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 같은 눈
터벅터
벅
詩
간
위에
쌓이다
봄 오기 전에 녹겠지만
- 김찬현, "봄 오기 전에"
이 글의 다른 제목은 '뒤늦은 참가자의 재미없는 편견' 정도 되시겠다.
‘그’ 무채를 본 일이 없다. 2012년 겨울의 ‘그’ 회합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13년 봄 그 무채 중 한 가닥이 되지 않겠냐고 제안받았을 때는 기꺼이 승낙했다. 초대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그리움 때문이었다.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다른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고등학교 동기인 초대인과 나의 교류가 깊어진 건 고2 말 둘의 일본 유학이 동시에 결정된 후였다. 한 번은 서울에서, 한 번은 동경에서, 5년의 간격을 두고 반 년 정도씩을 가까이 지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리라. 꽤나 이질적인 면이 있었던 우리는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그게 중요했다. 동경에서 헤어진 우리는 3년 후 서울에서 반갑게 다시 만났다.
서울에서 다시 만난 그가 날 무들에 초대하면서 건넨 설명은 ‘실없는 농담을 잘 던져야 되는 곳'이었다. 아니, 실없는 농담이 아니고 수준 높은 농담이었나. 아무튼 디지털 세대의 모임 답게 가입 의식은 메신저 방 초대로 간단히 갈음되었는데, 그 의식을 마친 순간부터 적응하기 힘든 몽롱함을 느꼈다. 교양과 익살에 자의식 과잉과 회의가 뒤범벅된 텍스트의 향연이 펼쳐졌던 것이다.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하기엔 심히 부담스럽다. 실없는 농담이란 게 이런 걸 뜻하는 거였나? 내용이 있는듯하면서 없는듯한 대화에 가까스로 참여하면서, 나는 도무지 골자를 알 수 없는 이 모임에 계속 있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같은 실없음이 우리가 모인 공간의 주요한 한 축이었다 할 수도 있겠다. 한편 각자가 바깥 세계를 향해 지닌 태도가 한없이 진지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왕왕 있었다. 다만 그러한 진지함이 우리 모임의 내부를 향하지 않았을 뿐. 내가 처음 당혹스러워 했던 것은 회를 다 먹고 남은 무채 같은 '모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튼실한 육질의 방어회 같은 삶의 기축을 지니고 있어 보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각자가 얇게 썰린 무인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지닌 살덩이의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깔린 무채가 이 분위기의 정체인 것은 아닐까 하고. 그게 내가 바라본 무채, 무들이었다.
몇 명 밖에 안되는 남녀가 모여 별 이야기를 다했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헤어지는 연애 실황을 중계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온갖 괴상한 농담에 모임 밖에서는 쉬이 통하지 않을 언어 유희를 즐겼다.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참 순수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이다. 나는 좀 예외였지만. 두 번째 글을 쓴 '망한' 철학도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정말로 '망한' 면이 있었는데, 추하지는 않았다. 나는 좀 예외였나. 아무튼 내게는 그 점이 특별하게 느껴졌고 참 신기했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졌지만.
가속하는 시간 속에서도 실없는 이야기는 여전히 끊임없이 오간다. 그래도 시간이 쌓이면서 중요하고 심각한 이야기도 가끔 나왔던 것 같다. 무채 위에 회가 너무 오래 놓여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무채에 회맛(?)이 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실없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엊그제도 회를 먹었는데, 그 아래 깔린 무채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희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채를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대체 그때 너희들이 무엇을 공감했는지 나중의 경험으로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근데, 오늘 밖에 나와 보니 추위가 갑자기 가신듯 하더라.
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