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지수는 자신을 찾고 싶다.
하퍼 리의 오래된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제목 뜻은 극 중에서 아이들이 앵무새 사냥을 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핀치는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일깨우는데,
여기서 앵무새는 힘없는 유색인종이나 소외받는 가난한 사람 같은 약자의 상징이다
<앵무새 죽이기> 출판사 제공.
지수가 진호를 만난 것은 스무 살 가을이었다. 아니, 가을이라고 할 수 있나? 벌써 11월 초였으니까. 아, 그리고 만났다고도 할 수 없겠다. 핸드폰 화면 너머에서 지수라는 가짜 이름을 진호가 확인했을 뿐이니까. 대 여섯 장 즈음 있는 프로필 사진을 넘겨볼 때, 사실 진호는 지수의 마음에 썩 들진 않았다. 다만 마지막 사진에 같이 나온 강아지와 빨간 포대기가 귀여웠을 뿐이었다. 그와는 매치될 생각이 그닥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오른쪽으로 넘겼을 뿐. 그러고 나서 보니 번쩍 올려 깐 이마와, 눈썹이 나름 잘생겨 보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커피 한 잔 마시다 보면 다음 잔이 생각나고, 저녁께쯤 되면 또 한잔이 먹고 싶은 마음처럼. 너무나 당연스레 그와 매치되었다.
인터넷상의 관계는 참 두리뭉실하다. 매치된다고 해서 저 사람과 내가 맞는다는 얘기도 아니고, 매치된다고 해서 이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될지 혹은 실제로 만나게 될지도 모두 모르는 것이다. 지수는 진호와 매치되고 나서 진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일지 잠시 상상해보았다. 대뜸 나이 어린 자신에게 섹스하자며 만나자고 할지,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따위의 것들을 말이다. 지금까지 매치되었던 사람들이란 전부 그러했다. 지수라는 가짜 이름과, 화면 너머로 싱긋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 그리고 20살이라는 어린 나이를 보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발정 난 듯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지수는 어딘가 물어뜯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관계라면, 자신이라는 존재는 저 멀리 버려진 채 자신이 보지가 되어서 누군가에게로 팔려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런 것일 테다. 지수는 잘하는 거라며 매번 그들과의 매치를 취소했다. 지수야 만나자, 지수야, 지수야, 지수야, 우리 섹스하자. 지수야. 이렇게 보내오던 한 남자와의 매치도 마지막으로 취소했다.
아 진호는 어떤 사람일까. 이제는 인터넷상에서 만나 실제로 만날 사람은 없구나 생각되니, 이건 그저 심심풀이 장난이었다. 이 사람은 몇 살일까? 강아지는 자기 집 강아지가 맞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진호에게 처음으로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라고.
진호는 대화를 이어가는 내내 성적인 이야기는 물론, 반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 지수는 조금 놀랐다. 앞서 이야기했던 남자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대신 자다가 갑자기 비염이 생겨서 깼다느니, 흥하고 풀었다느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지수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피식 웃었다. 이 사람과 진심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지수는 종종 진호에게 노래를 추천해달라고 했고, 그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버스를 탔다. 생판 모르는 남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밥은 먹었는지, 학교는 갔는지, 그가 쓰는 합합 같은 추임새도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지수는 그때마다 진호의 사진을 봤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호는 운동과 패션,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수는 글과 영화가 좋다고 대답했다. 지수는 술을 잘 마셨고, 진호는 술을 잘 못했다. 대신 커피를 하루에 석 잔씩 마셨다. 지수는 담배를 피웠고, 진호는 담배 연기를 싫어했다. 대화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잘 자라는 인사도 잘 잤냐는 인사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짗궂은 농담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나랑은 할 생각 없어? 이런 거.
어느 날 지수는 진호가 추천해준 노래를 들으며 명동 거리를 걷다가 할인 표시가 붙어있는 화장품 가게에 들어갔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아서였다. 평생 안 써봄직했던 색조 화장품이 눈에 들어왔다. 지수는 그것들을 집어 계산했다. 빨간색, 노란색, 금색 섀도우였다. 지수는 과감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이 끝나고 집에 온 다음날. 지수는 그 화장품들로 화장을 했다. 눈두덩이가 깃털처럼 노랬다. 지수는 생각했다. 이게 지수일까? 지수다운 얼굴일까? 노란색 화장을 한 자신의 얼굴은 앵무새 같았다. 거울을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게 저예요. 이래도 저를 사랑하세요? 진호에게 물었다. 진호는 거기 없었지만.
