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의 정원, 올드웨스트베리가든의 침묵

올드웨스트베리가든이 들려주는 이야기

by 무드온라이프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1920년대를 선택할 것이다.


1920년대 세상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문명과 진보를 약속했던 인간의 오만한 이성은 파국을 맞이했고, 오랜 세월 유럽이 쥐고 있던 패권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묘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지구촌 곳곳이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요동쳤다.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쇤베르크(Schönberg)는 전통 화성이라는 익숙함을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은 안락한 질서가 붕괴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지독한 불안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었다.


체코의 스메타나(Smetana)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뜨겁고도 서글픈 민족의 선율을 남겼다. 굽이치는 ‘몰다우(Vltava)’ 강물에 슬라브 민족의 슬픈 서사를 실어 날랐다. 청각을 잃어버린 고요 속에서 그가 건져 올린 것은, 억압된 조국의 현실과 그 땅을 흐르는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미술계에서는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등이 이끄는 초현실주의(Surrealism)가 등장했다. 이성이 마비된 자리에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채워 넣은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도사린 낯선 진실을 들춰냈다. 그것은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진 뒤에 찾아온 인간 내면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했다.

르네 마그리트 <Le Faux Miroir>. 보이는 것이 실재라는 착각을 깨뜨리는 시선 출처:뉴욕 현대미술관(MoMA) 공식홈페이지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기능을 앞세운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했다. 과거의 장식적인 권위를 걷어내고, 기계 시대의 효율성을 수용한 이들의 간결한 설계는 현대 디자인의 정체성을 정립하였다.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를 중심으로 설립된 이 교육기관의 실험은 훗날 미국에서 꽃 피울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이정표가 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독일 데사우에 설립된 바우하우스. 발터 그로피우스 설계, 1926 출처: Bauhaus Dessau Foundation

과학계 또한 젊은 지성들이 일궈낸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으로 인해 확신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1927년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는 현대 물리학의 거장들이 모여 세계의 불확실성을 논쟁한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다.


문학도 이 격변의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같은 작가들은 이제 기승전결이 선명한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과감히 버렸다. 그들은 사건의 줄거리보다 우리 머릿속에서 시시각각 일렁이며 흘러가는 생각의 조각들에 주목했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확신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파편화된 내면을 정직하게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작가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외부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펜을 들어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 그 복잡하고 어지러운 속마음의 심연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균열과 불안은 바다 건너 미국에 이르러 폭발적인 ‘광란’으로 타올랐다. 이 시기 미국의 욕망을 지탱한 골조는 직선적인 선을 강조하는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이었다. 새로운 강철 공법은 거침없이 마천루를 세우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재편했고, 그 단단한 금속성 위로 기하학적인 문양의 화려함이 덧입혀졌다. 무너진 이성을 대신해 감각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미학이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직선적인 차가움과 장식적인 화려함이 결합한 이 거대한 무대는, 불안을 잊으려 더 높이 솟구치고 더 눈부시게 빛나야 했던 시대의 초상을 닮아 있었다.

크라이슬러 빌딩. 아르데코 양식의 정점을 보여주는 뉴욕의 마천루.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을 상징 출처: NYC Landmarks Preservation Commission

이른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로 접어든 미국은 물질적 풍요를 넘어 탐닉의 세계로 치달았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재즈의 선율이 대도시로 번져나갔고, 무성영화에는 비로소 음성이 입혀지며 뮤지컬의 시대를 열었다. 포드(Ford) 사가 쏟아내는 자동차는 대중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며 새로운 일상을 만들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노란색 듀센버그 자동차. 출처: Warner Bros. Pictures

여성들에게 주어진 참정권은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금주법은 역설적으로 욕망의 밀도를 높였으며, ‘스피크이지바(Speakeasy Bar)’라는 은밀한 지하 세계를 탄생시켰다.

금주법 시대의 은밀한 낙원, 영화 <위대한 개츠비> 속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 출처:Warner Bros. Pictures


근본적인 불안에서 탄생한 이 예술적·과학적 성취들은 무너진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기술과 맞물려 더욱 정교해진 시대의 기록이었다.


이 찬란하고도 위태로운 풍요를 가장 예민하게 포착해 낸 인물은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였다.


그는 스스로를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라 불렀던 동시대인들의 화려한 삶과 그 이면에 숨겨진 공허함을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보았다. 1925년 발표된 그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단순히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사랑을 넘어, 목적을 잃고 부유하던 당대 미국의 초상을 가장 담백하고도 묵직하게 그려낸 기록이다.


길 잃은 세대의 기록

시대를 앞서간 예술비평가이자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은 전쟁의 참혹함을 겪고 방향을 잃은 청년 헤밍웨이에게 '당신들은 모두 길 잃은 세대이다.(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말을 건넨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무너진 자리에서 방황하던 이들을 정의한 이 한마디는, 당시 예술가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관통하는 상징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이 말을 자신의 소설 『해는 또다시 뜬다』의 서문에 인용하면서, 구약성경 전도서의 구절을 나란히 배치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 전도서 1장 4~5절 -

이 두 문장의 연결은 절묘하다.
스타인이 가리킨 '길 잃은 세대'의 방황과 허무가 결국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나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사의 한 단면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붙잡으려 했던 과거의 추억에 대한 환상 역시, 결국은 이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덧없이 스러져갈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한다.


개츠비의 응시, 올드웨스트베리가든(Old Westbury Gardens)


초록이 깊어가는 어느 해 여름날, 뉴욕 롱아일랜드의 올드웨스트베리가든을 찾았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찰스 2세 양식의 저택이 위용을 드러낸다.

