리고 나는 정 감독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꾼이 아니니까. 어쩌면 영화와는 무관할 나의 감상을 적는다. 내용은 지금 당장도 요약할 수 있다. 전 여친이 전 남친에게 한 번만 자자고 하더니, 진짜 자고, 떠나는 내용이다.



 사람 하나 없던 골목길로 한 사람이 프레임 인 한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왼손에 든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윽고 그 사람과 카메라가 가장 가까워졌을 때, 순간 흔하디 흔했던 풍경이 유유히 흐른다. 천천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사실 이거 영화야, 안 그래 보여도 그냥 그렇다 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충 눈 감아 달란 듯 생뚱맞은 기본 폰트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나온다. 몇 초가량이 지나고, 그녀 ‘가영’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화면에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그에게‘받지 마’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는 전화를 거절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걷는다. 그러곤 정처 없이 기다린다. 앞서 간 사람이 문을 열자 마시던 캔을 휙 던져 버린 채 쫓아들어간다. 큰 목소리로 되도 않는 말을 뱉어내며. 어어, 그래, 나도 이제 왔지, 하면서.  


 가영은 그렇게 헤어진 전 남자친구 정훈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다짜고짜 찾아온 집. 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걸었던 것과는 다르게 나 너무 추워, 라며 무작정 들어간 그곳. 문이 열림과 동시에 긴 강줄기의 물꼬가 트인다. 



 카메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안에 존재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로 정확히 재어 깔끔한 위치에서 맞는다.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한자리에 서서 틸트와, 패닝을 모두 해결해버리는 최적의 위치. 별거 없어 보이는데, 사실상 그 없어 보이는 깔끔함을 위해서 얼마나 비워냈을지 상상하게 된다. 정가영의 영화에서 사실 집, 혹은 그 주위의 공간이 워낙에 익숙하기도 하다. 그녀가 늘있는 자리. 그녀의 자리.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상상하는 장소. 익숙하기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본인이 거의 항상 주연 배우와, 각본과, 감독을 동시에 하는 상황의 정가영의 영화에서 ‘집’이라는 장소는 무슨 뜻일까? 단순히 촬영이 용이한 곳?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감정을 지닌 곳? 이 사람은 왜 항상 이런 방식을 고집할까 혹은 이것에 국한되어있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나는 그가 결과적으로 어딘가의 경계를 내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은 ‘돌아오는 곳’의 의미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고도.



 감독인 본인조차도, 심지어 본인 역을 맡았음에도, 정가영이 ‘가영’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타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던 걸까? 혹은 자신의 단면을 스크린 위로 공유하면서 이것이 이야깃거리가 되길 바란 걸까? 너와 내가 사랑을 했던 현실과 흑백으로 처리된 영화의 경계. 나와, 나 아님의 경계. 영화 이야기를 하는 영화. 제4의 벽을 힐끔힐끔 뻔뻔하게 넘나드는. 전부가 전부가 아닌. 떡정 이느니, 조루니, 지루니, 새빨간 말들이 떠돌아다니지만, 이 영화 무지막지하게 철학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가영이 만들고, 가영은 말한다. 나는 숨어서 지켜본다. 듣고, 킬킬거리며 웃는다. 이미 이 영화를 대하는 방식에 길들여진 나. 나도 이미 반쯤 넘어갔다. 



ㄱ으로 불리는 것들.


 이야기는 4막 구성이다. 하여간에, 그랬대 글쎄, 그리하여, 그런대로. 1막의 제목은 <하여간(何如間)에>. 앞서 말했듯 내용을 읊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1막에서 열심히 치대고, 2막에서 쟁취한다. <그랬대 글쎄>로 남 이야기하듯 켜켜이 쌓아가다가, 안 한다 안 한다 안 한다와 하자 하자 하자가 부딪혀서 결국엔 여자 친구도 물리고 헤어진 그들이 몸을 섞는다. 욕을 바가지로 하던 사람들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격렬한 씬 하나 없지만, 그들의 사적인 대화를 몇 분째 숨어 듣고 있던 우리는 다 알 수 있다. 아 지금, 행복하구나, 하고. ‘언제나 너의 곁에서’가 영원을 약속하는 양 흐르고, 익숙한 풍경이 지난다. 씻고 나온 둘이 차례로 남은 맥주를 마신다. 같은 사람이 화면을 두 번 지나는 것 같다. 전혀 다른 사람 넷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피우는 정훈의 옆에서 빼빼로를 입에 물고 불 붙이는 시늉을 하는 가영. 둘은 다시 입을 맞춘다. 그리고 정훈의 동생 은진이 등장한다.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도 계속되는 또 다른 대화. 저도 아직도 이게 제일 좋아요. 이 한마디를 위해 솔의 눈을 들고 은진이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이제 절반을 지났다.



