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트로커>
-hurt locker. sin.2010.Kathryn Ann Bigelow.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자신의 몸에 폭탄이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자신에겐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고.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도와달라고. 이것들을 좀 제거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거리 한복판에 무릎을 꿇었다. 손은 하늘을 향해 올렸다. 제임스 중사가 그의 몸을 더듬었다. 수많은 폭탄과, 전선과, 강철로 만든 걸쇠가 거기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물쇠 하나를 겨우 뜯었다. 그러곤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일어나야만 했다. 그는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달렸다. 뒤를 돌지 못한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대로 폭발했다. 그것이 제임스 중사가 속한 브라보 중대의 마지막 임무였다.
한 번만 더 적어서 남겨두고 싶다. 그는 미쳐 뒤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허트 로커라는 영화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는 걸.
덜컹이는 길 위로 덜컹이는 로봇이 구른다. 조작당하는 대로 조작당하다 이내 폭탄 앞에 당도한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 흙먼지, 낡은 건물 따위가 흔들리며 교차된다. 로봇은 다시 돌아오고 군인들은 폭탄을 폭파할 새로운 폭탄을 수레에 싣는다. 그들은 멋진 버섯구름을 기대하며 로봇을 다시 보내지만, 어라. 수레의 바퀴가 빠졌다. 하는 수 없지. 세 명의 군인들 중 책임자인 톰슨 중사가 보호구를 입는다. 이상하게 버거가 먹고 싶다며 엘드리지 상병과 샌본 병장과 가볍게 인사를 한다.
그는 수레바퀴를 향해 걷는다. 널브러진 폭탄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서 모든 걸 차분히 마치곤 뒤돌아 다시 걷는다. 위태로운 일들이 술술 풀려간다. 뒤에 남은 둘은 사업을 해야겠다며, 잔디가 어쩌네 저쩌네 얘기를 한다. 그러던 와중 엘드리지는 무언가를 본다. 저쪽 어딘가에서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을 말이다. 순간, 그는 패닉에 빠진다. 총을 들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라 소리치며, 낯선 자를 향해 뛴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하지만 발포하지 못한다. 쌓여가는 긴장과 고성 속에 핸드폰이 울린다. 톰슨 중사가 굉음과 함께 허공에 뜬다.
절름발이 고양이가 화면에 쓱 등장했다가 휘청휘청 어디론가 걷는다.
사람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를 간단하게 설명하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불친절하다고 하기엔, 몰입감이 높고. 영화 내내 이라크를 벗어나는 장면은 단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배경이 단조롭지만, 결코 지루하진 않다. 전쟁영화라는데 유혈이 낭자한 전투씬이 있거나, 폭탄들이 검은색과 빨간색으로 번쩍번쩍 거리진 않는다. 그것들은 때로는 벽돌처럼, 때로는 가스통처럼 생겼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흰 박스 속으로 사라진 톰슨 중사 대신 제임스 중사가 폭탄을 해체하는 걸 지켜보고, 제임스는 계속해서 폭탄을 해체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끝까지 그것이 반복된다.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다른 이들을 통해 전쟁터에서의 내일이 찾아온다. 하루씩, 딱 하루씩 살아남는다. 겉보기엔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그런 내일이지만 인물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게 주고받게 되는 감정들로 인해 만들어진 서사가 이 삭막한 나날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간다. 누군가에겐 내일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그러하다.
한 번 본 뒤로, 딱히 ‘좋아하는 장르’가 아님에도 몇 번이나 몰아 보았던 건 이 영화의 호흡이 뛰어났기 때문일 테다. 한 시퀀스에서 다음 시퀀스로의 연결이 잘 맞물린 톱니바퀴 마냥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기에,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여기는 전쟁 중인 이라크고, 우리는 폭발물 제거반이고, 무슨 임무를 맡고 있고, 얼마나 됐고, 나는 누구고, 하는 구구절절한 설명들은 다 버린 채로 마구 흔들리며 나아가는 이 영화가 보여준 인물들이란 어떠한가? 제일 중요한 건 제임스 중사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다른 두 명의 경우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야 또다시 맞물릴 테니까.
