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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Mar 16. 2018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네며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네며>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sin.1992. alfonso arau.


나의 경우, 지극히 나의 경우에는.


양파를 썰다 보면 열에 아홉은 울곤 한다. 운다기 보단, 그냥 눈물이 난다. 어쩌다 진짜 매운 양파를 썰면 그냥 눈물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맥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그렇게 울어젖히다 보면 양파를 썰다 보니 울게 된 거면서도 그게 비단 양파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갈 때가 있다. 내가 이유 없이 울 리가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에 관한 생각이며, 어디 가서 울기 싫어서 양파를 썰면서 우는 것으로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그런 생각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울다가도 웃음이 헛헛하게 나온다. 멋쩍다. 멋쩍은 웃음이 삐질삐질 나온다. 양파를 썰면 눈물이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리고 이미 울고 있는데도, 그 사실이 웃겨서 웃음도 나오고, 결국엔 이 모든 일이 양파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웃겨서 그렇다. 여기서 더 엉엉 울수록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웃는 게 참 눈물겹다.


이 영화의 첫인상 또한 그랬다. “양파는 잘게 썰어야 하죠.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을 막기 위해서는 양파 조각을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이 좋아요.” 라며 느닷없이 썰던 양파를 집어 머리 위에 올리질 않나, 이미 울고 있으면서 “양파를 썰면서 울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니까요.” 같은 말을 하질 않나.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자막이 되어 힘겹게 내 머릿속에 읽히고 있는 동안 이 영화가 주는 느낌이 이상했다. 이상하고, 어딘가 웃기고. 정겹기도 했으며 또한 엄격했다. 



주황색 머리칼, 그녀의 깊고 검은 눈, 또한 흔들리는 흔들림 없는 눈.


너른 농장 밖으로는 가정집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섬 인양 괴랄한 성(성 같은 집) 안에서는 전혀 바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이 영화의 배경에 ‘여성’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여성이다. 사실, 앞서 등장한 그 양파 써는 분이 ‘띠따할머니’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언급한 순간 우리는 이미 그들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으리라. 


그 집안의 중심에는 어머니 ‘엘레나 부인’ 이 있다. 그녀는 막내딸을 식탁 위에서 낳았으며, 그 직후 남편을 떠나보냈다. 그녀는 가족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 막내딸 ‘띠따’의 결혼을 금지하였으며, 농장일을 해서 식구를 먹여 살렸다. 그녀는 집안의 기둥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를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 양 굳건히 지키고 있는 기둥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에서는 그녀 자체가 관습이며 제도이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가히 위대하다. 그녀가 하나의 기준으로서 굳건히 존재하기에, 그것에 영향을 받는 다른 이들의 캐릭터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억압하고 있기에, 억압받는 띠따가 나오고, 그녀가 자유롭지 못하기에, 헤르뚜르리스가 더욱이 자유로워 보이며, 그녀가 권력을 휘두르기에 그 권력에 길들여지는 로사우라가 보여지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서있는 곳, 그 집이 바로 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공간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개 속에 아마도 내가 띠따에게 처음으로 느꼈던 주제넘는 감정은 바로 동정심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이 영화에 치고 들어온 페드로가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눈빛 하나로 그녀를 사로잡고, 그 또한 그녀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할 수 없었다. 결혼이라는 말보다는 둘이 함께할 수 없었다. 둘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것조차 안됬었다! 왜냐면 그 속에 사랑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띠따는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둘은 (페드로의 독단이지만) 정말 모험적인 선택을 한다. 바로 페드로가 띠따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을 처음에는 띠따 조차 이해하지 못하였고, 나는 영화가 흘러 흘러갈 동안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 그들의 한지붕 두 가정이 시작됐을 무렵 본격적으로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반격할 무기를 쥐어준다. 그것은 바로 



식탁의 힘이다.


