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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Mar 12. 2018

그럴 수도 있겠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럴 수도 있겠지

-The Motorcycle Diaries. sin.2004. Walter Salles.


안주할 것이냐 떠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 둘이 4개월 동안 8000km의 남미 대륙을 횡단하자. 여행이 끝나는 날에 나는 30살 생일을 맞게 될 거야. 너는 무사히 돌아와서 학교로 가 의사가 되면 돼. 기름은 좀 새지만 괜찮아. 돈키호테에게 로시난테가 있었듯 나에겐 이 포데로사가 있으니까!"



가만히 아르헨티나에 남았더라면 의사가 되었을 에르네스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생화학자 알베르토(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와 함께 길을 떠난다. 오랫동안 바라 왔던 그들의 여행은 바로 남미 전대륙 횡단. 계획해둔 일정이라곤 길을 따라 달리는 것과, 한센병 치료 전공자인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한센병 치료 병동에 가는 것. 에르네스토의 천식을 조심하며 멋진 반도에서 알베르토의 30살 생일을 맞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돈 한 푼 챙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계획된 미래와 혹은 엉망진창일 테지만 그 보다 나을 수도 있는 어딘가. 이 영화는 떠날 것인가, 혹은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물으며 시작된다.



 줄거리만 쳐도 나오는 내용이 저러한데, 나는 제목만 보고 바이크 영화인 줄 알고 무작정 틀었다. 두 시간 내내 걱정 없이 우렁찬 배기음 소리를 듣겠구나! 하면서. 그런데 이 영화가 시작한 지 45분 만에 바이크를 없애버렸고, 뭐야 여기서 끝인가 했더니 계속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새 바이크를 사려나 했더니 끝까지 안 사고 걷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막무가내로 걸어서 횡단을 하던 그들의 여행의 끝에 ‘이 주인공이 사실은 체-게바라다’는 사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웅담이 아니라 해놓고선, 좀 엄청난 인물이 등장하고 끝나버려서 나는 벙쪄있었다. 물론 영화는 체 게바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오래 기억할법한 영화긴 했지만 말이다. 이미 스포 당할 만큼 다 당해버린 유주얼 서스펙트의 결말보다 이게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 생각했다. 




현실주의자가 되자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이 문장이 내가 알고 있던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에 대한 전부였다. 그가 어떠한 생애를 살아왔는지, 실제로 무슨 일들을 해냈는지, 어쩌다 그런 일들을 하게 되었는지 등등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는 마치 훌륭한 교과서 같았다. 그의 이름을 걸고 나오지도 않았고(물론 본명이긴 하지만), 업적이 아닌 동기에 주목했다. 그런 이 영화의 출발점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시작한 한 사람의 삶이란 영화. 아무런 잣대 없이 그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고, 다큐멘터리가 아닌 로드무비라는 장르 속에서 풀어낸 점이 특히나 더 좋았다.



 로드무비는 장소의 이동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 또는 그러한 장르를 일컫는 말이다. 길 위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을 담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장르의 영화가 여럿 성행을 하고, 여전히 나오는 이유에는 아마도 실제 인간이 그렇기 때문이지 않을까. 눈앞의 문제가 막막하면 훌쩍 떠나는 병이 있는 인간들. 여행을 다녀오면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기대하는 인간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풀리지 않을 문제의 해답을 길에서 찾으려고 할까? 




길 위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푹신한 이부자리도, 아늑한 쉼터도, 따뜻한 음식도 없다. 길은 길이다. 앞에서는 이 영화가 좋다고 좋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스로틀을 당겨대며 얻을 수 있는 것은 흙먼지뿐이다. 그리고 짜증도, 화도, 불신도 얻는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44분 정도까지 이르는 동안 사실 그들의 여행은 별 볼일 없다. 오직 떠나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막무가내로 직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왜 집 나와서 개고생 하나, 당사자들도 그렇게 느꼈으리라 싶은 소득 없는 나날들뿐이다. 심지어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에이 더 힘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청춘을 못 잃어서 발악하고 있는 듯한 그들에게도 무언가 하나씩 다르게 보이는 사건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소리 없이 찾아온 것은 아픈 몸을 이끌고도 일터에 나갔던 할머니를 진찰한 일이었다. 의사라는 명함을 팔아 돈 한 푼 없이도 배곯지 않으며 여행지를 전전할 수 있었던 에르네스토에게 치료할 수 없는 죽음이 선사하는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들이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해 우리는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서 알베르토는 제 몸처럼 아끼던 포데로사를 잃게 된다. 나름 잘 굴러가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속절없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영화는 여기에서 멈출까?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만 돌아갈까? 하고.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걷기 시작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더 가까운 눈높이에서 만나려고 마음을 먹는다. 이유 있는 머뭇거림 후에 드디어 전환점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뒤로 만난 가난한 부부는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빼앗기고 일자리를 찾아 추운 사막을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돌아갈 집이 있는 한낱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그 부부는 그런 자신들을 되려 축복해 준다. 순간, 모닥불에 비친 둘의 눈이 벙찐다. 일말의 부끄러움이 둘러앉은 그들 사이를 일렁일렁 맴돈다. 밀려들어오던 총칼에 탄압되어 빛을 잃은 마추픽추에서도 다를 것 없다.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한 이유 모를 막연한 그리움. 당장의 생을 겨우겨우 연명해나가는 원주민들 앞에서 느꼈던 자신의 무력함. 그것은 모두 같은 것들이었다.


