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
매 순간이 피구와도 같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게임 같은 인생,
그리고 그것을 함께 살아내고 반복할 ‘우리들’에 관하여.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한 아이가 스크린 속에 등장한다. 좁은 화면 속에 걸쳐져 있는 여러 아이들 중에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한 아이. 시선을 가만히 내려놓지 못하고, 이곳저곳 눈을 맞추는 아이를 본다. 아이는 웃고 있다, 하지만 딱히 기뻐 보이진 않는다. 안 기뻐 보인다기보단, 그저 불안해 보인다. 지금의 상황은 한 초등학교의 체육시간으로 보인다. 중첩되어서 들려오는 다수의 말들이 그를 향한 비난임을, 혹은 그를 꺼려하는 반응임을 우리는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렇게 게임은 시작됐고, 공이 날아온다.
“야 이선! 너 금 밟았어.”
무섭게 날아오는 공보다 뚜렷한, 그것은 누구 하나를 향한 공격이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속도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내가 겪을 수 있는 것처럼 위화감 없이 느껴지는 ‘말’의 공격이다. 한 아이를 필두로 쏟아져내린 그 날카로운 것들은 처음부터 오갈 데 없었던 아이를 저 멀리 보내버린다. 그리고, 우리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뒤, 영화가 시작된다.
-정보 전달의 시간 (도입부)
1. 주류로 보이는 아이들이 보인다. 처음에 등장한 아이 ‘선’ 보다 훨씬 더 성숙해 보인다.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그 아이들을 선이는 힐끔힐끔 쳐다본다. ‘생일 때 청소해야 한다며’ ‘똑똑한 머리 좀 굴려보라던’ 아이들은 잠깐만! 하더니 선 이에게 초대장을 건넨다. 절대 건넬 리 없던 초대장을.
2. 깜깜한 방, 문틈 너머로 엄마 아빠의 대화가 들려온다. 보라에게 선물로 줄 팔찌를 만들다 말고, 열린 문 너머로 그 대화를 듣는 선이. 엄마는 잔뜩 김밥을 싸고 있고 아빠는 술을 마시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언급된다.
3. 다음날 아침, 여름 방학하는 날의 학교. 전혀 눈을 맞추지 않던 그들이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번의 선이는 꽤나 기뻐 보인다. 하지만, 그 뒤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의심이 확증으로 변하게 되는 순간이다. 선이 혼자 교실 청소를 한다. 하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4. 그리고 우리는, 선이는 몰랐지만 우리는 익히 알고 있던,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한 아이와 마주하게 된다. 헤드셋을 귀에 뒤집어쓴 채, 잔뜩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채 이 여름이 지나면 자신이 적응하고 살아남아야만 하는 교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아이에게 선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간다. 인기척에 놀란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선이는 말을 건다.
“아니..(뭔가를 하려는 것 아니라는 듯) 뭐 봐?”
“어?”
“아니 여기 우리 반인데, 누구 찾아?(절대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물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 너 3반이야?”
“응”
“어 나도 이제 3반인데.”
“어?”
“아니 나 오늘 전학 왔는데~”
얘 전학생!
“앗, 네!”
“아 저기! 너 이름이 뭐야?”
“나, 한지아. 너 이름이 뭐야?”
“나? 이선! 안녕.”
“안녕.”
한 아이가 대뜸 다른 아이에게 이름을 묻는다. 급히 선생님을 따라가던 그 아이는 뛰다 말고 선뜻 멈춰 서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준다. 그리고 똑같이 묻는다. 너는? 그 물음에 다른 아이가 기쁘게 대답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서로에게 거짓 없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둘의 첫 만남이 우연히 성사된 이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관계 맺는 방식이 너무나 앳되기 때문이다. 앳되다, 그래 이 말이 가장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우리가 매 순간 잃어가고 있는 이 표현.