영화 속에서 제임스 중사의 동료들인 샌본과 엘드리지는 끊임없이 패닉에 빠지곤 한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술 처먹고 게임도 하고, 상사를 확 때리기도 하고, 확 죽여버릴까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저도 언젠가 떨지 않고 당신처럼 폭탄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은 무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고, 자신을 무능하게 만드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말을 나누던 사람들이 죽는 꼴을 그들은 몇 번이고 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끊임없이 죽어가는 곳에서.
엘드리지의 경우, 그는 영화 도입부에 죽은 톰슨 중사의 영향으로 캠브리지 군의관에게 꾸준히 상담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그는 죽고, 이렇게 하면 그는 다시 살아요. 총하나에 달린, 폭탄 하나에 달린 목숨들이 얼마나 참을 수 없이 가벼운지, 그리고 괴로운지. 그는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뱉어낸다. 언젠가 당신이 일터에 직접 나와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다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며 말한다. 놀랍게도 친절한 군의관은 진짜로, 직접 현장에 나온다. 그리고 엘드리지가 보는 눈앞에서 또다시, 뜻밖에 상황으로 죽는다. 엘드리지는 절규한다. 방금 전까지 여기를 걸어가고 있었다고!!!
사람을 잃는 것. 그것에 대한 공포를 다루다 중후반부에 이르자 엘드리지는 제임스 중사의 명령 하에 패닉 상태에서도 총알을 벅벅 닦아 건네주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 하나를 쏴 죽인다. 그럴 수 있게 된다. 총소리에 놀란 염소 떼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엘드리지 덕에 사막에서의 미션이 성공했다. 며칠 후 그는 제임스의 독단으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다 낯선 자들에게 끌려간다. 다리 하나를 잃고 그의 면전에 대고 저주를 퍼붓다 지긋지긋한 사막을 떠난다.
샌본의 경우, 여자는 있냐는 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꾸만 애를 가지려고 귀찮게 군다 말한다. 확 그냥 원하는 대로 해버려-라는 제임스의 말에 그는 안된다고. 자신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던 그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전역을 이틀 남기고 도저히 못하겠다 말한다. 파편이 오 센티만 빗겨나갔어도 자신은 개죽음을 당했을 거라고. 더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아이를 가질 것이라 말한다. 엘드리지가 떠나고 나서도 제임스 곁에 남아있었던 샌 본 마저 그렇게 떠난다.
그들은 버티지 못했다. 살아남긴 남았지만, 버티진 못했다. 왜일까, 무엇이 그들을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을까. 아마 그것은 자신 또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것 때문이었을 테다. 나는 엘드리지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었다. 매 순간, 언제든, 어디에서든 사람은 죽고, 자신 또한 그럴 수 있다. 죽음은 항상 나의 목덜미를 잡고 서 있다. 내일은 당연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워 떨고 있는 나조차 누군가의 생을 앗아가는 사람이었다. 적군이건, 아군이건, 무엇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다. 더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내 생각에는 그렇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때 무너지니까.
