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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집을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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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빈 Feb 24. 2024

2호. 유령의 집과 첫 산책

영국에서 보낸 첫날밤

 런던에서 레스터까지는 세 시간. 버스는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을 싣고 어둠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렸다. 도로 표지판에 Leicester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자 '기숙사 찾기'라는 새로운 퀘스트를 깨야 하는 나는 두근두근 떨렸다.

 "All right, We've arrived!"

 도착했다는 버스 기사의 말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내렸는데, 이럴 수가. 아무리 봐도 오기 전에 사진으로 확인했던 장소와 달랐다.

(*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기숙사는 학교 바로 근처와 학교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 이렇게 두 군데가 있다. 그중 내가 고른 곳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버스 기사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애처로운 우리의 눈빛을 무시하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캐리어를 챙겨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 남은 사람은 나까지 셋. 세 명이서 어두운 길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어이없는 상황에 화가 나기도 잠시,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우리 셋은 어색하게 웃으며 학교 근처 리셉션으로 가 상황을 설명하고 학교에서 불러 준 택시를 탔다.


 그렇게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방 열쇠를 받아 집을 찾아갔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차도 앞, 흐릿한 가로등 불빛만이 비추는 길에서 집 앞에 서자 누군가 나를 뒤쫓아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져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무거운 나무 문조차 찝찝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거실이었지만 창문 너머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공포 영화를 보다 보면 꼭 제 발로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가는 바보 같은 등장인물이 있지 않은가. 어두컴컴한 정적 속 홀로 거대한 저택에 서 있는 내가 꼭 그런 인물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거실에서 이어지는 복도는 어찌나 많은지, 내 방이 어디에 있는지 당최 감도 안 잡혔다. 하는 수 없이 온 집을 돌아다니며 방문 앞에 붙은 숫자를 일일이 다 확인했다. 걸을 때마다 나무판이 끼익 끼익 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이동하며 쌓였던 피곤으로 무거워진 몸이 어느새 공포심으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너무 무서워서 한시라도 빨리 방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겨우 찾아 들어간 방에는 침대 매트리스만 휑댕그러니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원했던 방으로 배정해 줬다는 것. 내 한국 방보다 세네 배는 더 큰 방이었다. 그런데 이 놈의 학교는 제대로 하는 일이 있기는 한 건지, 오기 전에 학교 사이트에서 침구 세트를 구매하면 방에 미리 넣어준다길래 믿고 미리 구매했건만 없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두 시. 너무 지쳐서 따질 힘도 없는 탓에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에서 외투를 덮고 대충 잤다. 영국에서 보낸 첫날밤은 으스스한 저택의 휑한 방, 매트리스 위에서 패딩을 덮고 웅크린 채 지나갔다.


처량한 첫날밤.

 전날의 피곤함이 무색하게도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마 새벽 5시, 6시 정도였던 것 같다. 전날 기내식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탓에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배에서 뭐 좀 먹자고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창 밖을 보니 어느새 180도 달라져있었다. 방 한쪽을 가득 채운 창 밖으로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곳에는 큰 나무들이 우뚝 서있었고, 연둣빛 잔디밭에서 청설모가 요리조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국 아파트에서 보던 풍경과는 너무 달랐다. 먹은 것 없이 허하던 뱃속은 잊히고, 대신 초록빛 설렘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밖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는 전날의 고난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내 앞에 놓인 나무, 주택, 조깅하는 사람, 개를 산책하는 사람 모두 새로웠다. 마치 아기가 처음으로 유모차에 타고 외출한 느낌이랄까. 인도와 차도는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울퉁불퉁 나있었는데, 그 사이로 심어놓은 나무들이 나를 차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듯했다. 고개를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 아래 높이 솟은 나무의 초록빛 사이로 색색의 잎이 삐죽 솟아나고 있었다. 길 위도 짙은 초록의 이끼와 낮은 수풀, 여기저기 흩뿌려진 메마른 잎으로 오색찬란했다. 영국에서 한 첫 산책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연의 색으로 칠해졌다.


 비록 가려던 마트가 문을 닫아 편의점에 가야 했지만, 그리고 그곳에서 산 오트밀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었지만, 그 맛없는 오트밀을 다시 먹어야 한다 해도 돌아가고 싶은 산책길. 영국은 으스스한 어둠과 청량한 초록을 함께 품은 곳.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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