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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dle Mar 09. 2017

빗길 조심

과 유년기의 끝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우연한 기회에 십여 년 전 읽었던 브레히트의 시를 꺼내본다. 빗방울에 맞아 죽을뻔한 적이 있었지. 건조하게 말하면 그냥 빗길 교통사고였지만. 나와 장거리 연애를 하던 그녀는 나를 만나러 오기 며칠 전 너를 사랑하지만 오늘 밤은 다른 남자와 동침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밤새 잠에 못 들고 악마와 씨름한 나는 친구의 오토바이를 몰고 폭우 속에 이국의 도로를 달리다 앞서 가던 버스의 급정거에 빗길에 미끄러지고 만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그녀는 내가 필요했을까? 다행히도 오토바이와 나 모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고, 이 이야기는 적절한 기회에 슬쩍 흘려서 나를 나름 사연 있는 남자로 만들어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유년기의 끝’이라는 소설이 있다. 고등한 외계 종족과의 조우 이후 그들의 관리를 통해 인류는 자멸의 위기를 넘기고 육체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던 유명 과학소설 작가인 저자는 내가 머물던 그 나라의 명문 공과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귀국 후 가진 일련의 술자리에서 나는 소설의 제목, 작가의 일생과 같은 파편들을 적당히 나의 경험들과 엮어 그곳의 생활을 통해 나의 유년기가 끝난 것 같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얄팍했지만 사람들은 갓 제대해서 까마귀 같은 나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나.


 나는 왜 이렇게 괴팍했을까. 모자란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는데 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했을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초조했었던 것 같다. 반골기질 - 그러나 전복적이지는 않았던 - 때문에 이 사람과 저 사람 인생경로의 중간 지점에 점을 찍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좌표로 나를 던지는 삶을 꿈꿨다. 이를 모험심이나 용기로 포장했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부터인가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명령이 되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그 여정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포장하기가 편리하다. 그러나 다시 어느 순간에는 - 인생을 사는 다른 많은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름을 붙여서 존재를 만드는 순간 동시에 언젠가 찾아올 비존재의 가능성도 생겨난다. 나는 무들이라는 이름에 동의한 적이 없다. 정확하게는 어떤 이름도 붙이는 것에 반대했다. 굳이 이름을 붙여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관계의 쓸쓸한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나를 제외한 7명 중 4명을 전부터 알고 있었고, 회사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친구들에게 부드러운 정서적인 학대와 막말을 통해 해소하며 모임의 검은 양이 되는 것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런데 이 부자연스러운 모임이 그 구성원들이 뿔뿔이 세계 각지로 흩어지고 나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어느덧 6년 차가 될 줄이야.


Morgens und abends zu lesen


Der, den ich liebe

Hat mir gesagt

Daß er mich braucht.


Darum

Gebe ich auf mich acht

Sehe auf meinen Weg und

Fürchte von jedem Regentropfen

Daß er mich erschlagen könnte.


 “당신이 필요해요.”

나는 브레히트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얼마 전까지 자연스럽게 시의 화자는 남성, 그리고 위 문장은 그의 연인인 여성이 말한 것으로 상상하며 읽었다. 그러나 독일어 원문에서 ‘Daß er mich braucht.’의 ‘er’는 영어의 ‘he’에 해당하는 3인칭 대명사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That he needs me.’가 된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연인 사이가 아니고서는, 아니 어쩌면 연인 사이에서도 꺼내기 힘든 말이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후라이드 치킨의 튀김옷을 벗겨내고 속살을 드러내듯이 나의 연약한 부분을 보여줘야 한다.


 유년기는 언제 끝나는 걸까. 애먼 사람에게 섣불리 나의 속살을 보여주지 않게 될 때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백 퍼센트 확신은 없더라도 스스로의 회복력을 믿고 약점을 노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서울-카불-헬싱키-뮌헨-보스턴-뉴욕을 따라 메신저 안에서 해가 지지 않고 이어지는 아무 말 대잔치를 보고 있자니 ‘유년기의 끝' 결말에서 육체의 벽을 허물고 거대한 하나의 정신체로 진화한 인류의 모습이 살짝 떠올라 피식 웃는다. 누구보다 멀리 있지만 누구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는 이들. 나의 괴팍함을 끈기 있게 받아 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빗방울을 조심하길 바라며. Ich brauche euch. 당신들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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