영화의 주인공 ‘띠따’는 식탁 위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영화의 두 번째 장면이고, 처음 보는 순간 정말 ‘할 말을 잃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어느샌가 소금이 되어버린 눈물의 물결을 타고 식탁에서 삶을 시작한 그녀.  어머니 대신 나챠의 손으로 부엌에서 길러진 그녀. 그녀는 그곳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태초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한 요리들은(행한 마법들은) 이 영화에서 크고 작게 다뤄지는데, 그중에서도 긴 호흡으로 다뤄진 것들을 이야기해보자면  로사우라의 결혼식장에서의 케이크, 장미꽃 메추리 요리, 마지막 결혼식에서의 구운 피망 요리 등이 있겠다. 이 장면 전까지는 어떻게 보면 맥락 없고 너무 빠른 전개였던 영화가 잠시 멈춰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가 그녀의 요리에 귀를 기울이고 향을 맡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호흡이 느긋하고, 신중해진다. 그리고 정말로 마법이 벌어진다.


그들은 가장 기쁜 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토악질을 하기도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르가즘을 느끼며, 행복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춤을 추게 만든다. 그렇다. 이것은 이 영화가 영화로서의 힘을 통해 그녀에게 쥐어준 말하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는 ‘언어’였으며, 능력이었으며, 무기였다. 답답한 제도를 보여주며, 동시에 영화적 틀을 깨버리는, 그녀에게 선물한 카타르시스였던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일관되게 ‘사랑을 듬뿍 담은 차이(힘)’이라고 명명한다. 그 힘 덕에 그녀는 그와 교감하고, 또한 많은 이들과 교감할 수 있었으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었으며, 둘째 언니 헤르뚜르리스를 집 밖으로 보낼 수 있게도 되었다.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누군가의 굴레를 끊어준 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은 그 힘일 뿐, 모든 걸 어떻게 하진 못했다. 이쪽저쪽 기우는 마음을 굳건하게 유지할 수 없었으며, 모든 것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질 순 없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 힘조차 감히 사랑을 관장할 수는 없었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마음이 제갈길을 잃은 양 방황하다 끝내 서로를 찾아가긴 찾아갔고, 그들은 지금껏 이룰 수 없었던 정사를 가지기 위해 헛간 안으로 향했다. 마지막 씬이 시작되고 나서 우리는 그 흐름 속에 감히 끼어둘 수 없다. 둘만의 교감. 이제야 둘만 남았어!라고 외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해도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마음속의 촛불을 다 태워버린 그는 더 이상 불태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없고, 홀로 남은 그녀가 내린 결정은 굳게 닫아두었던 상자의 문을 열고 성냥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상황 하나하나, 그때의 눈빛 하나하나를 되새김질하며 아껴두었던 성냥을 씹어먹는다. 보고 있는 사람이 점점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즈음에 드디어 그녀의 불이 타오른다. 불길은 금세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던 곳까지 번진다. 그녀는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을 택했다.


어떤 사람이 이 결말에 대해 ‘이 영화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도발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더라.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결말에 이다지도 집중할 수 없었던 게 (이 글에서 조차 갑자기 결말 얘기를 해버리고) 내 안에서 이 영화의 끝은 한참 전에 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이 영화를 설명하려 들면서 내가 온전히 지워버린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당신은 아마 조금 다른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 속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종종 우리는 눈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한다. 마주 보고 있노라면, 서로가 보인다고들 한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는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이 굉장히 노골적인데 개중 마지막 행복의 식탁 숏에서 유일하게 눈을 마주치는이 없이, 하루의 춤도 거부하며, 혼자 눈물을 훔치는 이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시선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그의 임팩트 있는 첫 등장은 주인공 띠따가 홀로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을 때, 그녀가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겠다 자신의 입으로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점점 죽어가고 있었을 때이다. 그는 의사로서 환자인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발가벗고 있었고, 좀 전에 나왔던 강간 장면이 나는 굉장히 충격적이어서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채로 벌벌 떨고 있었고, 나도 함께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의사는 옷을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것이 그의 첫 등장이었다.


