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냄의 미학, 방황에서 폭발로 이어지다
전시는 막을 내렸지만, 그날의 공기와 캔버스 너머로 마주했던 기억의 잔향들은 여전히 내 안에 묵직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이 여운이 휘발되기 전에 나만의 시각으로 기록하며, 그날의 전시를 내 삶의 한 조각으로 가만히 들여놓고 싶었다.
나의 두 번째 매거진 '무드온아트(Mood on Art)'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찬란한 고독을 통해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천경자>의 기록에 이어, 이번에 다시 꺼내어 본 장면은 시간을 건너온 예술가들의 숨결이 담긴 <뉴욕의 거장들>의 이야기다. 막은 내렸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질문을 던지는 그날의 풍경들을 다시 하나씩 연결해 보려 한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지도를 새로 그린 이 거장들의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건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뉴욕의 거장들>전시가 열린 노원문화예술회관에 도착했을 때, 나의 첫 마음은 기대와 의구심 사이를 오갔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세련된 모던함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외관부터 현대미술과는 거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이 공간이 잭슨 폴록의 광활한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을까?"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 질문은 무색해졌다. 공간의 크기는 예술의 깊이를 규정하지 못한다. 뉴욕의 뜨거웠던 20세기 에너지는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실재(實在)로 다가왔다. 장소의 낯섦이 걷히고, 거장의 호흡이 머문 자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뿌리는 미국 서부의 거친 토양에 있다. 1912년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결핍과 방랑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땅을 일구는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대지의 광활함과 그 속의 무질서한 생명력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다.
유난히 거친 방황으로 사춘기를 보낸 잭슨폴록은 1930년, 형 찰스를 따라 뉴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스승 토마스 하트 벤튼(Thomas Hart Benton)을 만난다. 벤튼은 미국의 강인한 삶을 담아내는 향토적 사실주의의 거장이었다. 벤튼이 가르친 역동적인 곡선 구도는 훗날 폴록의 복잡한 선들로 치환되는 소중한 씨앗이 되었다.
이 배움의 무대인 '아트 스튜던츠 리그(Art Students League)'는 젊은 폴록에게 거대한 용광로였다. 시대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캔버스 앞에서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분위기는 폴록이 회화의 틀을 깨부수는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알코올 중독과 고독이라는 삶의 고통을 예술적 에너지로 치환하는 법을 배웠다. 폴록에게 예술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던져 넣는 숙명적인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체득한 화면 구성의 감각과 신체적 훈련은 훗날 '드리핑(Dripping)'으로 폭발하는 에너지의 근간이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들어간다"던 그의 선언처럼, 폴록은 멈춰진 결과물보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사로서의 길을 이곳에서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드립핑(Dripping) : 이젤 위에 캔버스를 세우고 붓으로 색을 칠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그 위로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고 던지는 현대 미술의 기법'이다.
자유로운 공기는 다른 거장들에게도 평등한 영감이 되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또한 이곳을 거치며 형태를 걷어내고 색과 밀도로 화면을 사유하는 길을 찾았다. 폴록이 역동적인 '행위'로 나아갔다면, 로스코는 깊은 '침잠'의 세계로 향했다. 그들의 출발선은 같았으나, 각자의 진실을 따라 서로 다른 아름다운 방향을 완성했다.
이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한국의 거장 김창열 화백의 발자취도 겹쳐 있다. 1960년대 뉴욕에 머물던 그는 이곳에서 판화를 공부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 그의 영롱한 물방울 회화가 지닌 정적 역시, 이곳에서의 탄탄한 기초 훈련 위에서 맺어진 결실이다. 이처럼 '아트 스튜던츠 리그'는 동서양의 작가들에게 기술을 넘어 예술가로서의 당당한 태도를 전수하며, 현대 미술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낸 진정한 훈련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폴록의 요동치는 혼돈을 잠재운 것은 뉴욕 근교 롱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스프링스(Springs)의 깊은 정적이었다. 1945년 10월, 잭슨 폴록은 예술적 지지자이자 동료인 리 크래스너(Lee Krasner, 1908~1984)와 결혼 후, 바로 이곳으로 삶의 궤적을 옮겼다. 이는 폴록의 예술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폭발’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폴록에게 방황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안으로 침잠하던 혼돈이었다면, 롱아일랜드에서 맞이한 폭발은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내면의 에너지를 캔버스라는 광활한 대지로 해방시킨 사건이었다.
지금은 화려한 휴양지가 된 롱아일랜드이지만, 당시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가스 시설조차 없는 낡은 농가뿐이었다. 지독한 가난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리 크래스너는 폴록의 재능이 꺾이지 않도록 스스로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녀 역시 현대 미술의 구조를 체득한 준비된 예술가였기에 폴록의 거친 재능 속에 숨겨진 시대적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직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폴록을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에게 소개하며 그를 현대 미술의 주류로 이끄는 결정적인 통로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지켜낸 고요한 시간 위에서, 현대 미술사를 뒤흔든 '액션 페인팅'의 위대한 첫 발자국이 떼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폭발하는 에너지가 그와 정반대인 고요한 정적 가운데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도 경이롭기까지 하다.