처음 만난 그들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다. 주변에 친구 하나 없이 겉돌며 눈치 보던 선이와, 방어적인 태도를 띄고 있던 지아. 둘은 우연찮게 다리 위에서 만나고 또다시 대화를 이어간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한 조각들을 주고받는다.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그렇지만 반가울 만큼. 그들이 천천히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관객석에 앉아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그 흐름에 기꺼이 동승하여 이 친절한 영화로부터 매끄럽게 정보를 제공받는다. 기억을, 그날의 추억을 함께 사유한다. 이 영화를 봄으로써 나도 이 영화가 원했든(의도하였든), 원하지 않았든 나의 어렸을 적 기억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리고 ‘우리들’ 이란 영화와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모름지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감상하기 마련이다. 영화를 통해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체험과 관찰(혹은 둘 다 아님)의 경우가 있다고 하면 이 영화는 관찰을 통한 체험이다. 신비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들의 삶이 나의 삶이 되고, 나의 삶이 그들의 삶이 되는. 서로가 서로로서 살아주는. 기꺼이 되어주는. 뭔가 정서적인 교감을 전면전으로 이끌어낸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게 이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낸 승리에 대해 한 줄로 평하라면 나는 곧바로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할 것이다. 연기를 잘한다! 어색하지 않다! 는 게 아니라, 이 영화는 가장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장면들은, 그리고 이야기는 내가 자라나며 늘 보았던 하나의 광경이다. 심지어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 인위적이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조차 ‘연기’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글거리거나, 꾸밈으로 보이지 않는다니. 그저 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받은 공간 같다, 이 영화가.
정적이지만, 긴장 없이 늘어지지 않는 이 영화는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춤을 춘다. 보는 내내 편집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끝까지 철저한 ‘마이 페이스’를 지키며 달리는 이 영화는 또 다른,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하더라도 정말 ‘자연스럽게’ 그리고 ‘편안하게’ 우리에게 소개한다. 주요 등장인물부터, 그 주위의 인물들에게 이르러서까지 가지를 뻗어나가며 하나의 나무를 이루는 내용 설계가 정말 탄탄하다고 느껴졌다. 겹겹이 쌓인 감정의 결들처럼, 이 커다란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나이테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 한달음에 달려 나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솟아오를 수 있는 감정의 경우에는 그렇지만, 그 감정이 쌓이기까지의 소모된 상황들을 찬찬히 들여다 수 있도록 관객들을 인도한다. 카메라는 곧 시선이고, 그것은 영화를 통해 어느 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이정표이니까.
그럼 지금부터는 내가 친절히 안내받아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본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그러기엔 시간이 아까워서요.
들어가기에 앞서, 이 영화는 반복적인 행위를 어떠한 매개체로서 사용하는 것 같다-는 나의 얕은 생각에 대해서 적는다. 3번에 걸쳐 나오는 피구 씬. 그만큼 많이 등장한 매니큐어. 그것에 반하는 의미로 쓰이는 듯한 봉숭아 물. 첫 번째부터 마지막까지 올곧게 등장하는 조절 가능한 팔찌. 술을 마시는 아빠, 끝까지 근심 걱정뿐인 할머니, 쥐어터지든 말든 놀다 오는 동생, 등등 쓰다 보면 더 많겠다. 아 그리고, 몇 군데로 제한되는, 하지만 그곳을 조화롭게 오감으로서 하나의 리듬으로서 사용하는 배경 공간들에 대해서도 ‘반복’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이야기할 법하겠다.
우리들은 곧 아이들로 읽히기도 하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어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나이에 대해서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관계 문제에 관하여 가장 어린 동생과, 그리고 아버지와-할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 조명해보도록 하자. 사실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쓰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너무 많이 다뤄진 것들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말이다.
1.
아버지의 첫 등장은 깜깜한 밤, 식탁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친할아버지)의 병 소식에 대해서 언급하며 두 부자관계를 수면 위로 부상시킨다. 남편은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가지 않겠다고 한다. 뭐지? 싶다. 우리는 의아해한다. 왜지? 왜일까. 그 뒤로도 영화는 가족이 함께 병원에 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돈 많이 나왔어?” “당신 지금 그게 문제야, 돈 많이 들더라도 좋아지시면 다행인 거지.” 하는 장면들도 있다. 남편은 병원에 가서도 차 안에서만 기다리다가 병문안을 마친 가족이 돌아오면 그저 운전수인 것처럼, 차를 몰고 출발한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 정말 그 장면만이 무한히 반복되겠다-싶을 정도의 ‘고집’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어떠한 이유를 묻지 않아도.