 의문에 이어서 현실을 목격하기 시작한 그들은 리마에 있는 빼세 박사를 만나러 간다. 그는 페루에서 한센병 치료를 주도하고 있는 박사로서, 영화 속 내레이션 그대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주고도 삶의 영감도 던져 주었다. 에르네스토는 그에게 건네받은 마리아테기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혁명에 대한 것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이 즈음 영화에서는 처음으로 흑백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제야 제대로 코너를 돌았다.



그들은 배에 올라 한센병 중증 환자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산파블로 병원으로 향한다. 남미 대륙을 가르는 거대한 아마존 강 사이로는 환자들과 그 외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하지만 모여 산다는 말이 참 무색할 정도로 강줄기가 거세다. 영화를 보는 우리로서는 소록도가 떠오르는 아릿한 풍경이다. 물론 고문과 감금이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옮는 병이 아님에도 규칙이라는 이유 하나로 장갑을 낀 채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는 그것에 굴하지 않는다. 왜?라고 묻는 것이 먼저 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러한 정당하지 않은 작은 관습일지라도 거절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행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다. 허물없이 그들과 어울려 일을 하고, 축구도 하고, 식사도 한다. 각자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도 나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마치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북쪽으로 건너와야만 한다. 에르네스토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사람처럼 저 강을, 저 남쪽을 바라보곤 했다.



 이제는 슬슬 이곳마저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올 때 즈음, 알베르토는 여행의 목적지 근처 병원에서 일자리를 제의 받는다. 이제는 자리도 잡고, 직장에서 일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에르네스토는 길을 찾는 일을 언급한다. 장래도 생각하라고? 그래 알겠어, 나도 알긴 알아라며. 그 뒤 에르네스토는 송별/생일 파티 자리에서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어떠한 증표보다 뚜렷한 연설을 한다. 자신의 확고한 믿음 하나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자고 말한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그 뒤의 행동을 통해 더욱더 진실된 그를 보았다. 그는 강을 건넜다.


  절대로 불가능한 것처럼만 보였던 그들 사이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부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몇 달 전 물에 빠져 보아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떠날 것이냐, 혹은 현실에 안주할 것이냐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힘없는 팔로 자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안녕을 기원해주는 사람들에게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는 줄곧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고,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결국 길 위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은 눈을 감고도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을 시험해보는 일이다. 같은 길 위에서도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선택지는 달라진다. 알베르토는 남았고, 에르네스토는 떠난다. 물음은 같았건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뒤 그는 흘러 흘러 체-게바라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친구끼리 부르는 애칭 ‘체’가 민중을 통해 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이 여행을 통해 보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로 하였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 흑백 이미지들은 중간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가 정면으로 마주했던 사람들의 모습인데, 마치 정적인 공간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묘 한 느낌이 든다. 잘 보라고. 당신 나를 보고 있느냐고 말이다. 그 뒤 도입부와 똑같은 내레이션이 오버랩되다 무언가 더 덧붙여진다. 



‘이 이야기에 영웅담 같은 건 없다. 비슷한 열망과 꿈을 품은 두 청년이 함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있을 뿐이다. ‘


‘우리 시야가 좁았던 건 아닐까? 편견이 있었나? 성급하진 않았나? 잘못된 결론을 내렸던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이 말은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과는 어감이 명백히 다르다. 그럴 수도 있겠지는, 인정하고 나아가겠다는 문장이다. 길은 해답을 제시할 순 없지만, 끝없는 물음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 안에는 답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무작정 길을 떠나곤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알베르토의 생전의 모습이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저 먼 곳 어딘가를 좇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끝끝내 곁에 있었으나 함께하지는 못했던 퓨세를 향한 ‘정답 없음’의 시선일 테다. 길에서 시작한 영화는 길에서 끝났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았고, 그들의 삶에 대한 개인적 가치 판단을 추호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모든 삶의 난제들, 충분히 부딪히고 얻어냈음에도 의심이 드는 해답들을 향한 마법의 주문을 외고 싶다. 



 출발한 지 45분 만에 망가져버린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던 나에게도,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발을 떼지 못하는 당신에게도, 남은 생을 바쳐 도대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 우리에게도. 언젠가 거짓말처럼 눈물이 멎는 순간이 오길 바라며. 계속해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일기장의 마지막 문장, 그럴 수도 있겠지.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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