1943년,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은 자신의 저택 복도를 장식할 거대한 벽화(Mural)를 폴록에게 의뢰했다. 이 작업은 폴록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6미터가 넘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그는 제약 없는 자유를 경험했다. 이후 페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폴록은 뉴욕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나는 그림 안에 있을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은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단지 그 삶이 캔버스 위로 흘러나오게 할 뿐이다."
—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47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작업 방식을 두고 '물감을 뿌리는 미친 짓'이라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폴록에게 그것은 단순한 뿌리기가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현실의 평면 위에 투사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은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있다"라고 믿었고, 자신은 단지 그 삶이 캔버스 위에서 실현되도록 돕는 매개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폴록에게 예술은 지배가 아닌 투신이었다. 스스로를 한껏 낮추어 오직 예술이 실현되기 위한 도구로 인식했던 그의 태도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군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물감이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움직일 수 있도록 자신의 감각을 기꺼이 내어준, 예술을 향한 가장 정직한 매개체였다.
좁은 복도는 뉴욕의 뒷골목으로 변모하여 관람객을 1950년대 맨해튼 한복판으로 안내한다. 정적인 감상을 넘어선 작은 공간에서의 미디어 아트와의 결합은 그 자체로 생생한 '체험'이다.
특히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아담한 디지털 아트 공간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이 몰입의 정점이었다. 고층 빌딩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고, 플랫폼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소음이 생생하게 들려올 때, 전시장 안을 가득 채운 재즈(Jazz) 선율은 비로소 화룡점정을 찍는다.
재즈는 뉴욕의 설렘 그 자체이며, 잭슨 폴록이 캔버스 위에서 펼쳤던 즉흥적인 '액션'과 닮아 있다. 웅장하고 자유로운 선율과 리듬이 어우러지며, 나는 어느새 시간과 공간을 넘어 폴록의 예술 세계로 진입하는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이 몰입의 정점은 영상으로 완성됩니다.
아담한 전시장에서 만난 거장들의 작품은 유독 깊게 다가왔다. 낮은 천정과 좁은 공간은 자연스레 보폭을 좁히고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물리적인 제약이 오히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벽이 되어, 오직 작품과 나 사이의 밀도 높은 대화에 집중하게 한 것이다. 느려진 걸음만큼 그림의 여백은 더 넓게 느껴졌고, 그 안에서 비로소 거장들이 남긴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의 에너지가 폭발적이었다면,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공간은 고요했다. 로스코의 색면 회화 앞에 서면, 나의 내면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사유하게 한다. 유대인 대학살의 공포를 암시한 그의 '십자가 연작'은 비극을 넘어선 숭고한 침묵을 선사하며, 색과 색이 만나는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무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짙은 블루 컬러를 가로지르는 수직의 선, 그가 '지프(Zip)'라 불렀던 그 한 줄기 선은 광활한 우주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의 실존처럼 느껴진다. 간결함이 주는 압도적인 힘. 그것은 복잡한 수식어 없이도 가장 깊은 사유의 바다로 우리를 데려간다.
미국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보장된 것은 1920년, 수정 헌법 제19조가 비준되면서부터였다. 여성이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갖기조차 힘들었던 시대, 하물며 예술가로서 오롯이 제 이름을 내걸기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가 뜻깊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잭슨 폴록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져 있던 독립적인 여성 예술가들을 조명했다는 점이다.
폴록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리 크래스너(Lee Krasner, 1908~1984)는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불과 12년 전, 격동의 시기에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받아내면서도 감성적이면서 치밀한 구조를 가진 자신만의 추상 세계를 꼿꼿이 지켜냈다.
또한 미리암 샤피로(Miriam Schapiro, 1923~2015)의 생동감 넘치는 조형 언어는 남성 작가 위주의 추상표현주의 흐름 속에서 여성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는지를 증명한다. 그녀들의 작품은 뉴욕의 거장들이 단순히 몇몇 천재들의 잔치가 아니라, 시대를 함께 고민하고 투쟁했던 예술가 집단의 뜨거운 공동체였음을 말해준다.
두 사람의 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인 동시에,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의 치열한 흔적이기에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전시장을 나오며 한 시간 남짓 뉴욕의 심장부에서 재즈와 물감의 향연에 흠뻑 젖어있던 탓일까. 소박하다고 생각했던 그 공간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깊숙한 통로였음을 느꼈다.
화려함의 절정을 치닫는 20세기 중반 뉴욕이 주는 에너지, 그리고 예술가들이 가진 고독과 열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소박하고 좁은 공간에서 영상과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몰입감은 오히려 밀도를 높였다.
진실된 기록과 몰입의 장치가 마련되었을 때,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역사와도, 수십 년 전 세상을 떠난 거장의 숨결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뉴욕의 거장들이 남긴 것은 결국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의 자유는 갈망되고 있을 것이다.
잭슨 폴록은 그림이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은 단지 그 삶이 실현되도록 돕는 매개체일 뿐이라고 고백했다.
지금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끝까지 매개체로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술가가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그 빈자리에 우리가 수많은 이야기를 채워나갈 수 있게 한 것.
그가 내어준 넉넉한 틈 사이에서, 이제는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