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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dle May 02. 2017

우리

감각의 이음새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란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 다니기도 하고
머리가 엉망이었고
사진찍을 때도 억지표정을 안 지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됐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단지 환상이 아닐까?
악이 존재하나?
정말 나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나?
언젠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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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들이란 이름의 연재 글쓰기에 별 생각없이 동참하기로 한 뒤, 막상 내 순서가 닥쳐오고 나서야 알게 됐다. 글을 쓰겠노라 자처했을 때는 너희들이 뿜어내는 특수한 종류의 위안감, 순수함, 방정맞음, 진지함 같은 것을 글로써 마음놓고 찬양할 작정이었만 그것들을 막상 글로 써내는 일은 엄청나게 낯간지럽고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빛나는 너희를 찬양할수록 평범한 나는 점점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서 두려웠고, 나를 포함한 우리를 찬양하자니 더욱이 낯간지러웠다. 어쩔 수 없이 너희와 별로 상관 없는 내 이야기를 먼저 조금 꺼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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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희를 만나기 전까지 ‘친구’와 ‘모임’이란 두 단어는 30여 년 내 인생에서 결코 어울린 적이 없었다. 내 사전에 모임은 친구 보다는 지인 또는 동창회 같은 단어와 어울렸기 때문이다. 나이를 초월해서 친구가 될 순 있어도, 너와 내가 아닌 세 번째 사람과 다함께 온전히 어떤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일찌감치부터 여겨왔다. 너와 나 둘만 있을 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기만 해도 공통의 분모가 저절로 보이는 그런 관계에 나는 철저히 익숙했다. 셋이 되고 넷이 되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그 분모를 넓히거나 공고히 하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이들간의 공통분모를 부러워하거나 시샘하거나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쓰게 되기 마련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성원들의 애씀과 부러움과 시샘이 나에겐 예민하게 감지됐고, ‘모임’에서는 그것이 늘 불편했다. 어떤 이는 그런 애씀과 부러움과 시샘이야말로 인간을 사회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하는 채찍질 같은 것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그런 노력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데 몰두할 수도 있는 에너지를 ‘낭비’ 처럼 보였다. 경험컨대, 언제나 둘 사이의 대화와 웃음 속에서만 나는 자유로움과 빛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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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천사의 시점인 흑백영상으로 시작해서 다미엘 천사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출발하는 장면에서부터 갑자기 컬러모드로 바뀐다. 컬러 텔레비전의 발명 이후 흑백 텔레비전이 유물이 되듯이, 어떤 결심은 다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전제한다.

2012년 그 해 겨울 나는 이방인이 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이십 대를 거의 모두 바친 학업의 탑에 기어이 자퇴원이라는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신분적으로는 학생의 연장선상이었지만, 그 끝을 미리 전제한 출발이라는 점에서 이전과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랐다. 이전에는 경제적인 고민이 필요없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영원한 수명을 가진 사람처럼 공부와 연구 그 자체에만 몰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몇 년 안에 나를 지탱하는 업으로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해 학교에 간다.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면 20대 초반부터 일생동안 나에게 주어진 경제적 싸움을 어떻게 명랑하게 즐길 것인지를 고민하고 예비하는 자세로 공부해야 했지만, 철없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공부는 늘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고, 세상은 책이나 예술을 통해서나 소통하고 지켜볼 대상이었다.

2년 가까이의 프랑스생활 이후에야, 나는 내 나이에 걸맞는 경제적 독립이 행복감의 필요조건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사회와 부모가 그동안 그만큼 나를 먹이고 가르쳤는데도 내가 먹을 저녁식사 하나 내 손으로 내 부엌에서 만들지 못하는 삶은, 그 삶이 속한 사회는 어딘가 병들고 이상한 사회라는 감각이 생겼다. 기계공학을 배경삼아 건축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현실세계에서 뭔가 실현해보고자 새로운 출발선상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세상과 나의 존재가 분리되어있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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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의 감각을 탑재한 시기라서였을까. 한 자리에 모인 낯선 너희들에게서 왠지 하나의 인격체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깐족거림과 개드립이 난무하는 데 도도함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진로를 바꾸어 입학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무슨 대단한 재능이나 야심찬 꿈이 있는 아이처럼 대할 때는 조금 불편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나 만큼이나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쩔수 없는 모습으로 치열하게 고독해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다같이 망연자실하던 기억, 영화 레미제라블, 각자 준비한 선물을 교환한 크리스마스 파티와 같은 사건들은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마법처럼 너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도록 만들었다. 이 친구들과의 ‘모임’에 적응이 아니라 어느새 중독되어 버렸다. 밤샘작업이 사나흘씩 이어지는 고난의 학업기간 중에도 너희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가볍고 신이났다.

5년이 지난 지금, 그토록 바라던 업계에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고민과 의문들을 안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결국 무엇을 하고싶은 걸까. 나중에 시간이 지나 지금을 되돌아보면 웃을 수 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지속적인 사교 모임에 서툰 내가 어쩌다 너희들을 만나 매일 너희들을 그리워 하면서 카톡방을 들여다보게 되었는지.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안다. 나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임을 알았을 때, 세상을 향한 감각이 서로 이어져 있다고 느낄 때, ‘모임’이란 형식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있다.

페터 한트케, <아이의 노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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