그녀는 카펫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를 따라 병원으로 갔다. 정확히는 병원으로 보내졌다. 해가 다 질 때까지, 마차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카펫은 아마도 바닥 위를 표류하였을 것이다. 더딘 마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속을 떠나왔을 것이다. 이 카펫이 전에도 한 번 등장했었는데 그때는 바로 헤르뚜르리스가 집을 떠났을 때였다. 그녀는 그때도 이 카펫을 두른 채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었고, 여담이지만 나는 이 카펫이 우리가 차마 잴 수 없는 그리움의 길이를 상징한다 생각한다.



“어머니의 명령에서 해방된 손을 보며 띠따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혹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새가 되어 날 수만 있다면 멀리 날고 싶었다. 세상에서 혼자 멀어지기 위해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싫었다. 얘기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의 삶은 죽음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짓눌린 채로 너무 가벼워져버린 그녀가 천천히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즈음, 그는 죽음으로부터 그녀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나는 끝까지 그를 의심했다. 상처받은 주인공에 어느샌가 동화되어서 그조차 그녀를 못살게 굴거나, 혹은 잘해주다 떠나가버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으며, 그녀와 친차를 다시 한번 만나게 해주었으며, 수프를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프를 먹음으로써 다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날아갈 듯 가벼워져버린 미약한 몸을 삶의 경계선까지 있는 힘껏 기울였다. 그녀는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바꾼다.

 

그는 그녀가 원치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자리에서 함께 기울었을 것이다. 그는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사랑한다 말하였으며, 결혼을 약속했다가 파혼이 눈앞에 닥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노라고, 영원히 당신을 축복하겠노라고 말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가도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밥을 먹다 말고 뛰쳐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키스를 나눈다. 그것은 사랑의 표시이자,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앞서 말했듯이 페드로였으니까.


영화의 후반부 즈음, 그들이 어쩌다 보니 ‘사돈지간’이 되어서 서로의 자식을 새 터전으로 보내며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는 소리 내어 인사한다. 바이나! 였던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예전 결혼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그는 빨리 돌아오겠노라며 바이나!라고 띠따에게 소리 내어 인사한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그 자신도 차에 올라탄다. 마차를 타고 더그더더그덕 다녔던 세월이 어느새 흘러 이제는 자동차가 있다. 그는 차에 올라탄 뒤, 영원토록 그곳에 남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에게 깊은 눈인사를 보낸다. 모자를 살짝 들어 보인다. 그리고 출발한다. 그는 소리 내어 경쾌하게 인사할 수 없었으리라, 말을 힘껏 몰아세워 빨리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사람에게 영원한 축복을 남기고,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남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액셀을 밟았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과의 이야기, 요리의 힘, 관습과 제도 등등 정말 여러 것들을 다루지만, 내게는 이 장면 이후로 영화가 잘 보이지 않았더란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을 잘 알고 있어서. 그가 이제껏 보내온 시간과, 앞으로 닥쳐올 시간들에 대해 내 마음이 동해서. 차마 웃으며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가 남긴 소리 없는 인사를 떠올리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에겐 과연 사랑을 하기에 적절한 마음이 있을까, 한 번 생각해본다. 사랑하기에 완벽한 감정의 온도,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쌉싸름하지 않은 달콤하기만 한 초콜릿이 있을까 한 번 바라보기도 한다. 생각 없이 보고 나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이 영화가 참 밉다. 이 영화를 다신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담.


후에 이 글을 쓰면서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사실이라 함은 ‘그는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가족이 되지 않고서는 그녀와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집 안에 갇혀 있었고,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도망을 간다고 간 곳 조차 다락방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언니가 홀 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나아갈 때의 모습이 가히 인상적이었던 것이고. 그렇다. 그들이 결혼에 목을 맨 이유, 가족이 되지 않고서는 함께할 수 없었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201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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