뉴욕 롱아일랜드의 올드웨스트베리가든 전경 출처: 올드 웨스트베리 가든(Old Westbury Gardens) 공식 홈페이지

철강 재벌 가문의 존 핍스(John S. Phipps)가 영국인 아내 마가리타(Margarita)를 위해 지은 올드웨스트베리가든은, 고향을 떠나 멀리 온 아내의 향수를 달래려 고향 영국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지극한 연모의 산물이다. 누군가를 위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을 설계하고 지어 올린 집념.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공기를 마주하는 순간, 자연스레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제이 개츠비(Jay Gatsby)다.

박제된 낙원의 시선, 올드 웨스트베리 가든의 테라스 필자제공
좌: 우아하게 가꿔진 영국식 정원의 파빌리온과 연못 우: 화사한 꽃들이 놓인 돌계단 너머로 펼쳐진 녹음 필자제공

위대한 개츠비 소설 속 데이지(Daisy)가 머물던 ‘이스트 에그(East Egg)’의 실제 모델 중 하나인 이곳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국식 정원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건축을 통해 그들만의 견고한 질서를 보여준다. 이는 개츠비가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결코 허물 수 없었던 정통(正統, Orthodox)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성벽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는 상류 사회의 품격, 올드웨스트베리의 드로잉룸 필자제공
드로잉룸 탁자 오른쪽 하단에 놓인 'Do Not Touch'는 견고한 그들의 삶에 대한 장벽이다. 필자제공

개츠비가 매일 밤 해안 건너에서 바라보았던 초록 불빛은, 실은 이처럼 견고하고 배타적인 정통의 세계가 발하는 서늘한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위대함 뒤의 비극적 낭만


개츠비의 마지막은 처절할 만큼 고독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데이지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매일 밤 화려한 파티로 북적였던 저택은 주인의 장례식 날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 사람의 진심을 이용하고 버린 이스트 에그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견고한 담장 안에서 평온했다.

넝쿨이 드리워진 붉은 벽돌 담장과 그 사이에 감춰진 듯 놓인 흉상. 이 견고한 벽은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그들만의 성벽과도 같다. 필자제공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게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리석을 만큼 순수한 헌신과 지독한 고독에 답이 있다. 타락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비록 대상은 잘못되었을지언정 자기 파괴적일 만큼 순수한 낭만을 끝까지 밀어붙인 열정이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물질적 가치를 좇아 비겁하게 숨어버린 이들과 달리, 개츠비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 견고한 성벽에 온몸으로 부딪혔다.

쏟아지는 꽃가루와 샴페인, 공허한 웃음소리. 비극적 낭만을 예고하듯 화려하게 타오르는 파티는 개츠비가 세운 모래성 위의 낙원이다. 출처:Warner Bros.

사람들이 꿈꾸던 아메리칸드림이 무너져가던 1920년대의 끝자락, 개츠비의 무모하고도 거대한 낭만은 초라한 장례식과 대비되며 오히려 불멸의 이름이 되었다. 모두가 숫자로 계산되는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그는 오로지 한 줄기 초록 불빛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연소시켰다.

바즈 루어만 감독,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 포스터 출처: Warner Bros. Pictures

아들의 장례식에 온 아버지는 빼곡히 적어두었던 개츠비의 일과표를 내보이며, 성공을 확신했던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개츠비의 일과표는 오늘날까지 자기 관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식의 성실로 무장한, 당대 미국의 완벽한 설계도였다.


개츠비는 이 치밀한 설계도를 따라 자신의 삶을 단 한 번의 오차도 없는 화려한 무대로 가꾸어 나갔다. 그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어 올린 부와 명성은 실은 단 한 사람의 진심에 닿기 위해 마련한 외로운 보루이자, 그녀와 함께할 낙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1920년대를 풍미한 아르데코양식의 문양. 당대의 번영과 질서, 그 이면에 감춰진 차가운 배타성을 시각적으로 대변한다. 출처: Warner Bros. Pictures

개츠비에게 부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설계도대로 무대를 완벽하게 복원했음에도 끝내 이방인으로 남았던 한 인간의 고독을 아버지는 보지 못했다. 이제 주인이 떠난 올드웨스트베리가든은 누구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설 수 있는 평범한 관광지가 되었다. 한때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고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벽이었을 공간이, 이제는 박제된 풍경이 되어 우리를 맞이할 뿐이다.


에필로그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글자보다 글자 사이에 숨은 의미를 알아내는 것처럼, 공간도 마찬가지다.

개츠비의 올드웨스트베리는 현대인에게 어떤 공간으로 치환되었을까

찬란한 조명으로 세워진 현대의 이스트에그. 출처: 롯데월드타워(Lotte World Tower) 공식 홍보 자료

도심의 세련된 밤 풍경을 무대 삼아 올린 SNS의 장면들은 100년 전 이스트 에그의 파티와 묘하게 닮아 있다. 대저택의 파티가 끝난 뒤 밀려오는 허무함이 오늘날 야망 가득한 현대인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이름을 딴 플래너에 매일의 성취를 기록하며 자신을 단련하듯, 연출된 공간 속에 머무는 나를 보여줌으로써 존재를 증명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개츠비가 밤마다 건너편 해안의 손에 잡힐 듯 일렁이는 초록 불빛에 모든 것을 던졌듯, 우리도 액정 속 푸른빛을 향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화려한 광채는 대개 시간이 멈춰 선 박제된 풍경이다.


조명이 꺼진 무대 뒤의 서늘함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개츠비의 고독을 이해한다. 화려한 성벽 밖으로 걸어 나와 꾸며지지 않은 진짜 삶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화려한 조명과 반짝임이 없어도, 지친 숨을 고르며 오롯이 나를 채울 수 있는 자리.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자리. 그곳이 비로소 진정한 나의 무대가 될 것이다.