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 찰나의 고요

by 무드온라이프


그림 안을 걷다


전시를 보러 갈 때 설레는 마음이 앞선다. 예술이 나의 어떤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려줄지 사뭇 기대가 된다. 또 하나는 공간이 주는 매력이다. 오직 작품 감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벽면과 조명, 발걸음을 이끄는 동선이다. 이 정적인 공간에서 더러는 더 깊은 침묵을, 더러는 들리지 않는 폭발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몇 년 사이에 전시의 패러다임 역시 변화하고 있다.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 불리는 정적인 갤러리 공간을 벗어나,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전시 비중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단순히 작품을 멀리서 응시하는 관조적 태도에서 벗어나,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 속에서 캔버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중시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 레보 드 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의 폐채석장을 개조한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s Lumières)'이나 도쿄의 '팀랩 보더리스(teamLab Borderless)' 같은 전시장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빛의 채석장 (Carrières des Lumières) 출처:ⓒ Carrières des Lumières / Culturespaces

폐채석장의 거대한 암벽을 스크린 삼아 거장들의 작품을 투사하는 이곳은, 압도적인 규모와 고요한 동굴의 울림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몰입형 예술 경험을 선사한다.

도쿄 '팀랩 보더리스(teamLab Borderless)'. 경계 없는 빛의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과 작품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한다. 출처: ⓒ teamLab, Exhibition

경계가 없는 예술을 표방하는 이곳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관람객과 작품이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세계를 보여준다.


오래전 접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미디어 아트 전시에서 마치 노란 밀밭 한가운데 서서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울산 복합문화공간 만디 호크니 전시장 필자제공

평면의 캔버스가 공간 전체로 확장될 때 느끼는 그 전율은 현대 전시가 추구하는 핵심적인 가치이다. 런던의 라이트룸(Lightroom)을 시작으로 서울과 울산으로 이어진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전시는 이러한 트렌드의 정점을 보여준다.


질서의 변주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예술 세계는 확고한 소신에서 출발한다. 1937년 영국 브래드퍼드에서 태어난 그는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며 구상의 종말을 예고하던 시대에도 "눈에 보이는 형상을 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그의 단단한 기본기는 런던 영국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재학 시절에 완성되었다. 당시 학교는 추상 회화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호크니는 전통적인 드로잉과 관찰의 중요성을 놓지 않았다. 특히 1963년 이집트 여행에서 마주한 고대 벽화의 단순한 선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미술관에서 탐구한 고전 회화의 안정적인 구도는 이후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호크니는 인근의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를 수시로 방문하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와 같은 초기 르네상스 거장들이 구현한 수학적 구도와 정제된 고요함에 깊이 매료되었다.


실제로 미술관 측은 호크니가 이 작품에 보낸 평생의 경의를 기리며, 그의 대표작과 피에로의 걸작을 나란히 배치하는 특별한 기획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걸작을 중심으로 호크니의 <나의 부모님> 등이 나란히 걸려 있다. 출처: The National Gallery, London

피에로의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 중심에 선 나무와 성령이 이루는 엄격한 수직축은, 호크니의 <나의 부모님(My Parents)> 중앙에 놓인 수납장과 거울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밝은 빛과 인물을 관조적으로 배치하는 특유의 방식은 화면에 기묘한 정적과 안정감을 부여한다. 50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둔 거장들의 이 내밀한 교감은,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예술의 본질적인 속성을 확인시켜 준다.


태양 아래의 정적


그는 영국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과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주는 답답함을 뒤로하고 미국 서부로 향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던 단조로운 무채색의 풍경은 그에게 예술적 한계로 다가왔고, 1964년 마주한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은 캔버스 위에 새롭게 정의되었다.


런던의 희미한 햇살이 사물과 그림자의 경계를 흐릿하게 뭉개버렸다면,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빛은 모든 존재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호크니는 그림자를 단순한 어둠이 아닌 투명한 색면으로 치환하고, 강렬한 빛이 만들어내는 평면적인 질서를 통해 현대 미술의 시각적 즐거움을 발견했다.


단순화된 형태와 명료한 색면으로 포착된 수영장과 야자수는 현대 미술이 놓치고 있던 시각적 즐거움을 일깨웠다. 특히 서른 살이 되던 1967년에 발표한 대표작 <어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에서 1초도 안 되어 사라지는 물방울이 튀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그는 세밀하고 집요한 관찰을 이어갔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어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 1967. 찰나의 역동성을 영원한 정적으로 붙잡아둔 그의 대표작이다. 필자제공

찰나의 역동성을 느린 호흡의 붓질로 옮겨 심는 과정은 고도의 몰입을 요하는 수행과도 같았다. 첨벙거리는 소음이 들려야 할 자리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순식간에 증발하는 현상을 붙잡아 영원한 질서 속에 가두려는 이 집요한 응시는 시선이 머문 자리에 고요한 파동을 남긴다.


집요한 응시


그가 천착한 구상의 대상은 정지된 사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호크니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살과 그 아래 일렁이는 수영장의 물결에 매료되었다.