그러다 영화 후반부에서 선이와 지아가 싸우고 엄마의 전화에 불려 나온 순간, 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뜨신 뒤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텅 빈 병실을 찾아간 그 사람,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방황한다. 미련이 가득 남아 눈앞을 가린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들은 그렇게 바다로 간다. 화장한 것을 저 먼 곳으로 돌려보내려는 모양이다. 그렇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은 그렇게 버티다가 사라졌다. 찾고 찾아도, 절대 찾으러 가지 않았으니까.
흔적 기관인가,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어떠한 어른들에게는, 혹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무던해지려’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수많은 감정들이 모두 다 흔적 기관 같은 나부랭이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2.
동생은 계속해서 (엄마 왈 ; 레슬링인지 뭐시긴지)를 하느라고 자꾸만 어딘가를 다쳐서 온다. 엄마는 그 친구의 엄마의 전화에 대응해주느라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한 번만 더 하면 경찰도 부르겠다며. 유난이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연우랑 놀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동생은 그래도 연우랑 놀고 싶어!라고 말한다. 하루는 그러한 상황들이 무던히 반복되다가 그 둘의 몸싸움을 눈앞에서 본 선이가 연우를 때려서 상황을 중단시키기도 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 ‘돌보아야만 하는 대상인 동생’에게 모든 관계가 틀어진 선이가 묻는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젠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선이가 묻는다. 너 또!-라며. 하지만 그때, 동생이 말하는 그 유명한 대사. 그럼 언제 놀아? 아, 세상에. 이 대사를 듣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쳤을까. 때린 만큼 나도 갚아주려고 또 때리다 보면 언제 같이 놀 수 있냐는, 자신은 놀고 싶다는, 그래서 어른의 논리 대로라면 한대 더 때릴 것을 그냥 넘기고 함께 놀았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그 말. 그 진심.
그렇다, 기브 앤 테이크는 요리보고 조리 봐도 어른의 논리이다. 이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아이들이 주류로 있는 공간에 대비되게 나오는 선생님(상징성을 띄고 있는) 또한 그렇다. 각을 맞춰서 사고하고 나와 당신의 반작용을 걱정하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사고방식.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그러한 사고방식들을 ‘이질적이라’ 느낀다. 조금 더 생에 가까운, 축복의 시간에 가까웠던 아이는 그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게 제일 좋으니까.
3.
줬던 것을 ‘빌려줬던 것이라며’ 말하기도 하고, 시간을 들이고 천천히 물들어가야만 하는 관계에서도 매니큐어 같은 퀵 방식을 택하게 되기도 하는. 그리고 막연히 미워할 대상이 필요해지기도 하며, 주류에 붙어있지 않고서야 불안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기도 하는. 그다지도 사랑했던 사람을 모두 앞에서 깎아내리기까지 하는. 정말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닌 표정들만을 짓게 되는. 다가가기 무서워 다시는 만나지 못할 방법만을 택하게 되는, 우리들.
처음에는 분명 그들에게도 어떠한 논리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밤새 만들었던 팔찌가 다른 아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줘버렸고, 대뜸 주고 싶은 물건이 생겨 훔쳐서라도 주고,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뭣도 없더라도 함께 있었던 것처럼. 가장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만을 들려주었던 그날의 우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럴까. 주인공들의 표정마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 느껴질 정도로.
이것은 정말 왜일까. 서로의 다름이 서로에게 너무 상처가 되어서 그랬나? 둘이 너무 빠른 시간 내에 가까워져서 그런가? 정말 이 모든 게 다 ‘사춘기’라는 이름을 가진 시절 때문에 그런 것일까? 혹은 우리 모두 어떻게 해서라도 이토록 보잘것없는 어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일까?
우리에겐 분명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겉껍데기만 반짝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 속까지 전부 당신에게 내어주기까지의 시간이. 그리고 당신의 빛으로 내가 빛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말이다. 참 웃기다. 그리고 안타깝다. 어른들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하다니. 어떻게 해도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니.