지수는 그렇게 화장을 한 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앵무새 화장법>이라는 글이었다. 사실 이런 글은, 글을 좋아함에도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것이었다. 이건 누군가에겐 한낮에 지루한 버스를 타고 가며 읽을 만한 소설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진호와의 일들은 모두 확답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간의 만남에 대한 짧은 글을 다 써 내려갔을 때 즈음 지수는 정말로 무서워졌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더 이상 '가벼운'관계가 아니게 될까 봐. 만나면 손을 잡고 싶고, 입술을 부비고 싶고, 얼른 달려가 안기고 싶어 질까 봐. 지수는 무서워졌다. 이런 저를 사랑하세요? 이런 저를 사랑하시나요? 지수는 그날 이후로 매일 같이 다른 화장을 했다. 하루는 초록색 앵무새로 변신했고, 하루는 보라색 앵무새로 변신했다. 화장을 한 자신은 얼룩덜룩하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그리고 화장을 하지 않은 자신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수수했다. 진호가 아는 얼굴은 화장을 한 지수라는 사람이었다. 지수는 이제 진호의 이름마저 의심했다. 진호는 진호가 맞을까? 하고.
하루는 진호가 지수에게 오늘 시간이 괜찮으냐 물었다. 지수는 당황했다. 그날은 빨간색 앵무새로 변신하려다 온통 벌겋게 변해버려서 화장이 망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진호는 지수에게 시간 괜찮으면 커피나 마시자고 했다. 아 어떡하지, 지수는 진호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그의 목소리도, 제대로 된 얼굴도 모른다는 사실에 망설여졌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얼굴도. 지수는 단호하게 그 약속을 거절했다. 지수는 진호가 있는 곳 근처로 가 타투를 받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집으로 향했다. 진호는 그날따라 비염이 심해져 집에 일찍 들어갔다고 하였다.
지수는 그날 밤 집에 들어가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진호의 답장을 기다렸다. 요즘은 보통 잠에 들 때까지 연락을 했기 때문에, 그가 왜 집에 들어간다고 한 뒤로 연락이 없는지 궁금했다. 내가 이 사람을 궁금해하는 만큼, 이 사람도 나를 궁금해하고 있을까? 진호는 답이 없었다. 밤 아홉 시면 잠에 들던 지수는, 한시 두시 세시. 그렇게 답장을 기다리다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진호는 잠에 들었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곤 비가 온다 말했다. 지수는 자신 혼자 어딘가의 저울 위로 뛰어든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지수는 아무렇지 않게 답장했다. 자신은 오늘부터 여행을 간다고. 어젯밤의 당신의 답장을 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오늘부터는 연락이 좀 뜸해질 것 같아 그 사실을 말해주려 그랬다고 말이다. 진호는 별 말이 없었다. 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산속으로 향하면서 지수는 진호와의 연애를 상상했다. 적당히 모자란 자신과, 적당히 모자란 누군가와의 사랑. 이유 없이 헤어질 수 있고, 사랑 없이 키스할 수 있는 사이. 추운 겨울날 만나 거리의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찾아내고, 아무도 줄 서지 않는 밥집을 찾아가 한 끼를 먹는 것. 둘 중 누군가는 익숙하게 모텔을 대실 하고, 둘 중 누군가는 섹스가 끝나고 나서 담배를 피우는. 자신의 자취방 문 앞에 서서 자고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부질없는 것들을 말이다.
어느 날의 자신이 앵무새가 아니게 되더라도, 지수가 아닌 누군가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더라도 이 모든 상상은 가능해질까? 아니 자신이 앵무새인 채로 남더라도, 이 상상을 현실로 불러올 수 있을까? 어느새 버스는 휴게소를 향해 멈춰 서고 있었다. 지수는 짧은 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야 할지, 끼니를 때워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진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잘 갔다 오세요. 지수는 이것을 암묵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지수는 처음 진호에게 메시지가 왔을 때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든, 혹은 이대로 안녕이라고 하는 것이든 뭐든 좋았다. 그가 자신에게 끝까지 가슴을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아서, 다리를 벌려달라고 하지도 않아서, 젊은 여성의 모습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가 자신에게 질렸다 해도 좋았다. 마침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