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큰 지진 뒤에 귀국했다. 2004년 고등학교 졸업 후 7년 정도 일본에서 보낸 뒤다. 유학 시절에는 거의 귀국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3년 동안은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라도 좋았다. 아주 멀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단절된 공간에 있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한국은 그리 썩 좋은 기억이 남은 공간이 아니었다.
돌아오고 나니, 고등학교 친구들 몇 명 말고는 정말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귀국 후 바로 취직했기에, 사적인 관계를 형성할 겨를이 없었고 대부분 사회에서 일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 뿐이었다. 한 2년은 일 배우느라 정신 없이 보낸 것 같다. 반(反)물질 만들다가 반(半)도체 만들다니. 회사-기숙사-회사-기숙사-회사-기숙사.. 뭐 그 다음에도 정신 없었지만.
3년차 선임(대리)가 되니 살짝 여유가 생겼는지, 2013년엔 틈 나는 대로 바깥으로 돌아다녔다. 누구든지간에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게 벌써 5년 전이라는 게 섬뜻하지만, 그 해엔 이상하게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스스로 적극적인 것도 있었지만. 지금보단 매력적이었나? 아무튼 지금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때의 인연이고.
회사원의 가장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은 역시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도무지 같은 파트 분들과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초스피드로 후딱 때우는 것은 기본이며 나누는 대화도 맨날 거기서 거기. 전혀 리프레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은 알지만, 그래서 여사친 만들기의 프로가 되었던 것 같다. 편견이지만, 내 관점에서 남자들은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사람 외에 참 재미없는 대화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게 여자 얘기다. 그러려면 차라리 여자랑 이야기를 하는 게 훨씬 재밌지. 그래서 그런지, 그때는 정말 사심 없이 즐거웠다. (연애는 영 젬병이지만, 미인에게는 나름 잘 접근해 친구가 되는 편이었다. 귀여운 외모를 이용해서?)
그렇게 딱 2년 정도 참 즐겁게 보낸 것 같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뒀다. 바깥이 즐거워질수록, 안을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당시의 거창한 이유를 다시 꺼내보기 민망한 구석이 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하고 좋았다. 20대의 마지막 2년,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무리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욕망과 열정의 엇박자 춤과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일상의 건조함이 뒤엉켜있던 시절.
왜 갑자기 얼마 되지도 않은 그 시절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과거가 바로 5년 정도 스케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 정도 시간 스케일을 대여섯 번쯤 경험하고 나니, 스스로가 어떤 면에서 진보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면에서 퇴보하는 것을 느낀다. 조금씩 삐그덕거림이 심해지는 육체에서 아직은 옅은 죽음의 내음을 맡으며, 성장과 함께 퇴락하는 것을.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에 있을 때는 일본 친구들이 더 많았고,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일어를 구사할 때의 인격이 전혀 판이했다는 점도 있겠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굉장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딱 그 5년 - 7년 혹은 8년일 수도 있겠다 - 정도의 스케일로 달라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불현듯 인식할 때, 순간 오금이 저리기도 해. 나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에게 판단 당하는 건, 썩 상쾌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거기에 시작이 있고 힌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