이렇게 적어놓으니 내가 이 영화에 관해서 후반부에 이를수록 굉장히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완벽하게 생각이 바뀌었다. 딱히 무언가 바뀔 것은 없었지만,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초반부를 볼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편안하다 느꼈다.
마지막으로 적어 볼 것은 감독이 던졌든 안 던졌든 내가 패스받은 이 영화에 넘쳐나는 희망적인 담론에 관한 것이다.
-어린 날, 그냥 오늘날, 나를.
피구 씬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불안하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오는 의심병이기도 하고, 파블로프의 개마냥 앞의 몇 번의 씬에서 우리가 보아왔던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얼굴에 고의로 퍽 맞춘다던지 그러려고 하나. 여튼 노심초사 불안해진다.
피구는 금 하나만 밟아도 죽는다. 게임의 룰이 그렇다. 때려서 맞으면 죽고, 못 피하면 죽고, 마지막 한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그런 게임이다. 어찌 보면 아이들이 하는 게임에서 ‘죽었다’라는 워딩이 등장하는 것을 보며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도 이것은 어른의 논리다. 뒤집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것. 언제든 다음 판 ‘생’ 이 돌아올 수 있고, 매 순간 자신의 힘으로 생과 사를 결정할 능력을 얻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게임(놀이)처럼 살 수 있도록, 연습하는 장이고, 반복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매 순간 다르게 재밌게 즐기라고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찾아올 테지만, 너의 주도권을 잡으라고, 그리고 너에게 패스해줄 사람을 찾으라고.
선이는 아껴두었던 실을 꼬아 팔찌를 만든다. 그 실 팔찌에는 특이하게도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늘리고 싶을 때 늘려 팔에 넣고, 빼고 싶을 때 편하게 뺄 수 있는 것이다. 끊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그것의 한계를 오갈 수 있다. 나는 이 팔찌가 유한한 우리의 관계에 융통성을 부여해주는 상징이라고 보았다. 가끔은 멀어지기도 해야 한다는, 나의 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정말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내게도 저런 팔찌 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말만을 덧붙이고 싶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때가 되면 찾아오는 계절 복숭아 같은 거. 하지만 물복인지 딱복인지는 척 보고는 모르는 것. 내가 원한다면, 내가 다가가 서슴없이 한 번 꾹 눌러보든, 큰맘 먹고 한입 베어 물어보든 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해보면 아는 것. 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르는 것. 그게 관계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계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반복’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음껏 연습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장 어린 날의 우리들처럼, 가장 단순한 생각만으로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외로워 울지 말자고. 두려워 떨지 말자고. 함께 하자고.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복수형인 것이다.
이미 다 지나가 버린 ‘우리들’의 꿈만 같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이 영화가 열린 결말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지 않은 채로, 아이들의 독립적인 선택으로 꿈꿀 수 있도록 남겨진 결말이 참 좋다. 결말이 마음에 드는 영화라니, 그게 아마 제일 어려울 텐데 말이다. 이영화의 에필로그가 있다고 하면 당연히 이것이다-라고 꼽을 만한, 이상은의 ‘어린날’을 들으며(또한 읽으며) 감상평을 마무리한다.
덧없이 자연스럽고, 한여름 복숭아 같았던 영화.
이런 나도 당신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앳된 단면에 관하여.
+사족
나는 당신이 될 수 있을까? 정답은 당연히 ‘아니’다.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그저 머릿속 상상일 뿐이다. 내겐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대, 당신을 향한 하나의 작은 몸부림 같은 애정 어린 앙탈. 내가 어찌 감히 당신이 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당신조차 내가 되지 못하는데. 우리 모두는 결국 제각기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갈 뿐이다. 나와 당신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유효하다. 그리고 그 다름을 망각한 채, 덧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내가 물복이든, 당신이 딱복이든 간에. 또한 우리 모두 싱그러운 복숭아가 아니게 될지라도.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 다만 두려움 없이. 이것이 내가 가지게 된 어른도 아니오, 아이도 아닌, 나만의 논리이다. 아니, 나만의 용기이다.
2017.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