호크니는 “물방울이 튀는 2초의 사건을 2주 동안 그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라고 말할 만큼, 찰나에 흩어지는 움직임을 붙잡는 과정 자체를 즐겼다. 투명한 물은 쏟아지는 빛과 주변의 사물을 흡수하며 시시각각 자신을 바꾼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자세히 바라보기(LOOKING CLOSELY)"라는 문구는 호크니 예술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태도이다. 필자제공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자세히 바라보기(LOOKING CLOSELY)"라는 문구는 호크니 예술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태도이다. 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대상을 향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세상의 숨겨진 질서를 발견한다.


그에게 물은 어떤 고정된 형태나 정해진 색도 없이 주변의 모든 것을 투영하고 녹여내는, 완전한 자유로움의 상징이었다.


울산 태화복합문화공간 만디의 거대한 벽면은 호크니의 예술 세계를 담아내는 거대한 캔버스가 되었다. 전시장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관객을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햇살 속으로, 혹은 그가 탐구했던 깊은 물속으로 안내한다. 캔버스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그가 보았던 물의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마주하였다.

수많은 시점이 모여 완성된 물의 기록. 호크니는 카메라를 드로잉의 도구로 삼아 찰나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필자제공

수많은 시점을 겹쳐 완성한 물을 기록한 작품으로, 어디서 바라보아도 같은 위치의 대상과 마주하게 되는 이 방식은 고정된 시점을 넘어선 시각적 자유를 선사한다.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는 호크니가 포착한 '물의 감각'을 관람객의 온몸으로 확장한다. 거대한 화면 속에서 일렁이는 물결은 관람객을 마치 거대한 수영장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정해진 형태가 없는 물의 움직임을 명료한 선의 질서로 치환한 전시장 풍경 필자제공

그는 이 잡히지 않는 유동성을 캔버스 위에 고정하기 위해 집요하게 관찰하고 수없이 많은 선을 그었다. 정교한 응시를 통해 구현된 물의 파동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찰나의 시간을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공간의 민주화'를 이룬 다중 시점의 실험


카메라 렌즈는 단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고정하지만,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세상을 탐색한다. 호크니는 이 역동적인 시선을 회복하기 위해 수십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는 포토 콜라주(Photo Collage), 즉 수십 장의 사진을 결합하여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조이너스(Joiners)' 기법을 통해 고정된 카메라 렌즈가 결코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역동적인 시선을 복원해 냈다.


그가 이룬 '공간의 민주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소실점이라는 하나의 권위에 모든 사물을 종속시키는 대신, 화면 속 나무 한 그루, 길모퉁이 하나하나에 각자의 시선과 생명력을 나누어주는 다정한 배려다. 어느 곳 하나 소외되지 않고 평등하게 빛나는 그의 화면 속에서 관람객은 화가가 정해준 길을 따라가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보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거니는 산책자가 된다.


울산 태화복합문화공간 만디에서 마주한 영상 속에는 수많은 손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스케치북 위로 풍경을 옮겨 심는 이 손들은 호크니가 세상을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을 대변한다.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눈과 손이 동시에 움직이며 화면을 채워가는 과정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수많은 손이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풍경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필자제공

수백 장의 시점이 겹쳐진 <피어블로섬 하이웨이>처럼, 단일 소점에서 해방된 화면은 관객이 스스로 길 위의 초점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공간의 민주화'를 실현한다.

데이비드 호크니 <피어블로섬 하이웨이> 수 백개의 시점이 겹쳐진 이미지에서 해방된 화면 필자제공

영상 속에서 조각나 있는 얼굴과 사물의 파편들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눈동자가 쉼 없이 움직이며 정보를 조합하는 과정을 그대로 닮아 있다. 관람객은 정해진 소실점에 갇히지 않고 파편화된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스스로 초점을 선택한다.

호크니의 포토 콜라주 작품. 수많은 시점의 파편을 이어 붙여, 단일 렌즈가 포착할 수 없는 인간 시선의 입체적 깊이와 시간의 흐름을 한 화면에 담아냈다. 필자제공

카메라의 등장은 당시 화가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겼다. 기계의 정교함 앞에 회화가 설 자리를 잃어가던 시대에, 호크니는 도리어 사진을 도구 삼아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렌즈의 단일하고 기계적인 시선에 굴복하는 대신, 그는 사진이라는 파편을 모아 화가만이 가질 수 있는 입체적인 시각을 재구축하는 실험을 감행했다. 검은 바탕 위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조각난 얼굴들은 이러한 집요한 도전의 결과이다.


"더 많이 표현할수록 현실을 더 많이 포착하게 된다"는 자막처럼, 그에게 사진은 단순히 찰나를 소유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상의 입체적 본질에 가닿으려는 끈질긴 응시의 기록이자 회화적 시선의 확장이다.