이제 모든 이들이 다 떠났으니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원래 처음에 등장한 사람이 주인공이라기보단,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람이 주인공 아니었던가. war is a drug라는 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명제 그 자체인 사람. 모든 핸드헬드 숏들을 상징하고 있는 그 사람. heart lock-er인 줄 알았는데 hurt locker 였던 그 사람.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자, 죽음의 흔적을 늘 모아두는 제임스 중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는 이 사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메라가 얌전히 삼각대에 놓이길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자신의 맨살로 죽음을 느끼길 원했다. 그들의 첫 임무에서 제임스 중사는 로봇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걸어간다. 그 이후의 임무에서도 단 한 번도 로봇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폭탄을 해체하는 로봇 마냥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에서 가장 먼 사람이 아니다. 873번 정도. 그리고 그 이상으로 죽음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몸소 기어들어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올 때 희열을 느낀다. 어 나는 이러고도 살아남았네 하며, 말 그대로 ‘살아있음’을 체감한다. 꼬여있고 위태로운 것들 앞에서 그는 멈추지 않는다. 드러낸다. 마주하고, 직관적으로 사고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달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베컴이었다. 5달러를 외치며 디비디를 팔던 그 아이. 베컴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에 그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꽁꽁 잠가두었던 마음에서 개인적 감정이, 연민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잊고만 살았던 집에 전화를 걸어 수화기 너머로 생사를 확인하곤, 탈영을 해서라도 그 아이의 생사를 본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부대를 떠난다. 자신을 언제나 높은 위치에 놔주었던 밝은 머리색과, 밝은 피부색이 자신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는 거리 한복판으로 나선다. 총도, 폭탄도 없이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던 푸른 장면들이었다.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온 그는 곧바로 다음 현장으로 향한다. 자살 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화재 현장에서 그는, 이 상황을 초래한 어떤 이가 숨어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지시한다. 지시라기보다는,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것에 가까웠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흐려진 이성으로 인해 자신의 하관인 엘드리지가 한쪽 다리를 잃는다. 이 영화에서 걷는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한쪽 다리를 잃는 것은, 자신의 책임으로 누군가를 죽일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부대로 돌아와 걸친 것 하나 벗지 않은 채로 물을 맞는다. 좁은 구석에 처박혀 꺽꺽 소리 낸다. 다시금 느끼게 된 인간적인 감정들. 그런 것들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그는 물을 맞는다. 식히고, 씻어 내린다.
그 후 그는 또다시 현장으로 향한다. 한 사람이 폭탄으로 칠갑을 한 채 도와달라고 비는 곳으로 말이다. 유난히 탁 트여있는 곳이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이 글의 첫머리에 적어두었듯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웃기지 않은가. 의사가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듯이, 전 세계 어디에도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들은, 특히나 그는 영화 내내 전지전능한 신처럼 모든 일들을 해결했다. 때로는 자신들의 손에 쥔 폭탄과 총으로 거만하게 굴기도 했었다. 그런 그들이, 그런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해자이자, 보호자이자, 피해자이자, 방관자였던 그들. 그들 모두는 굳게 채워진 폭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뒤로 피하고 있을 때, 그는 나약한 자기 자신을 느꼈다. 마지막 임무가 자신의 실패로, 자신의 실패로 인한 누군가의 죽음으로 남았다. 그는 깨끗하게 뒤돌지 못함으로써, 그곳에 마음을 남겨두었다. 미련을 남겼다.
죽는 것에 대해서는 실상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못했을 제임스 중사는 절대 모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푸른 하늘에 뜬 연이었다는 걸.
제임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비 오는 날, 지붕 위 빗물받이에 낀 낙엽들을 굳이 맨손으로 덜어낸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와는 사탕과 함께 다 터져버린 많은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전쟁 얘기나 하고 자빠졌다. 자신의 아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똑같은 장난감 속에서 똑같은 장난감이 나오는 것을 보고 웃는 것을 보며 신기해한다. 그러곤,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할 아이에게 자신에겐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는 생을 위협하는 오만 색의 배선과 뇌관보다 시리얼 박스 앞에서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책임지는 데에 있어서 무능했다. 그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내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다. 도입부의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war is a drug. 중독. 중독이라는 것은 선택하고 사고하지 않는 것, 혹은 당연하게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에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그는 오직 사는 것만을 생각했다. 눈앞에 폭탄이 있으면 직관적으로 사고해서 그것을 해체했다. 그것이 그를 유일하게 살아있게 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저 올곧게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그것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만을 원했을 뿐이다. 시리얼 박스야말로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난제였다.
이 영화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기보단, 가장 사실적으로 드러낸 제임스라는 이 인물. 인물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해선 비판적이라기보단 오히려 나이브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쓴 것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다 나는 이 사람이 조금은 이해돼서였다. 무엇이 지금 나를 살아가게 하는지. 다른 누군가에게는 삭막한 곳이지만, 내게는 정겨운 집이 어디인지 나 또한 내게 묻고 싶다. 그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어디로 가는 것이 과연 ‘나아가는 것’일까. 차분히, 무엇을 잘라야 할지 생각해야겠다. 이제 365일 남았다.
2017.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