 3막에서 그들은 관계의 회복, 혹은 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영이 먼저 시작해서는 또다시 정훈에게 잘해주겠다며. 이번에는 자신이 정말 잘하겠다며 말이다. 과거에 얽매여있는 관계.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그 말은, 새로운 것을 만나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만큼이나, 눈만 감았다 하면 제 몸처럼 익숙한 것을 그리워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뒤를 돌아본다. 결국에 둘은 ‘전’ 혹은 ‘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집에서 다시 만났다. 자꾸만 원점으로, 둘이 함께 있었던 때를 인생의 원점으로 여기고 지칠수록 돌아오고 싶어 한다. 다시 해볼 수 있을 거라 여긴다. 화면이 흑백인 이유를 3막이 되어서야 알았다. 둘의 관계의 시점이 과거에 매몰되어 있음을 감독이 은유하고 조롱하는 것, 혹은 시인하는 것. 우리 모두 알지 않나. 제일 좋았던 시점을 뒤로하고 있는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끝에 다다른 둘은 라조기에 고량주, 숙취 없다는 술까지 괄괄 먹고 쌓인 것들을 치운다. 이것저것 흘렸던 상도 다 닦고.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아도 갈 거라던 가영은 정훈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에 정말로 사라진다. 어디 숨은 줄 알고, 강아지 소리를 틀고 있는 정훈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람은 가고, 그 사람의 소리도 함께 떠났다. 노래, 말, 목소리. 가장 익숙하고, 많이 듣던 것부터 사라진다. mos로 찍힌 수많은 인서트 중 나는 화분에 가장 눈길이 간다. 있어도 소리 없이 자라는 것. 이제는 주변을 채우던 사물들만이 남았다. 카메라는 공간을 지켜본다. 만약 여기서 냄새가 난다면, 아마도 살 냄새가 날 것 같다.



 기역. 기역으로 불리는 것들. 정’가’영, ‘가’영, 하여’간’에, ‘그’랬대 ‘글’쎄, ‘그’리하야, ‘그’런대로. 결말을 이루는 씬들을 보며 이 수많은 ㄱ들을 다시 읽어보자. 받지마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정훈의 모습. 아직도 지우지 못한 동영상을 보며 헤실헤실 거리는 모습. 술이 약해 뒤늦게 오른 술기운에 절어 있는 모습. 실제로 이랬다는 건지, 이랬으면 좋겠다는 건지, 픽션임에도 논픽션을 의심하게 된다. 감독이 고른 이 영화의 마지막은 고리타분하지 않다. 자신을 주체로서 여기고 비치라는 워딩을 사용한 것. 당당한 엔딩을 선포한 것.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이 영화의, 이 행동의, 이 이야기의 화자가 가영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 모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는 걸. 사람들 다 그렇듯, 그렇게 안녕이었다는 걸.


코카콜라를 마실 수는 없잖아.


 대뜸 펼쳐졌던 한낮의 상황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여자 친구가 있는 정훈은, 그녀를 물리고 가영과 잤고. 가영은 그에게 다시 잘해보자 말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또 발길 닿는 곳으로 가버렸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맨 처음 언급했던 카메라의 시선을 되짚어보자. 천방지축 상황 속에서도 핸드헬드를 단 한 번도 택하지 않고 픽스를 선택했다는 것. 모험을 하기보다는, 애초에 뿌리는 트라이포드에 놓여있었다는 것. 고개를 돌리고, 눈 정도 맞추는 최선의 사랑을 했다는 점 말이다. 깔끔함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혹은 숨어서 지켜보라고 자리를 봐준 관객석인지 궁금했는데 지금은 둘의 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가영의 시선인 것 같다. 회상하는 것처럼.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다만 너를 바라볼 거야. 원래 여기 있었던 것처럼. 

우리, 서로 익숙하잖아./



 너무나도 익숙해서 낯선 현실과 그 현실을 반증하는 영화. 그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내달리지만 누군가를 잡아서 끌어내리지는 않는, 참 재밌는 구십 구분이었다. 혼자서 되게 아무것도 아닌 걸로 하루 종일 재밌게 논 것 같은 기분이다. 본인이 있는 불변의 위치. ‘고개를 돌릴지언정 다리가 있는 곳은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해 카메라가 꿋꿋하게 딛고 섰었던 바닥. 매개체와 화자가 같다는 지점이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짙게 남을 것 같다. 위장하는 것처럼 코카콜라를 마시고, 가방 속에는 여전히 솔의 눈이 들어있을 사람들. 속지 말자. 혹은 되는대로 속자.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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