이러한 시각적 탐구의 정점은 고향 요크셔의 자연을 담은 거대 연작에서 발견된다. 수십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완성한 숲은 단일한 소실점을 지우고 관객의 발치까지 풍경을 확장한다. 감상자가 어느 위치에 서 있더라도 주체적으로 대상을 마주하게 만드는 이 방식은, 우리가 풍경의 일부가 되는 '공간의 민주화'를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수십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완성한 <요크셔의 숲>. 소실점을 지우고 관객의 발치까지 확장된 풍경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공간의 민주화'를 완성한다. 필자제공


오페라 무대 위, 살아있는 캔버스


호크니의 실험은 평면의 캔버스를 넘어 무대라는 입체적인 시공간으로 펼쳐진다. 그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여인> 등 수많은 오페라 무대를 디자인하며 회화와 공간이 하나의 호흡으로 녹아드는 지점을 탐구했다.


그에게 무대는 단순히 극의 배경을 채우는 장식이 아니다. "오페라 공연을 볼 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원한다"는 그의 말처럼, 무대는 시각적 즐거움과 색채의 유희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살아있는 캔버스'이다.

"호크니가 무대를 그린다." 검은 배경 위로 펼쳐진 무대 디자인은 예술이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필자제공

검은 화면 위로 "호크니가 무대를 그린다(Hockney paints the stage)"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는 특정 작품의 재현을 넘어, 평생에 걸쳐 시각의 한계에 도전해 온 노화가가 무대라는 입체적 공간을 어떻게 자신의 방식대로 요리하는지 선언하는 장면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물들과 겹쳐진 이미지들은 호크니가 말하는 '살아있는 무대'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을 위해 제작된 세트 디자인 필자제공

전시장 한편을 채운 강렬한 색채의 향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을 위한 호크니의 무대 디자인이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즉 인간성을 결여한 상태를 의미한다. 호크니는 이 상징적인 서사를 위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초현실적인 정원을 무대 위에 세워두었다.

화면을 압도하는 붉은 바닥과 노란 기둥의 대비는 차갑고 정적인 공간에 뜨거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더 많이 표현할수록 현실을 더 많이 포착하게 된다"는 자막처럼, 그는 캔버스를 채우듯 무대 곳곳에 집요한 시선을 심어놓았다.


프레임을 넘어선 유희, 영원한 실험가


호크니의 시선은 무대라는 입체적 공간을 넘어 잡지의 지면이나 디지털 기기 같은 일상적인 프레임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1985년 그가 디자인한 '보그 파리'의 표지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강렬한 선으로 재구성된 얼굴은 고정된 상이 아니라, 파편화된 시점을 조합해 대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그의 포토 콜라주 실험과 궤를 같이한다.

1985년 호크니가 디자인한 '보그 파리' 표지. 잡지의 프레임 속에 자신의 다중 시점 철학을 녹여내며, 일상의 매체를 예술적 실험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필자제공

카메라의 기계적인 시선에 대항하여 화가의 주체적인 눈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려 했던 그의 의지가 잡지라는 대중적인 매체 위에서 유쾌하게 구현된 셈이다.


식지 않는 그의 실험 정신은 노년에 접어들어 '아이패드'라는 새로운 매체를 수용하며 정점에 달한다. 80세를 넘긴 나이에도 그는 붓 대신 스타일러스 펜으로 빛을 드로잉 하며 60년 작업 세계를 몰입형 영상으로 집약한다.

<2020년 5월 8일,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태양의 영상은 노장의 흔들림 없는 낙관주의를 상징한다. 필자제공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는 문구와 함께 떠오르는 노란빛은, 매 순간 우리 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기어이 찾아내라는 거장의 전언이다. 죽음을 연상케하는 노을이 지는 장면이지만 그의 메시지에서 숙연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패드로 그려낸 "LOVE LIFE"라는 마지막 메시지. 자세히 바라보는 행위가 곧 삶을 사랑하는 일임을, 노장의 화가는 빛의 기록을 통해 온몸으로 웅변한다. 필자제공

화면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LOVE LIFE"라는 짧고 강렬한 메시지는 그가 평생을 바쳐 기록해 온 예술의 목적이 결국 삶 그 자체에 있음을 증명한다.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생애는 존재 자체로 현대 미술의 이정표이다. 이번 전시는 보이는 것 너머의 고요를 사유하게 하고, 세상을 향해 다시금 다정한 시선을 뻗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에필로그


분명 그의 그림은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했다.

때론 정적이 흘렀다.

절제가 늘 배어있어 담백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그는 변주의 대가이다.

아무리 어두운 주제라도 특유의 밝고 넘치는 에너지로

치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슬픔의 그림자조차 경쾌한 색채와 터치로 바꾸어놓는

그의 솜씨는 그리 심각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래서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든다.


신기술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나가는

60여 년의 시간 동안,

그는 항상 한걸음 앞서 도전하고

실험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이어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호크니를 따라

물속으로, 오페라 무대로, 그리고 광활한 대지로

함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움직이는 물의 소리를 무음 처리하여

고요한 정적으로 휘감아,

오히려 더 큰 상상속의 물첨벙 소리를 듣게 하는,

그의 능력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여기에선 인간의 필연적인 종착지를 떠올린다.

직접 마주하기 힘든 죽음이라는 여정조차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LOVE LIFE'라는 다정한 당부를 건넨다.

그가 바라본 아름다운 세상에 흠뻑 젖어있을 수 있었던

참으로 눈부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